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 수상자 김철홍 작품비평 - '아워 바디'가 무서운 이유에 대하여
2020-07-23
글 : 김철홍 (평론가)
<아워 바디>
<아워 바디>

달리기는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종종 매체를 통해 어떤 운동을 시작한 뒤 삶이 나아졌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곤 한다. 건강한 몸이 건강한 정신을 만들고, 그 정신을 바탕으로 일상을 살아가다보니 하던 일들이 잘 풀리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데 정말일까. 정말로 달리기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일까. 8년간 행정고시를 준비하다 이제 더이상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마음먹은 자영(최희서)은 이제 31살이다. 자영의 선언을 들은 자영의 엄마는 자영의 밥그릇을 개수대에 던져버린다. “그래서 너는 나이 서른에 아무것도 안하겠다고?” 엄마는 자영이 시험을 보지 않는 것보다, 그 나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더 화가 난 것 같다.

엄마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너 때문에 내가 죽겠다”는 말을 한다. 영화가 시작한 지 채 10분이 지나지 않는 시점에 언급되는 이 죽음을, 그저 부모와 자식간의 흔한 말싸움 중에 나오는 하나의 표현으로 생각하며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이 영화에 기어코 죽음이 등장해버릴 때, 다시 한번 그 의미에 대해 곱씹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영 때문에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 영화에 서려 있는 공포의 기운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자영을 달리게 하는 존재

집을 나온 자영에게 운명처럼 ‘달리기’가 찾아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달리기가 ‘달려온다’. 영화엔 자영이 무언가에 지쳐 있을 때마다, 그를 향해 어떤 몸이 달려오는 장면이 세번이나 나온다. 이 ‘삼고초려’는 이상하다. 하필 자영에게 위로가 필요한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때마침 달리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번 모두 같은 사람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모르는 사람을 세번 연속 마주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자영에게 벌어지는 일종의 기적 같은 일을 보며 드는 생각은, 여기에 어떤 신적인 존재가 개입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현주(안지혜)를 보내며 달리라고 말하는 어떤 존재. 이 운명적 부름에 자영은 달리기를 선택한다. 아니 어쩌면 선택했다기보단 선택당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달리기를 시작한 자영은 변화한다.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역시 자영의 몸이다. 카메라는 그런 자영의 몸을 강조한다.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이를 어떤 객관적인 수치로 확인할 수는 없다. 카메라는 그것을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고, 우리의 눈 또한 이를 알아보기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를 보며 뭔가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렇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다. 자영의 동생과 엄마는 자영의 달라진 몸에 대해 얘기하는데, 정확한 타이밍에 이어지는 이 증언들 또한 자영의 달리기가 누군가의 계획의 일부분인 것 같다는 느낌의 근거가 된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증언이 이뤄지는 그 순간 영화가 자영의 얼굴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자영이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몸이 달라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을 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자영의 몸이 아닌 얼굴이다. 동생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자영에게 “그러고 보니까 좀 날씬해진 것 같기도 하다”라고 하자, 카메라는 멋쩍어하는 자영의 표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장면에 바로 이어지는 신에서 자영은 들어가지 않는 바지에 아직 변하지 않은 몸을 억지로 끼워넣고 있는데, 이 모순된 숏의 배치는 동생의 말이 정말 사실인지, 아니 애초에 사실 여부가 중요하긴 한 건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엄마가 자영에게 “너 좀 달라 보인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도, 숏의 순서는 동일하다. ‘달라 보인다’고 했을 때 보여줘야 하는 것은 ‘달라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증언 바로 뒤로 붙는 것은 자영의 얼굴이다. 영화는 자영의 몸이 실제로 변했는지보단, 그 말에 자영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계획을 가진 어떤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확신을 주는 사건은, 현주의 죽음 때문이다. 현주는 왜 죽은 것일까. 이것은 정말로 자살인 것일까. 이 알 수 없는 죽음에도,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현주는 안 죽을 것 같잖아요.” “본인도 자기가 그렇게 될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나도 현주 누나 살아 있는 것 같거든.” 현주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어쩌면 사람은 아무도 현주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현주는 사실 처음부터 이상한 존재였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현주는 퇴장만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등장부터 이상했다. 그래서 이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자영이 달리기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선택당했던 것처럼, 현주 역시 현주의 선택이라기보단, 선택당한 것이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의심의 근거는 바로 이 장면이다. 어느 날 새벽에 자영은 현주의 전화를 받고 일어난다. 자영이 전날 동창 친구가 남편과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며 약간의 박탈감을 느낀 그때, 현주는 자영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자영을 깨운다. 전화 너머에선 현주 외에도 다른 친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이미 모여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전화를 받고 한강에 나가자 그 친구는 없고 현주만 있다. 아마 자영을 따로 불러낸 듯한 현주는 자영에게 비밀스레 말한다. “힘들면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뛰어. 내 기를 빼먹는다 생각하고.” 기. 현주는 자영에게 자신의 기를 줄 생각이다. 그 뒤 이어지는 달리기 신에서 카메라는 이것을 정확히 표현한다. 현주의 얼굴로부터 시작되는 카메라는 점점 내려가 현주의 몸과 발을 비춘다. 그리고 바로 현주의 발에서 자영의 발로 넘어가는 카메라는 이번엔 반대로 하체에서 상체로 올라가 마지막엔 자영의 얼굴에서 멈춘다. 지금 무언가가 현주의 몸으로부터 자영의 몸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때 자영은 달리기를 하며 처음으로 웃는다. 반대로 현주의 얼굴엔 웃음기가 점점 사라진다. 이 사건 이후 현주는 두번의 달리기 약속을 어기는데, 마치 자영에게 더이상 기를 뺏기기 싫은 것처럼, 한번은 자영을 재운 뒤 새벽에 혼자 달리기를 나가기도 한다. 현주는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자신의 달리기 혹은 기를 유지하려 한다.

