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건의 시작이자 대단원인 스탈스크-12에서 레드팀과 블루팀이 협공 작전을 수행한다. <테넷>은 이 장대한 클라이맥스의 완성을 위해 길고 복잡한 설정을 이어간 영화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야심은 시간의 순방향대로 가는 레드팀과 시간의 역방향으로 공략 중인 블루팀의 액션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아내는 데 있다. 말 그대로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찍혀 있는 마법의 순간을 기어코 창조해낸, 의지의 결과물이다. 다만 스탈스크 작전 시퀀스의 액션과 동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관객이 그리 많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관람 1회차 관객에게 가능한 건 그저 눈앞에서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하는 압도의 감각 정도다. 놀란 자신도 그걸 모르진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도리어 상황 자체가 관객에게 이해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래서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그저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현재를 목격하라고 말이다.
관객을 인셉션하다
작전을 앞두고 팀 리더인 아이브스(에런 테일러존슨)는 대원들에게 협공 작전의 개요를 브리핑한다. 그런데 이 브리핑은 작전의 당위나 개요, 동선 등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인셉션>의 안내자 아리아드네(엘런 페이지)나 서로 강의해주기 바쁜 <인터스텔라>의 박사들은 여기에 없다. <테넷>은 시간의 역전에 대한 꽤 복잡한 개념을 끌고 들어오지만 이를 설정으로 던져둔 채 전혀 안내해주지 않는다. 도리어 아이브스는 “멍청한 질문 하고 싶은 놈 있나?”라고 다그치며 질문 따윈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 브리핑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어쨌든 인버전을 통해 시간 앞뒤로 협공 작전을 벌인다는 것, 알고리즘의 탈취라는 골인지점에 대한 재확인 정도다. 최종적으로 어디에 도달하면 된다는 ‘목표점’만 분명히 찍어주면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전을 수행 중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해도 상황을 납득하는 덴 별 지장이 없다. “이해하려 들지 마. 느껴”라는 건 <테넷>을 즐기는 방법에 대한 놀란의 당부인 셈이다.
<테넷>을 두고 즉각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리액션은 복잡하고 불친절하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인버전이란 시간 역행의 개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정황을 제시한 후 받아들이라며 넘어간다. 예컨대 처음 인셉션을 체험하는 관찰자이자 안내자 역할의 아리아드네를 통해 관객과의 속도를 맞췄던 <인셉션>과는 다르다. 둘째로 놀란의 전작들에 비해 컷이 상대적으로 빨라 보인다. 이는 다소 착시가 있는데 실제 커팅의 물리적 속도가 빠르다기보다 꽤 많은 설정 숏과 이동 과정, 이른바 브리지 숏들이 생략되어있기 때문에 감각적으로 급하게 몰아붙이는 느낌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정방향 숏과 역방향 숏들이 한 프레임 안에 어지럽게 섞이곤 하는데, 이때 동선의 방향과 충돌을 한번에 감지하기엔 물리적 정보량이 지나치게 많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놀란의 전작들에서 이미 반복된 지점이다. <인셉션>에서 상대의 의식 속에 뛰어든다는 개념은 여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고, <인터스텔라>에서 웜홀을 통한 이동이나 블랙홀 너머 4차원의 공간들은 그저 직관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덩케르크>에서 제시된 서로 다른 세 가지의 시간 축은 여전히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긴 쉽지않다. 그래서 관객은 다시 보기를 시도하고 그것이 놀란 영화의 크고 작은 구멍들을 메워주는 동력이 된다. 시간에 대한 놀란의 집착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테넷>은 이와 같은 개별 요소들이 동시에 작동하며 영화를 실시간으로 따라가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럼 <테넷>이 1회차 관람으로 즐기는 것이 불가능한 영화냐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엔트로피에 대한 이해, 시간 역전의 개념, 인물들의 동선, 편집의 충돌 따위를 일일이 따라가지 않아도 이 영화를 감각하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다. 비결은 간단하다. 아무리 복잡하고 방대한 설정이라도 결국은 정해진 점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놀란은 관객을 대상으로 ‘테넷’이란 상황을 인셉션한다. 인셉션의 핵심은 생각의 씨앗을 심어두고 나머지는 각자의 무의식이 알아서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테넷>은 두 가지 코드를 관객에게 끊임없이 주입한다. 첫째, ‘이해하려 들지 마. 느껴’. 이것은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가 아니라 압도하는 감각으로 찍어누르는 영화다. 둘째,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 <테넷>의 전반적인 플롯은 시간의 역전, 그러니까 인과관계를 뒤집는 방향성에 있다. 