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주노초파남보. 가시광선의 끝자락에 ‘보라’색이 있다. 이 색의 바깥에서 출발한 보이지 않는 빛이 혜진을 감싼다. 그녀는 이를 피하고자 자외선 차단제를 얼굴 위에 바른다. 차단제를 덧바른다 해도 태양은 계속 그녀 위에 있다. 이것이 <얼굴들>에 쌓인 첫 번째 레이어(layer)다. 이 영화의 제목에도 보이지 않는 레이어가 존재한다. <Possible Faces>. 그것은 가능성이며 영화가 묻고자 하는 질문과 연결된다. “<얼굴들>에서 얼굴(들)을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얼굴(들)은 무엇인가?”
<얼굴들>은 등장인물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아내고 느슨하게 몽타주한다. 영화엔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중심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타임 라인만 나열될 뿐이다. 독립영화의 팬 혹은 시네필이 아니라면 어쩌면 당황스러울 영화가 이 영화다. 왜냐하면 <얼굴들>은 서사보다 개념을 택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서사가 약화된 자리에서 자연스레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엔 ‘얼굴’이 없다.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클로즈업한 얼굴 말이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영화를 구성하는 주된 이미지는 아니다. <얼굴들>은 인물들의 얼굴을 공간상의 하나의 점처럼 담아낸다. 제목 덕분에 영화의 소실점은 인물들의 얼굴로 수렴한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인물들의 행동 전반이다.
반면에 이강현 감독의 첫 번째 작품인 <파산의 기술記述>은 클로즈업한 얼굴이 자주 등장한다. ‘얼굴들’이란 제목은 오히려 이 영화에 어울린다. 영화는 IMF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시대의 풍경을 사람들의 얼굴로 몽타주한다. 영화는 어떤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장르의 일반적인 스타일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에 영화는 파산을 기술하는 하나의 기술(Skill)을 선보인다. 그것은 파산한 사람들만 다루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IMF 사태의 직간접적인 영향권에 놓인 사람들과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 승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동시에 담아낸다. 파산은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얼굴들을 같이 담아내야만 온전히 기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강현은 관객이 영화에 거는 기대감을 무너뜨리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그의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누군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 듯한 태도에 있다. 그의 태도가 작품이 되면 어느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의 작품에 ‘경계’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여기서 나는 그의 3편의 작품을 ‘얼굴 3부작’이라 말하고 싶다. <파산의 기술記述>과 <얼굴들>은 얼굴을 통해 시대를 사유한다. 이 사유의 특징은 말이나 글로 설명되지 않고 어떤 이미지를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그 이미지는 얼굴 개념을 기반에 두고 있다. ‘얼굴 3부작’에 <보라>를 포함하기 위해서 얼굴을 한자로 변환시킬 필요가 있다. 얼굴은 한자로 면(面)이다. 면(面)이 포함된 수많은 단어는 그의 영화를 좀더 풍부하게 이해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강현의 얼굴(面) 개념을 알기 위해서 2005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야 한다.
2005년이란 시대의 단면을 그린 <파산의 기술記述>에서 이강현은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 이미지는 그의 3편의 영화를 관통하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 이미지는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은 벽이다. 영등포 호텔 나이트 전단지 위로 담보 대출과 국제결혼 알선 전단지가 쌓여 있다. 이강현은 이 이미지에 다음과 같이 내레이션한다. “이 벽은 앞쪽으로 자라나고 있다. 켜켜이 쌓여 이윽고 우리 눈앞에 당도하는 무엇. 시간이 벽을 가로질러 우리 앞에 마주하게 하는 무엇.” 이강현은 벽에서 얼굴을 사유한다. 북벽을 ‘North Face’라고 부르듯이 벽은 다름 아닌 얼굴(面)이다. 그는 얼굴 그 자체보다는 그 표면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심을 보인다. 영화는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또 다른 얼굴을 등장시킨다. 그것은 TV다.