그렇게 문제의 현주의 마지막 달리기가 시작된다. 이 달리기를 하기에 앞서 현주는 자영에게 말한다. “자영아, 나 오늘 너 뒤에서 뛰어도 돼?” 현주는 지금 기가 필요한 것이다. 기가 간절한 상태이다. 기를 더이상 빼앗기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 돌려 말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존재’는, 또는 이 영화는 잔인하다. 현주는 절대 뒤에서 뛸 수 없다. 자신의 위치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이어지는 달리기 신에서 현주는 거짓말처럼 또 자영의 앞에서 달리고 있다. 현주는 이 영화에서 자영에게 기를 전달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뒤에서 뛴다고 말했음에도, 앞에서 뛸 수밖에 없는 모순. 누군가의 의지가 이곳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그렇게 더이상 내 의지로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느낀 현주는 죽음을 결심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 죽음 역시 정말로 현주의 결정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자영의 뒤에 뛰겠다는 말을 뱉었다는 죄, 도구가 자신의 의지를 가진 죄로 벌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달리는 사람이 되었지만

현주가 어찌됐든 그 존재의 계획은 이루어졌다. 자영은 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더이상 누군가가 자영에게 달리라고 하지 않아도, 자영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자영을 왜 달리게 한 것일까. 현주의 희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다시 처음의 질문, 달리기는 자영의 인생을 바꾸었을까.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이 영화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이다. 내 몸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 사회에서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 사람 한명이 죽어나갔는데도 딱히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영화엔 이제 뭔가가 바뀐 줄 알았는데 실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을 매섭게 일깨워주는 장면이 있다. 앞서 언급한 ‘자영의 첫 웃음 신’은 그가 드디어 달리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자영 자신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순간이다. 그러나 이 신 바로 뒤에 이어지는 신에서 자영은 그것을 부정당한다. 자영은 엄마와 오랜만에 식사를 한다. 이 식사는 영화에 나오는 자영과 엄마의 두 번째 식사 장면이다. 엄마는 조금 변한 자영을 알아본다. “이제 좀 사람 같네.” 순조롭게 이어질 줄 알았던 대화는 그러나 순식간에 반전된다. “달리기할 근성이면 뭐라도 하겠다.” 방금 이제 좀 ‘사람’ 같다고 했던 엄마가, 바로 다음 자영에게 ‘아직 사람 구실하지 못한다’고 말을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 번째 식사 자리 또한 자영에겐 상당히 불편한 자리였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자영은 그냥 거짓말을 해버린다. 자영은 여태까지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시험 보기 싫으면 시험 보지 않겠다, 뛸 것이면 뛸 것이다, 자고 싶으면 자고 싶다고 말했던 자영이 여기서 정직원이 되었다는 거짓말을 한다. 이것은 엄마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도 아니다. 대신 이제 더이상 불편하고 싶지 않다는 포기에 가깝다. 자영의 몸은 정말 단단해졌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 단단해 보이지 않는다.

