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이제훈과의 대화는 영화 보는 것만큼이나 즐거울 것이다. 그는 인터뷰로 만날 때마다 최근에 봤던 영화 이야기, 또는 최근에 갔던 영화 촬영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촬영을 마친 소감을 물으면, “너무 힘들어서 여행을 떠났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극장이 고전영화를 필름으로 상영해주는 곳이더라. 그런데 그 영화가…”라는 식의 대화로 이어진다. 윤성현 감독의 데뷔작 <파수꾼>을 함께했던 “영화적 동지”로서 그에게 이번 영화는 가장 고되고 무척이나 즐거웠던 영화다. 이제훈에게 ‘윤성현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고 든 첫인상은 어땠나.
=윤성현 감독과는 오래 알고 지내면서 <사냥의 시간> 전에 썼던 시나리오도 같이 이야기하곤 했다. 세밀한 디테일보다 직선적으로 달리는 단순함이 더 눈에 들어왔고, 왜 이런 시나리오를 썼는지, 어떻게 만들 것인지 궁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옥행 열차에 올라타게 될 줄은 몰랐다.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이 어떻게 같고 다를지가 궁금하다.
=<파수꾼>이 인물들의 관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디테일한 감성으로 이야기를 직조해나갔다면 이번 영화는 스릴감 넘치는 상황, 쫓기는 공포감을 보여줘야 하고 또 더 표현해야 하는 영화였다. 윤성현 감독은 배우들도 그런 상황을 진짜처럼 느끼고 어떤 한계를 체험하기를 바랐다. 나 역시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극한의 상황을 현장에서 느꼈고 체력적인 한계도 경험했다. 한신이 끝나면 그로기 상태가 되어 뻗기도 했다. 배우로서는 이보다 더 힘든 작품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나는 전쟁영화 <고지전>도 찍어봤는데 그 현장보다 더 힘들었다.
-윤성현 감독은 극중 친구들의 리더 같은 준석을 두고 “너(이제훈 배우)를 두고 썼다”고 말하기도 했다.
=흔히 배우가 캐릭터를 연구할 때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유독 이 작품의 준석은 어렵지가 않았다. 전혀 낯설지가 않았고 나도 그럴 것 같았다.
-준석은 목표가 뚜렷한 인물이다.
=준석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케이퍼 무비 장르로서의 매력을 이끌며 보여주고 또 그로 인한 결과도 책임져야 하는 인물이다. 마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보여주는 압박과 공포감을 느껴야 하는 인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관객은 관찰자의 시선에서 준석의 옆에서 이 모든 상황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윤성현 감독이 <사냥의 시간>의 레퍼런스로 언급했던 영화들은 장르적 재미도 추구하는 한편, 영화를 둘러싼 디자인, 소품, 패션 등의 요소들이 끊임없이 문화의 아이콘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장르적으로는 케이퍼 무비와 스릴러의 결합 같은 영화다. 우리에겐 마티외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를 보여주면서 이 인물들을 참고하길 바랐다. 또 감독은 디스토피아를 묘사함과 동시에 서브컬처 요소가 곳곳에 드러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캐릭터들이 초라하고 루스한 스트리트 패션 의상을 입는다. 윤성현 감독의 실제 옷차림을 많이 참고했다. (웃음) 영화미술도 기대할 만한데 황폐화되어가는 한국의 상상 속 미래 풍경은 대체 어떤 모습인가, 기대하고 봐도 좋을 만큼 놀랍다. 거리 곳곳의 그라피티가 눈을 즐겁게 하고 또 프라이머리가 만든 힙합 음악이 흐른다. 총기가 등장하는 액션영화답게 사운드도 신경 써서 작업했다고 들었다.
-차기작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다.
=3월 초부터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김성호 감독 연출작이다. 유품정리사에 관한 이야기다. 몸을 좀 쓰게 될 작품인데 배우 이제훈의 혈기 왕성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려면 건강관리를 잘해야겠다.
-예능 출연 계획은 없나. 영화와 여행을 접목한 프로그램과 맞을 것 같다.
=홍콩영화 촬영지나 뉴욕의 시네마테크가 내 영감의 원천이다. 뉴욕에 가면 독립영화를 필름으로 종종 보곤 한다. 내 목표가 있다면 필름 영사가 가능한 독립영화관을 운영해보는 것이다. 지역별로 이런 곳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데 관객이 많이 찾아줘야 할 텐데.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