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넷>의 초반부. 기차가 정방향, 역방향으로 지나는 선로 사이에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가 결박된 채 앉아 있다.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분노한 러시아 요원들은 시간을 뒤로 돌린 후 주도자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함구한 채 극약을 삼키고 자살 시도를 하는 주도자. 눈감은 그의 얼굴 위로 영화 <테넷>의 로고가 겹친다. 사명감 강한 스파이와 정방향, 역방향으로 돌진하는 두 기차, 뒤로 돌아간 시계침. 영화의 시작을 여는 이 시퀀스는 ‘시간과 스파이’라는 <테넷>의 주요 소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테넷> 속 인물들은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설정이지만, ‘인버전’이란 기술을 통해 인물들이 과거의 한 상태로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반대로 날갯짓을 하는 새, 뒤로 물러나는 파도와 같이 인버전된 세계에선 모두가 필름을 되감은 듯 거꾸로 작동한다. 때문에 현재 세계와 인버전된 세계가 맞물릴 경우 시공간이 뒤틀린 듯한 생경한 광경이 펼쳐진다. 하지만 <테넷>은 그 낯선 움직임들을 포기하고 외면하기보다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힘을 지닌 영화다. <메멘토>부터 이어져온, 그 복잡한 세계를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게 만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게임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시간의 시각화에 주목한 첩보물
<테넷>은 정체를 숨기고 임무를 수행한다는 스파이물의 기본 설정을 그대로 따른다. 영화는 복제된 마크를 팔에 붙이고 대테러집단 단원인 척 오페라하우스로 질주하는 주도자를 따라가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는 테러집단의 타깃인 남성을 도피시키고, 세계를 멸망시키는 데 필요한 사물인 ‘알고리즘’ 역시 비밀리에 빼돌린다. 남성의 행방을 묻는 러시아 요원들의 협박으로 주도자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삼킨 약이 위약이었던 덕에 무사히 깨어난다. 주도자는 한 남자로부터 자신이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소식과 비밀집단 ‘테넷’의 이름을 전해 듣고 본부의 연구실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연구원은 주도자에게 인버전 기술과 제3차 세계대전에 관해 설명해준다. 탄환의 주인을 찾아 인도의 무기 거래상을 찾아간 주도자는, 프리야(딤플 카파디아)로부터 테넷의 정체, 그리고 알고리즘을 소유한 사토르(케네스 브래너)에 관해 듣는다. 사토르가 현재와 미래 사이의 브로커로 활동하며 세계 멸망을 도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도자는 그에게 접근하고, 알고리즘을 빼앗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주도자는 노르웨이, 영국, 인도 등 다양한 나라를 오가며 여러 차례 타인으로 분한다. 가령 처음에는 대테러집단의 요원으로 영화에 등장했지만, 사토르 앞에선 전직 외교관으로 활동하는 식이다. 독특한 점은 마지막까지 주도자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정체를 숨기고 활동한다는 스파이라는 설정에 그만큼 힘이 실린다. 그러나 영화는 스파이인 주도자의 임무를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기존의 스파이영화들처럼 임무 전달-수행-해결의 구조 안에서 서스펜스를 구축하기보다 오히려 최소한의 단서만 제시하면서 주도자의 이동을 유도한다. 주도자는 자살 시도 직후 만난 남성에게 비밀조직 테넷의 이름과 제스처만 전해 듣고, 연구원에게서는 인버전 기술과 제3차 세계대전에 관한 간단한 정보만 얻는다. 프리야에게 가서야 테넷과 사토르에 관한 설명을 듣지만 그조차도 완벽한 정보는 아니다. 키를 쥔 조력자 CIA 요원 닐(로버트 패틴슨)도 “나중에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며 진실을 밝히는 순간을 최대한 뒤로 유보한다. 그로 인해 영화 말미에 가서야 세계 종말을 막기 위한 단체 테넷에 관한 파악이 가능해진다. <테넷>은 스파이영화의 특성은 유지하되, 그 안에서 인물의 디테일한 설정과 서사를 단순화한다. 그리고 시간을 역행하는 인버전 세계와, 시간이 순행하는 현실 세계가 맞물리는 순간을 한 프레임에 담아내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이해하려 들지 마. 느껴.”
