소탈하고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다.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설명하는 배우 박정민의 말들이 그랬다. 데뷔작 <파수꾼>에 이어 10년 만에 영화를 통해 윤성현 감독, 배우 이제훈과 조우한 박정민은 10대의 고등학생에서 이번엔 20대 인생 마지막 기회를 잡는 어쩐지 더 절박한 청춘이 되어버렸다. 그중에서도 박정민이 연기한 상수는 친구들 무리에서 조금은 외따로 솟아난, 외롭고 비밀스런 캐릭터다. “내 나름대로 찰흙을 빚어서 뭔가를 만들어내지만, 결국 현장에서 감독과 동료 배우들에 의해 새로운 결과물이 나온다. 그게 재밌다”는 박정민. 그에게서 한국영화의 젊은 인력들이 똘똘 뭉쳐 만들어낸 이번 신작을 향한 애정과 존경이 엿보였다.
-상수는 여러모로 영화적인 캐릭터다. 상대적으로 분량은 적게 느껴질 수 있지만, 준석(이제훈)의 꿈을 통해 묘사되는 부분 덕분에 상징적인 면도 있다.
=준석이 앞으로 달려나가다 말고 계속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게 상수다. 나는 다른 캐릭터의 감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 캐릭터들과의 호흡도 있었지만 특히 이제훈 배우의 연기에 도움이 되어야 했다. 준석이 가진 죄의식 코드가 있고 상수도 그 안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킨다.
-친구들 사이에서 상수가 느끼는 약간의 소외감, 외로움 같은 게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상수의 사연이 더 궁금하다.
=상수는 아무래도 ‘겉도는 애’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바깥 사회에 서도 그렇다. 준석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 이 계획에 참가할 수밖에 없는 더욱 분명한 이유가 있기도 하고. 몇몇 장면에서 상수가 친구들을 쳐다보는 시선을 처리할 때 신경을 썼다. 왠지 모르게 상수는 이들과 쭉 함께하지 못할 것 같다는 뉘앙스를 주는 신들이다. 이런 장면에서 상수를 향한 안타까운 감정들을 잘 살려줘야 동력이 생길거라고 봤다. 그저 상상만 해보기로는 아픈 홀어머니를 모시는 가난하고 불우한 상수의 과거를 떠올린 적 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에게 돈을 꾸기 시작했을 거고, 아마 준석이한테까지 갔겠지.
-근 몇년간 한국영화에서 박정민이 연기하는 청춘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사바하> <타짜: 원 아이드 잭> <변산>, 그리고 <사냥의 시간>까지 계급적으로 소외된 비주류, 반항아 혹은 사이비까지. 궤도를 조금 이탈한 젊은이다.
=배우에겐 감사한 해석이다. 하지만 대체로 인물이 모자라거나 결여되어야 이야깃거리가 생기다보니까 기본적으로 청춘의 이야기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닐까? 물론 조금 엇나간 인물을 연기할 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이 있는 건 사실이다.
-본의 아니게 <타짜: 원 아이드 잭>에 이어 <사냥의 시간>에서 또 도박장을 드나들게 됐다. 범죄영화는 평소에 좋아하는 장르인가.
=미쳐서 본다. (웃음) 어렸을 때 <세븐> <스내치> <유주얼 서스펙트> 그리고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를 보면서 열광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연출 공부하러 들어갈 때도 범죄물 이야기를 제출했었다. 지하 세계 장르를 좋아한다. 상상력을 집어넣을 수 있는 부분이 많고, 기본적으로 리드미컬함을 추구하니까. 이번 <사냥의 시간>의 경우 음악감독을 맡은 가수 프라이머리 특유의 비트감이 영화의 리듬을 살려줄 것 같다.
-그동안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앙상블 연기에 유연하고 편안한 배우 같다. 주인공이되 배우들 속에 섞여 있을 때 언제나 위화감이 없다.
=굉장히 중시하는 부분이다. 내가 개인기가 뛰어난 배우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여럿이 함께할 때가 편하고 용기가 생긴다. <사바하>를 찍으면서 <사냥의 시간>으로 빠듯하게 넘어왔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촬영장 가는 게 기다려질 정도였다. 연기를 한다기보다 친구들끼리 무언가 재미난 일을 하는 기분이랄까. 내 옆에 서로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으니 무언가 과감한 시도도 보다 쉽게 해볼 수 있었다.
-젊은 감독, 배우들만 모인 촬영장이라 분위기가 남달랐을 것 같다.
=이제훈 배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데, 젊은 배우들이 한국영화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다. 선배들이 한국영화의 기반을 닦은 이후 활동을 시작한 젊은 배우들이 성과를 보여 줄 때가 왔다는 거다. <사냥의 시간>은 감독님을 비롯해 스탭들, 배우들 모두 젊고 지금 막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만들어졌다. 열심히 한 만큼 조심스럽게 성과를 보여드리고 싶다. 주목해주셨으면 좋겠다.
-<파수꾼> 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 초청받긴 했지만, 영화제 공식 레드카펫은 이번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처음이다.
=<파수꾼> 당시엔 영화제 일정보다 3주 먼저 유럽으로 떠났다. 셋(윤성현 감독, 배우 이제훈)이서 한방을 쓰면서 후드티 입고 덜렁덜렁 돌아다녔는데, 이번 베를린에선 모두 턱시도를 갖춰 입게 됐다. 다 함께 간다는 게 너무 좋다. 일정상 하루 정도만 일찍 갈 것 같은데 독일 맥주 마실 생각에 기대된다.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