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테넷⑤] <테넷: 메이킹 필름 북>을 통해 살펴본 제작 과정
2020-09-03
글 : 남선우
승용차 고르듯 폐비행기를 쇼핑하다니
방호복을 입은 배우들을 바라보는 놀란 감독(맨 왼쪽)과 촬영감독 호이터 판호이테마. 사진제공 문학수첩

“이해하려 들지 마. 느껴.” 이만큼 <테넷>을 잘 표현한 대사가 있을까. 생소한 물리 법칙과 복잡한 타임라인을 간파하지 못하더라도 영화를 풍부히 감각할 수 있다. 시청각을 자극하는 스펙터클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20년 전부터 구상해온 역행의 이미지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2014년부터 <테넷>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 <덩케르크> 이후 시나리오를 완성해 2018년 겨울에 팀을 꾸려 프리프로덕션에 돌입했고, 2019년 5월부터 11월까지 촬영에 임했다. 그 과정을 영화평론가이자 기자인 제이스 모트람이 좇았다. 그가 놀란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 배우들을 인터뷰한 기록인 <테넷: 메이킹 필름북>이 8월 28일 문학수첩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을 토대로 <테넷>의 제작기를 들여다보자.

인버전을 영화적으로 구현하기

이글 마운틴에 지어진 스탈스크-12 세트. 사진제공 문학수첩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인버전이 가진 시각적 잠재력을 믿었다. “카메라나 영화가 발명되기 전, 인간에겐 움직이는 사물을 역순으로 시각화할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카메라 메커니즘의 산물이다. 그 덕에 우리는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는 엄청난 통찰력을 갖게 됐다.” 놀란 감독은 카메라 메커니즘에서 인버전을 영화적으로 구현할 방법론을 채택한 것은 물론 아이맥스 카메라를 역방향 촬영이 가능하도록 개조하기까지 했다.

거꾸로 진행되는 특수효과와 액션을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했다. 특수효과감독 스콧 피셔는 발화, 승화, 폭발과 같이 물질이 변화하는 찰나를 거꾸로 재생해도 멋있게 보일 수 있는 기법을 강구했다. 사토르(케네스 브래너)가 붙인 불이 인버트 효과로 얼음이 되는 장면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는데, 유리에 낀 서리를 불로 녹이는 과정을 찍은 후 이를 역재생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인버전 미학의 정점은 스탈스크-12에서의 전투 중 등장한다. 폭발했던 벙커가 원상태로 돌아가는 장면을 비롯해 건물의 윗부분은 폭발하고, 아랫부분은 원상태로 돌아가는 신을 위해 특수효과팀은 건물 세채를 활용했다. 10m 높이의 건물 한채는 파괴 전후의 두 상태를 나타낼 수 있게 설계되었고, 나머지 두채는 이 건물의 3분의 1 크기 미니어처로 지어졌는데, 한채는 역방향, 다른 한채는 정방향으로 폭파 장면을 촬영했다. 앵글을 일치시킨 각 숏을 하나로 합쳐서 놀라운 장면이 완성되었다.

순행하는 인물과 역행하는 인물을 한 화면에 담아야 했던 액션 신 촬영도 까다로웠다. 오슬로 프리포트의 로타스 회전문 앞에서 시작되는 교전이 그 예다. 회전문을 통과해 인버트된 인물의 역행 움직임은 스턴트감독 조지 코틀, 파이트 코디네이터 잭슨 스피델, 안무가 매들린 홀랜더가 협업해 ‘거꾸로 싸우기’를 적용한 결과물이다.

음악사 속 역행의 소리를 찾아

쇄빙선 회전문 세트. 사진제공 문학수첩

역행의 아이디어는 시각적으로만 머무르지 않았다.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 음악상(<블랙팬서>) 수상자이자 한스 짐머의 추천으로 <테넷>팀에 합류한 루드비그 예란손은 인버트 개념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사 속 역행(retrograde) 작곡법을 공부했다. 앞으로 들어도 뒤로 들어도 똑같이 들리는 곡을 쓰고자 연구한 그는 기타에 사용되는 이펙터로 변형한 퍼커션 소리부터 디스토션이 들어간 인더스트리얼 계열 소리, 군악대에서 연주하는 스네어 드럼과 힙합에서 주로 활용하는 808 베이스 드럼의 비트를 섞어 “색다르고 미래적인 소리”를 창조했다. 한편 “멜로디와 하모니를 이야기가 지닌 정서에 맞추”기 위해 애쓴 그는 현악기를 사용해 일렉트로닉 장르에 오케스트라적 요소를 적절히 녹여냈다. 예란손은 “기술적인 것에 인간미를 더하는 이 아이디어는 <테넷>의 테마로 완벽하다”고 자평했다.