<파산의 기술記述>의 두 번째 단락인 ‘요약’에서 TV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이 단락은 IMF 사태의 영향권에 놓인 사람들의 얼굴을 담아낸다. 이 단락은 다시 두개의 카테고리로 나뉜다. 첫 번째 카테고리는 IMF 사태 이후 노동 유연화 정책으로 인해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사람들이다. 카메라는 이들을 화질을 다르게 하여 담아낸다.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브라운관 TV의 주사선이다. 주사선이 발생한 이유는 인터뷰 영상을 TV에서 재생하고 카메라가 이를 찍었기 때문이다. 같은 얼굴을 화질을 다르게 하여 담아낸다고 의미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의미가 발생하는 순간은 TV 광고가 나온 이후다. 이 광고는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가 출연한 카드 광고다. 그는 광고에서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계속 발전하고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내레이션한다. 광고의 마지막에서 그는 “내가 원하는 거요?”라고 말한다. 이때 타이거 우즈의 얼굴은 클로즈업한 얼굴이다. 광고 영상 이후 인터뷰 영상이 다시 시작한다. 인터뷰이들은 타이거 우즈의 멘트를 그대로 따라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들은 자신의 노동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희망이 가득 찬 이들의 얼굴 위로 다시 TV 주사선이 드리운다. 이렇게 첫 번째 카테고리가 마무리되고 클로즈업된 TV 이미지가 등장한다.
TV는 하나의 텅 빈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매개체다. 그 안의 내용은 계속해서 바뀐다. 첫 번째 카테고리에서 기업이 사람들에게 극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것을 확인했다. 기업의 상품인 카드가 사람들이 처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주사선을 통해서 사람들이 TV 상자 안에 갇힌 형상을 만들어낸다. TV는 영화가 파산을 기술하는 데 일종의 방해꾼인 셈이다. 이강현과 TV는 대결을 벌이는 셈이다. IMF로 파편화된 삶의 조각을 모으는 대결 말이다. TV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하나의 수단이며 사람들은 이에 포획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강현은 그 위험성을 담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지들간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몽타주는 그것을 유도한다. 이는 두 번째 카테고리에서도 이어진다.
두 번째 카테고리는 IMF 사태 이후 파산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카메라는 이들의 얼굴을 상하로 나누어 익스트림 클로즈업해 담아낸다. 영화는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함으로써 경제적 파산의 심연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상하로 나뉜 얼굴 이미지는 하나의 온전한 얼굴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는 두 이미지 사이에 소실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소실된 부분을 철거가 한창인 아파트 단지 이미지로 대체한다. 폐허로 변해버린 아파트 건물 벽 위에 ‘86’이란 숫자가 적혀 있다. 이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어내는 이강현의 전략이다. 이 이미지 다음으로 TV 상자가 등장하고 그 안에서 인터뷰 영상이 재생된다. TV는 전보다 자신의 윤곽을 더 드러낸다. 그 안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TV가 담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이들의 한탄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인터뷰에 참여한 3명 중 한명의 얼굴은 아랫부분만 존재한다. 이 사람은 의료보험 카드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 순간, 그가 카메라를 응시한다. 비록 그의 눈은 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의 분노는 느낄 수 있다. 이 감정은 다음 장면을 몽타주함으로써 발생한다. 다음 장면에서 TV는 자신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낸다. TV 상자 안에 지금 586세대들이 등장한다. 최민희 전 국회의원은 승리를 외치고 있고, <Happy Birthday To You>로 유명한 가수 권진원이 축하 공연을 하고 있다. 이는 2005년이란 시대 상황을 표현함과 동시에 하나의 경고로 읽을 수 있다. 이강현은 영화를 통해서 2005년을 승리로 포장하려는 역사 기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 기술 방식을 시간 여행을 통해 고찰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TV의 역사다. 시간 여행은 TV, 그 내부 안으로 클로즈업하는 것이다. 따라서 TV의 윤곽은 다시 사라진다. ‘시간 여행’ 단락에서 영화는 TV가 전파하는 감정 또는 이데올로기에 포획됐던 사람들의 얼굴을 연대기순으로 몽타주한다. 본격적인 시간 여행에 앞서 바로 위에서 언급한 3명과의 인터뷰가 다시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의 얼굴 위에 TV 주사선은 드리우지 않는다. 이 얼굴들은 어쩌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얼굴을 뒤로하고 영화는 1960년대부터 국가나 정책에 호명된 사람들의 얼굴을 묶어낸다. 그것은 우리의 기억을 구성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영화는 다시 2005년이란 현재에 도달한다. 그리고 묻는다. 과연 지금이 ‘승리’한 것인지 말이다.
