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와 스토리가 서로를 휘감은 채 결말을 향해 내달리는, 그러면서 장르적 색채가 뚜렷한 상업영화를 만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김용훈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사라진 애인의 사채 빚을 떠안게 된 태영(정우성)과 아르바이트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가야하는 가장 중만(배성우), 빚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외면받는 미란(신현빈) 등 살 길이 막막한 처지의 사람들이 정체모를 돈가방을 둘러싸고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되는 영화다. 2019년, <씨네21>이 연초에 선정했던 올해의 주목할 신작 영화 프로젝트 중 한편이었다. 당시 김용훈 감독은 인터뷰에서 돈가방을 소재로 한 범죄영화가 분명해 보이는데 “스피디하고 빠른 편집은 지양했다”고 답해 의아함을 자아냈다. 영화는 돈가방의 소재를 추적해 나가는 이야기 전개의 속도보다는 인물이 범죄에 연루된 상황, 즉 누아르 색채의 분위기나 스타일을 강조한다. 연초부터 데뷔작답지 않게 안정적인 리듬과 스타일, 그리고 배우들의 든든한 연기가 뒷받침되는 웰메이드 범죄영화가 등장한 것이 반갑다. 개봉일은 다소 미뤄졌으나 김용훈 감독의 이야기를 미리 듣고 난 후에 영화를 관람해도 전혀 지장 없게끔 스포일러는 일체 피하고 이야기를 나눴으니 안심하고 읽어도 좋다.
-올해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정말 반응이 좋아서 그간의 고생을 위로받고 온 느낌이다. 내가 영화에서 의도했던 많은 것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공감해줬고 즐거워했다. 현지 프로그래머들도 좋은 이야기를들려줬다.
-소네 게이스케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어떻게 영화화할 생각을 했나.
=우선 제목에 끌렸다. 이 소설을 처음 접할 당시의 내 심정이 제목과 같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책을 펼치자마자 빨려들어갔다. 장르적인 재미도 지니면서 동시에 인간이 눈앞에서 짐승이 되어가는 소설 특유의 서술 트릭이 흥미로웠다. 영화와는 다른 소설의 글맛을 어떻게 영상으로 옮길지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시나리오로 옮기는 작업이 오래 걸렸나.
=시놉시스를 다듬는 데 4일 정도, 전체 구조와 캐릭터의 설정 등 전체 뼈대를 만들어 집필하는 데는 2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전도연과 정우성의 첫 만남, 거기에 윤여정 배우까지, 캐스팅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제작사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전도연 배우가 시나리오를 먼저 받아봤고 캐스팅이 결정된 이후에 본인이 직접 윤여정 선생님에게 제안을 드렸다. 정우성 배우도 시나리오를 좋아해줬고 전도연 배우와의 작업 또한 기대했던 것 같다. 정가람 배우의 캐스팅도 의외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4등>(2015)에서의 그의 연기를 워낙 인상적으로 봤던 터라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인의 사랑>(2017)에서는또 순박한 이미지를 보여줘서 진태라는 인물과 잘 맞을 것 같았다.
-흔히 말하는 ‘돈가방을 찾아라’ 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애초 구조적인 설계가 중요했을 것 같다.
=케이퍼 무비의 형태보다는 오히려 돈가방이 주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따라가게 되는 이야기다. 돈가방이 당신에게 왔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관객에게도 묻고 싶었다. 구조적으로는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뉠 수 있고 전반전에는 중만, 태영, 미란 위주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이들이 점점 짐승처럼 변해갈 때 후반전에 다다르면 엄청난 포식자가 등장하는 그런 구조를 큰 틀에서 세웠다.
-이야기와 더불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시각적인 스타일이다. 빛과 어둠의 질감이랄지, 색감과 캐릭터의 조화 등 장르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한 묘사가 곳곳에 잘 살아 있다. 김태성 촬영감독, 김경석 조명감독의 협업이 돋보인다.
=촬영 전에 촬영, 조명감독님과 함께 고민한 것은 인물마다 라이팅을 다르게 하자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전도연 배우가 맡은 연희는 화이트, 태영은 블루, 미란은 주홍, 진태는 보라 등의 캐릭터 컬러를 지정한 다음 라이팅을 전부 달리하고 이들이 서로 뒤엉킬 때는 색도 섞자는 이야기를 했다. 창밖에서 실내로 쏟아지는 빛을 보여줄 때는 블라인드를 투과하는 빛의 윤곽들로 깊이감을 줄 수 있게 표현했고 그 빛이 인물과 상황을 때리는 느낌이 들기를 바랐다. 가학적인 빛이랄까. 몸을 뚫고 나가는 빛을 상상했다. 색보정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인물 개개인의 조명색이 뒤섞여 풍부한 색감을 자아낸다.
-돈가방 외에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소품의 활용이 재미있다. 예를 들면 러키 스트라이크 담배 같은 소품의 의미가 캐릭터의 맥락과 연결된다.
=그 담배 설정은 원작 소설에도 있다. 태영이란 인물의 캐릭터를 설정할 때 그의 키워드를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연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인물이고 담배라는 상징적인 소품에 대한 믿음을 지닌 인물이다. 그 믿음으로 인해 태영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캐릭터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해서 담배를 쓰게 됐다.
-돈가방을 둘러싸고 악다구니를 쏟아내는 인물 중 연희는 단연 압도적인 존재다. 시나리오 구상 단계에서부터 연희는 어떤 캐릭터이길 바랐나.
=구조적으로는 영화 전체가 연희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주목을 받게끔 설계했다. 그 안에서 연희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지점을 고민했다. 원작에서는 연희가 호랑이 문신을 하고 있는데 우린 샌드타이거상어 문신으로 바꿨다. 그 의미는 영화를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윤여정 배우가 연기하는 중만의 노모 역할도 굉장히 중요하다. 깨달음을 일깨워주는 진짜 어른의 모습 같다.
=원작에서의 캐릭터 설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캐릭터의 흥미로운 점은 직접적으로 주제를 던져주는 역할인데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윤여정 배우가 나오는 후반부 장면은 배우를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썼고 현장에서 연기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달리 레전드 배우가 아니었다.
-영화를 전공한 후 상업영화를 연출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거룩한 계보>(2006) 이후 연출부 생활을 오래 하다가 CJ엔터테인먼트 기획, 제작, 투자팀을 거쳐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30대 중반에 애초 꿈이었던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선언하듯 준비한 영화다.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는 감독이나 작품이 있나.
=나는 코언 형제의 <파고>(1996)를 보면서 굉장히 웃긴 지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서스펜스를 따라가지만 그 안에 뭔가 다른 것이 숨겨져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긴장과 유머가 동반될 때 발생하는 묘한 재미를 추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