아예 밥그릇 자체를 뺏어갔던 첫 번째 식사 자리를 기억한다면, 이 영화는 식사 자리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반복되는 세번의 식사. 세번이라는 숫자는 우연하게도 현주가 자영에게 달려왔던 숫자와 동일하다. 현주의 삼고초려가 자영을 뛰게 만들었다면, 이 세번의 식사 자리는 자영의 달리기를 부정한다.

이렇듯 영화는 오히려 ‘달리기가 삶을 긍정적으로 바꾼다’라는 명제를 자꾸 부정하는 것 같다. 달리기 그 자체로 보이던 현주가 아무 말도 없이 세상을 떠난 후, 자영은 그런 현주를 따라 한다. 현주가 뛰었던 코스를 달리고, 현주의 집에서 현주의 술을 마시고, 현주와 똑같은 포즈를 잡은 채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보기도 한다. 또한 현주의 판타지를 자신의 판타지인 양 실현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주를 따라 하면 따라 할수록, ‘사람 구실’과는 멀어진다. 그나마 들어간 회사도 더이상 다닐 수 없게 되고, 엄마는 여전히 자영의 달리기보단 돈벌이에 관심이 많다. 유일하게 달리기를 긍정하는 사람은 자영의 동생뿐이다. 하지만 이 동생도 어딘지 모르게 전형적인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잦은 가출, 그리고 ‘친구들의 질투’에 대한 언급들이 이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나마 있는 ‘달리기 긍정 인물’을, 영화는 좋지 않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왔으면, 영화의 답은 도리어 명료해 보인다. ‘달리기는 절대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오히려 악영향을 주기까지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자영의 자위 장면이다. 이 장면은 자영이 (삶은 힘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타지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영이 자기 자신의 ‘바디’를 완벽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의 답을 확인한 채, 다시 이 엔딩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 자위는 슬픈 자위다. 여느 영화의 남성주인공들을 통해 자주 볼 수 있었던 그 자위와 같은 맥락으로 보이는 것이다. <버닝>의 종수(유아인)의 자위는 무슨 의미였는가. 아니 단순하게 자위는 혼자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자영의 판타지는 제대로 실현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자영이 자신의 판타지에 대해, “진짜 비싼 호텔에서 ‘한번 하는 거’”라고 말할 때, 거기엔 혼자가 아니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는 자영의 얼굴에서 끝이 난다. 이 얼굴은 오프닝의 얼굴과는 분명 다른 것같이 보인다. 조명의 인위적인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다른 것은 틀림없다. 달리기는 확실히 몸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강한 몸은 사람을 바꾼다. 그런데 정말로 무엇이 바뀐 것일까. 왜 영화는 세번씩 긍정과 부정을 반복하며 자영에게 달리기를 줬다가, 다시 뺏으려는 것일까. 이 얼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희망인가 아니면 불안인가. 호텔에서 내려온 자영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까. 아니 내려올 수는 있는 것일까. 그런데 진짜 올라가긴 한 것일까. 다시 한번, 이 영화는 자영의 ‘얼굴’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바디’에 관한 영화, ‘아워 바디’이다. 바뀐 것은 분명 몸이다. 보여줘야 하는 것도, 자랑해야 하는 것도 몸이다. 그런데 지금 몸은 어디에 간 것일까. 또다시 생각나는 영화 초반부의 ‘죽음’. 이 영화는 정말로 무서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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