체르노빌의 느낌을 구현한 스탈스크-12

오슬로 회전문 단면도. 사진제공 문학수첩

<테넷>의 타임라인은 공간을 중심으로 플롯을 복기한 후에야 완성될 수 있을 테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곳으로 관객을 데려가기 위해, 제작 책임자 토머스 헤이슬립, 미술감독 네이선 크롤리가 놀란 감독과 함께 크랭크인 5개월 전부터 로케이션 헌팅을 시작했다. 장대한 광경으로 영화를 여는 우크라이나 오페라하우스 신에 적합한 극장을 찾고자 스톡홀름과 오슬로에 들른 이들은 결국 에스토니아 탈린의 린나홀을 선택했다. 소련 시절에 지어진 브루탈리즘 양식 건물이 풍기는 느낌이 이야기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 고속도로추격 신을 찍은 라그나 대로 또한 이때 발견했다. 놀란의 원작 시나리오에 없었던 탈린은 이 과정에서 <테넷>의 여러 무대 중 하나로 추가되었다. 프리프로덕션 기간에 <다크니스 인 탈린>(1993)을 본 놀란이 헌팅 중 “충동적”으로 탈린행을 결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토르의 고향이자 클라이맥스 전투 신이 펼쳐질 스탈스크-12의 촬영지를 찾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미술감독 네이선 크롤리는 몽골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 팀원을 파견해 “가고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들 것 같은 황폐한 곳”을 찾아 헤맸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장소는 바로 캘리포니아에 있는 이글 마운틴의 버려진 광산. 조슈아트리국립공원 인근 일대인 이곳은 산업 폐허지나 다름없었는데, 미술팀은 “체르노빌의 느낌을 구현”하기 위해 30채의 건물과 가로등, 표지판을 공수해 마을을 꾸렸다.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와 아이브스(에런 테일러 존슨)가 긴박한 순간을 맞이하는 스탈스크-12의 동굴은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에 지어졌다. 30m 높이의 스테이지를 채운 동굴 세트는 현실감을 갖추기 위해 몇번의 폭발을 거쳤다. 떨어지는 물줄기를 연출하기 위해 물탱크와 펌프도 사용되었다.

물리학자까지 동원된 비행기 폭파 신

쇄빙선 회전문에서 인버트되길 기다리는 군인들. 사진제공 문학수첩

놀란 감독은 건물과 동굴에 이어 비행기도 직접 폭발시켰다. <덩케르크>에 참여했던 항공 코디네이터 크레이그 호스킹을 다시 만난 놀란은 오슬로 프리포트에서 비행기가 격납고에 충돌하는 신을 찍기 위해 “가족이 탈 승용차 고르듯” 폐비행기를 쇼핑했다. 선택된 747 비행기는 촬영을 위해 개조되었으며, 비행기 브레이크가 정확히 작동되어야 하는 시점을 산출하기 위해 물리학자도 동원되었다고. 놀란은 이처럼 CG를 지양하는 것은 물론 영화의 세계관을 설득하기 위한 각종 장치들도 실제로 제작한다. <인셉션>의 호텔 복도 신을 위해 실제로 회전할 수 있는 세트를 만든 것이 대표적인데, <테넷: 메이킹 필름 북>에서는 <테넷>의 갈등을 상징하는 알고리즘과 인버전에 사용되는 장치인 회전문의 제작 과정을 낱낱이 소개한다. 영화에는 오슬로 프리포트, 탈린 프리포트, 스탈스크-12로 향하던 쇄빙선에 있는 회전문까지 총 세개의 회전문이 등장하는데, 미술감독 네이선 크롤리는 인버전의 원리에 따라 ‘원통이 두개 있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후 런던 지하철, 정확히는 과거에 워털루역과 뱅크역을 오갔던 둥근 모양의 알루미늄 열차에서 착안해 두 원통이 한쌍을 이루는 회전문을 디자인해 오슬로와 탈린 회전문에 적용했다. 스탈스크-12로 향하는 군인들이 탑승하는 회전문은 여러 명이 이용해야 하므로 가장 이질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데, 이 또한 비상구와 차단 장치 등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사진제공 문학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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