이강현은 마지막 단락인 ‘집행자들’에 ‘386세대’라고 호명된 이들을 위치시킨다. 영화는 87년 민주화 항쟁 기념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얼굴을 담아낸다. 서울시청 광장에 설치된 빛을 발산하는 무대는 마치 TV와 같다. 카메라는 이 행사보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 그들은 웃고 노래를 부르며 지금 이 순간을 승리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이강현은 같은 장소, 다른 얼굴을 몽타주한다. 민주노총 파업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굳은 얼굴 말이다. 이 두 이미지 사이에 엄밀한 의미의 인과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들간의 인과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몽타주는 우리가 손쉽게 저지르는 사유체계이기도 하다. <파산의 기술記述>은 이를 시작부터 경고했다. 오프닝 시퀀스로 돌아가보자.
<파산의 기술記述>의 오프닝 시퀀스는 지하철 CCTV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만든 것이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 사람이 선로로 내려간다. 다음 이미지에서 열차가 역내로 진입하려고 한다. 이러한 충돌 몽타주를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죽음을 쉽게 상상한다. 하지만 두 이미지는 각기 다른 시간에 벌어진 상이한 사건이다. 또한 선로의 방향도 다르다.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진 이미지들의 접합 속에서 우리는 이들의 움직임만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의 한계다. 이강현은 이 한계에 고정관념도 추가시킨다. 이 짧은 순간에 관객은 선로에 내려간 사람의 얼굴을 본다. 그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 순간, 그 얼굴에 아찔한 내러티브가 투사된다. 이강현은 몽타주와 얼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사유체계를 경고하고 있다.
<파산의 기술記述>이 CCTV 이미지로 시작했다면, <얼굴들>은 CCTV와 함께 마무리된다. <파산의 기술記述>은 CCTV 기록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감독 자신의 시각을 충분히 드러냈다. 반면에 <얼굴들>은 좀더 기계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기선은 고개를 돌리고 서 있다.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카메라는 CCTV가 있는 전봇대를 포커싱하고 있다. 기선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드러낸다. 카메라는 즉각적으로 그의 얼굴을 포커싱하지 않는다. 이 숏 안으로 누군가가 등장하면서 카메라는 이들을 포커싱한다. 카메라는 이들의 얼굴이 아닌 사람의 형상(人)을 움직임 속에서 파악한다. 이는 완전한 기계적 시각이다. 우리는 기계적인 시각으로 <얼굴들>을 봐야 하는 것이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공간 속의 점처럼 그려낸다. 우리는 그 점들을 움직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굴들>에서 과연 어떤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일까? <파산의 기술記述>은 사람들의 얼굴로 몽타주를 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남는 이미지는 그 얼굴들로 만든 하나의 콜라주 작품이다. 이것은 마치 한국 현대사를 그려낸 신학철 화백의 콜라주 작품과 같다. 이강현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로 2005년이란 시대의 얼굴을 형상화했다. <얼굴들>은 두개의 얼굴을 제시한다. 하나는 세계 혹은 지구라는 얼굴이다. 이는 영화가 거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얼굴이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의 시점을 지구 밖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영화는 지구 밖에서 안으로 수직적으로 쌓이는 일련의 시스템을 그린다. GPS, CCTV 등의 시스템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한 시스템이 빚어내는 것은 좌표화된 지구라는 얼굴이다. 이는 마치 바둑판과 같다. 또 하나의 얼굴은 영화 속 인물들의 얼굴이다. 그 얼굴은 바둑알과 같다. <얼굴들>에서 얼굴을 본다는 것은 인물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의 얼굴은 그들이 놓는 수다. 따라서 얼굴은 그 자체보다 공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일하고 있는 기선부터 살펴보자.