인버전 기술이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오페라극장에서 바닥을 뚫은 총알이 다시 총구로 되돌아가는 순간이다. 해당 장면은 주도자가 인버전 기술에 관한 설명을 듣는 순간을 포함해 여러 차례 영화에 등장한다. 놀란 감독은 이것이 “20년 전부터 구상해온 이미지”임을 밝힌다. 20년 전 제작된 감독의 초기작 <메멘토>는 레나드(가이 피어스)가 총을 쏜 장면이 다시 리와인드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놀란 감독은 <메멘토>에서 짧은 시퀀스로 끝났던 아이디어를 <테넷>으로 가져와 확장하고 구체화시킨다.
카 체이싱 신은 시간의 순행과 역행의 맞물림이 잘 드러난 신 중 하나다. 주도자는 사토르의 알고리즘을 탈취하고 캣(엘리자베스 데비키)을 구하기 위한 작전을 펼치는 와중에, 전복되어 있던 차가 다시 복구된 채 전속력으로 후진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두개의 타임라인이 교차하는 순간,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롭고 독특한 액션 신이 탄생한다. 이러한 시간의 교차는 실상 실제 우리의 시선으론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놀란 감독은 영화 <테넷>의 목적을 “시간을 시각화하는 방법의 해방”이라고 말하며 아날로그 촬영에 대한 자신의 집념을 토대로, 현실 세계와 인버전 세계의 교차를 존재 가능한 것으로 구현한다. 촬영을 위해 앤드루 잭슨 시각특수효과 감독은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인 마야를 이용해 자동차 추격 신의 동선을 정확히 계산해 대입했고, 실제로 거꾸로 달리는 차량을 제작해 촬영에 임했다. 그 밖에도 존 데이비드 워싱턴을 비롯한 배우들은 거꾸로 움직이는 액션 신을 위해 “생각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액션을 몸에 익혔다”고 전한다. 투박함이 살아 있는 리얼한 액션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낯선 풍경을 목도하고, 그 안에 발을 디디는 주도자에게 깊이 몰입할 수 있게 한다.
<테넷>은 시간을 역행하는 인버전 세계의 리얼리티를 여실히 살려낸 결과물이다. 개인의 서사는 단순화하고 스파이로서의 역량을 높인 인물로 하여금 인버전 세계와 현실 세계를 빠르게 오가도록 하며 사건의 층위를 다양화한다. “이해하려 들지 마. 느껴”라는,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대사는 관객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정확히 가리킨다. <테넷>의 목적은 ‘열역학 제2법칙’과 ‘할아버지의 역설’ 등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물리학 이론을 완벽히 해설하기보다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세계를 제대로 구현해 관객 앞에 내놓는 데에 있다. “현실을 뛰어넘는 경험을 선사하는 게 영화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놀란 감독의 말은 이러한 <테넷>의 목적을 단단히 뒷받침한다.
사토르를 연기한 케네스 브래너는, <테넷: 메이킹 필름 북>에서 <테넷> 시나리오의 뻔뻔함에 매혹되어 몇번이고 다시 읽었다고 덧붙인다. 자신의 방향성을 명확히 하고, 그것을 뻔뻔하다 느껴질 정도로 올곧이 밀어붙이는 영화의 힘. 그 때문인지 어렵다는 반응 속에서도 <테넷>을 여러차례 재관람하며 영화를 완벽히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언젠가‘007 시리즈’를 연출해보고 싶다”며 007 시리즈의 오랜 팬임을 밝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스파이 장르에 시간에 관한 자신의 주제의식을 녹여 <테넷>이라는, 가장 본인다운 스파이영화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