기선(박종환)은 고등학교의 행정실 직원이다. 그는 학생들의 졸업사진을 검수하다 진수(윤종석)라는 학생에게 마음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진수를 챙기는 모습은 선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진수의 입장에선 오지랖에 가까운 행동이다. 또한 기선은 학교 옥상에서 동료에게 직장에서 느낀 회의감을 늘어놓는다. 그는 “이렇게 학교에 있으면 10년 뒤나, 20년 뒤나 똑같을 것 같지 않나요? 이 큰 건물에서 얘들 얼굴만 바뀌고…”라고 말한다. 그가 느낀 회의감을 고려해보면 진수를 향한 열정이 지나치게 뜨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기선의 열정을 프레임을 통해서 시각화한다. 기선의 입장에서 진수는 자신의 프레임에서 계속해서 벗어나려는 학생이었다. 기선의 프레임, 즉 그의 보살핌은 정작 원하는 학생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기선은 떡볶이집에서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 떡볶이집 창문 프레임 안에 그가 서 있고 그 안으로 한 학생이 들어온다. 태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학생은 기선에게 자신을 어필한다. 기선은 그가 왜 자신에게 이러는지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기선의 열정은 이직한 곳에서도 유지됐다. 학교를 퇴사한 기선은 회사의 사보를 제작하는 출판사에서 기자로 일을 시작한다. 그의 열정의 방향은 이제 위를 향한다. 그 대상은 ‘제3조정관’이었다. 그는 기선의 시안에 대해서 승인을 내려주지 않는 회사의 담당자다. 기선은 진수를 찾아 헤맸듯이 제3조정관을 찾아 돌아다닌다. 기선은 직접 그를 보기 위해 회사로 찾아가지만 그의 부하 직원만 만날 뿐이다. 그 직원은 기선의 열정에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기선이 또다시 회사로 찾아갔을 때도 그는 없었다. 기선은 그가 문화회관에 갔다는 소식을 직원에게 전해 듣고 그곳으로 향한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문화회관에서 기선은 제3조정관으로 보이는 인물을 만난다. 영화는 전시장으로 들어오는 기선을 화면의 가장 왼쪽에, 제3조정관으로 보이는 인물을 프레임 밖에 위치시킨다. 그가 기선과 악수를 할 때, 우리는 그의 손 정도만 볼 뿐이다. 그는 제3조정관이 아니었다. 그는 제3조정관과 정보가 교류되는 비슷한 위치의 사람으로 파악된다. 그는 기선에서 진수를 취재해보라고 권유한다. 이들의 대화가 끝이 나고 카메라는 기선의 오른쪽에 위치한 그림들을 줌인하고 그 사이로 알 수 없는 그 인물이 지나간다. 그는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스마트폰을 하면서 지나간다. 이 장면에서 기선은 자신의 모든 행적이 전시된 것이다. 반면에 기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제3조정관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기선을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표현한다. 기선은 영화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만나고 많이 움직인다. 그는 흐르지만 갇혀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그의 수는 읽힌 것이다.
반면에 혜진(김새벽)은 식당이란 한정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가 운영한 골목 식당을 리모델링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려 한다. 그녀는 자신의 오감을 일깨워 자기 자신도 리모델링하려고 한다. 그녀는 식당 운영을 위해 동네 맛집을 탐방하고 간장, 식초 등의 조미료를 맛보며 미각을 되살린다. 또한, 그녀는 자주 걸으며 자신의 신체에 도시를 매핑하고 만년필에 자신의 감각을 실어 일기를 쓰고 하루의 일과를 되새긴다. 영화상에서 혜진은 유일하게 시점 숏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점 숏에서 사람들이 관찰된다. 영화는 이렇게 시각이란 감각을 혜진에게 부여한다. 혜진의 감각 훈련은 행동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녀는 잔반을 재활용하지 않는 것을 식당 운영 원칙으로 삼았다. 그녀는 가지런히 남긴 잔반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지만 과감하게 잔반을 버린다. 혜진이 놓는 수(手)는 감각적인 것이고 이것들이 모여 삶의 미세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감각을 부여한다는 것은 좌표화된 공간으로부터 탈주를 의미하기도 한다. 감각과 기억이 점차 기계에 외주화되는 상황에서 혜진은 그것을 거부하려고 한다. 그녀는 안 가본 곳들을 많이 가보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중고차를 구매해서 여행길을 나선다. 내비게이션도 없이 그녀는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그녀는 시스템의 오류가 되려 한다. 좌표화된 공간에서 추적되지 않는 존재 말이다.
좌표화된 공간에서 추적되지 않는 사람이 영화에 또 존재한다. 진수가 그러한 인물이다. 그는 어쩌면 영화가 그리는 감시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물인지도 모른다. 진수는 초반에 잠깐 등장하고 영화상에서 1시간가량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에게 안 좋은 상황들을 심어놓는다. 축구 선수인 진수는 부상을 당하고 그의 아버지는 병세가 악화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진수는 빈집을 털어 돈을 구해 새로운 집을 얻는다. 진수는 <파산의 기술記述>에서 선로로 내려간 외국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 외국인의 얼굴에 투사한 어떤 고정관념들이 <얼굴들>의 진수라는 인물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지만 진수는 그 외국인과 다르게 영화에 다시 등장한다. 진수의 재등장은 <파산의 기술記述>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파산의 기술記述>은 그 외국인이 끝내 어떻게 됐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에 <얼굴들>은 진수를 다시 등장시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명한다. 진수는 우려와 달리 누군가의 노래 제목처럼 별일 없이 잘 살고 있었다.
기선은 진수를 취재하기 위해 그를 오랜만에 만난다. 카메라는 이들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이들은 동네 뒷산에 있는 어느 외딴곳에 다다른다. 그곳엔 무덤이 많았다. 그곳에서 진수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다. 그는 기선에서 차단제를 건넨다. 그때 진수의 표정엔 기선을 향한 원망이 섞인 듯해 보인다. 기선의 얼굴에선 어색함이 묻어난다. 햇빛도 들지 않고 핸드폰 수신도 잡히지 않는 이곳은 죽은 공간이자 사각지대를 의미한다. 진수를 상징하는 이 공간에서 진수는 기선에게 자신을 왜 찾아왔냐고 묻는다. 기선은 이에 말을 흐린다. 영화는 아이러니하게 진수를 죽은 공간에 위치시키고 그를 생존 신고한다.
<얼굴들>이 그리는 가능한 얼굴(들)이란 좌표화된 지구라는 얼굴이며 그 안에서 추적되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영화는 감시 사회 혹은 통제 사회를 방불케 하는 시대의 얼굴을 재현한다. 위에서 살펴본 이외에도 <얼굴들> 안에는 얼굴에 관한 다양한 사유들이 산포되어 있다. 이 영화에 알맞은 비평 스타일은 잘 짜인 글이 아닐 것이다. 이강현의 영화처럼 하나로 묶이지 않는 글들일 것이다. 어쩌면 그의 영화를 글이 아닌 이미지로 설명하는 것이 더 수월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굴들>은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를 떠오르게 한다. 이 영화에서 고서점을 운영하는 하지메는 전철의 소음을 녹음하는 철도 마니아로 나온다. 이 영화는 <얼굴들>과 같은 인상을 준다. 또한 이 영화 안에 <얼굴들>을 이해할 수 있는 큰 힌트가 있다. 그것은 하지메가 만든 이미지다. 그는 전철들이 교차하는 이미지를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에서 그린다. 그는 자신의 활동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하지메의 활동은 이강현의 영화 만들기와 흡사하다. 이강현은 영화를 통해서 관객에게 하나의 이미지를 남기고자 한다. 그의 영화는 관객에게 시각적 심상을 심어준다는 의미에서 ‘영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얼굴들>은 <카페 뤼미에르>처럼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형상화된 이미지를 보여주진 않는다. 반면에 <파산의 기술記述>은 마지막에서 그 힌트를 제공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강현은 서울시청 광장을 스케치한다. 그는 펜으로 점을 찍어 사람들의 얼굴을 표현한다. 마치 <얼굴들>처럼 말이다. <파산의 기술記述>은 사람들의 얼굴을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봤다.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는 그 거리감을 멀리 떨어뜨려 공간 속에서 얼굴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야만 손쉽게 인과관계로 빠지는 사유의 함정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는 몽타주하지만 관객은 콜라주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