영화는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에게 2주동안 일어난 일을 순차적으로 플롯을 짠 뒤, 그를 인버전시키며 다시 시간, 공간을 되짚어 올라간다. 이 두개의 방향만 잊지 않으면 영화를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다. <테넷>은 과정을 이해시키는 대신 결과(일어난 일)를 보여주는 걸로 관객을 이끈다. 놀란의 영화는 언제나 점으로 구성되어왔다. 중요 포인트에 해당하는 사건들만 인지가 되면 과정 전반은 이해되지 않아도 크게 관계없다. 도리어 놀란은 과정이 이해되기보다 물리적인 압도감으로 존재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놀란은 최종적으로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는 서사를 즐겨왔다. 가령 <인셉션>은 인셉션의 의식 저 아래에 있는 3단계의 심층에서 시작해서 다시 심층 영역이란 점에 도달하는 여정을 그린다. <인터스텔라>는 결국 블랙홀 너머 4차원의 시공간으로 수렴하는 이야기다. <덩케르크>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하루, 하늘에서의 한 시간을 ‘상영시간’이라는 하나의 시간 축 아래 쌓아올리는 구성이다. <테넷> 역시 스탈스크-12에서의 대규모 작전이라는 점으로 수렴된다. 이렇듯 서로 다른 시간 축을 하나로 꿰기 위한 간단한 비결이 하나 있다. 확실하게 설명되는 점 몇개를 더 찍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리포트에서 닐(로버트 패틴슨)과의 대화, 탈린에서의 프리야(딤플 카파디아)와의 대화 등 필요한 결과들. 그러니까 일어난 일을 몇 가지 짚어준다. 비록 진행 과정이나 편집의 메커니즘이 전부 이해되지는 않더라도 <테넷>이 받아들여지는 건 이렇게 ‘결과라는 상황’들을 보고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과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선들은 과정의 미로에 빠지지 않을 장치가 되어준다. 비유하자면 이 점들은 <인셉션>에서의 토템과도 같다. <테넷>을 빗대면 알고리즘이라고 해도 좋겠다.
놀란은 왜 스펙터클과 아날로그에 집착하는가
그렇다면 영화의 주인공은 그 점들인가. 당연히 아니다. 점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펼쳐지는 꿈(영화)의 내용이다. 현실과 구분하기 힘들 만큼 사실적이지만 현실에서는 구현하기 힘든 것들이 물리적으로 재현되는 시공간. 놀란은 그 현재적인 시공간을 창조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인셉션>의 꿈의 공간이 그랬고, <인터스텔라>의 우주가 그러했으며, <덩케르크>의 전장이 그랬다. 놀란은 각기 다른 시간들을 통합하여 스크린이라는 평면 위에 투사한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시간이라는 물리적인 정보가 영화라는 언어를 통해 변환, 출력된 결과물인 셈이다. 다소 과격하게 말하자면 놀란의 스토리는 늘 얄팍하고 단순했다. 수준의 문제를 논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편편하게 가다듬는다. 아니, 이건 원인과 결과가 역전된 설명이다. 놀란은 이야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매료되어 이야기 자체를 단순하게 가져간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 한계, 2시간 남짓한 상영시간 동안 담아낼 수 있는 정보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뼈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축소해온 것이다.
대신 놀란은 말하는 방식, 그러니까 ‘텔링’(telling)을 통해 다채로운 결과물을 만들어왔다. <메멘토>(2000)에서는 플롯의 순서를 거꾸로 가져갔고,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에 적응한 <다크 나이트>(2008)에서는 아이맥스를 통해 압도적인 시각정보를 채워넣었으며, 본격적으로 규모의 영화와 시간에 대한 탐구를 병행하기 시작한 영화들(<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에선 서로 다른 시간의 길이를 겹쳐보기도 했다. 놀란의 이러한 유희는 때론 스펙터클에 대한 경탄으로, 때론 지적인 유희로 마케팅되며 그를 상업과 예술의 경계선에 선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인셉션>을 기점으로 놀란의 내러티브는 변곡점을 맞이한다.
시간을 물리적으로 변환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메멘토>부터 <프레스티지>(2006)까지가 플롯의 트릭을 통해 반전을 꾀하는 전통적인 문법에 가까웠다면 대형 프랜차이즈인 <배트맨> 시리즈를 겪으며 각기 다른 시도를 꾀한다. <배트맨 비긴즈>(2005)는 놀란의 전통 서사, 다소 식상하기까지 한 기억과 아버지-아들 서사의 연장선에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야기로서 놀란이 즐겨왔던 테마의 정석은 <배트맨 비긴즈>다. <다크 나이트> 이후 놀란은 자본에 의한 물리적 스펙터클의 효용을 깨달은 듯하다. 아이맥스 카메라를 통한 시각의 확장, CG를 쓰지 않는 아날로그 방식이 주는 실감에의 집착도 이 시기부터 싹을 틔웠으며 그 정점에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가 있다.
영화가 단지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 이상의 체험이라면 이야기라는 결과물 대신 놀란 영화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건 첫째로 시각적 스펙터클, 둘째로 아날로그 방식의 세트, 마지막으로 여러 번의 관람을 요구하는 지적인 유희다. 자본의 선택을 받는 그는 거대한 규모로 압도하는 무언가를 채워넣는다. 그리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톰 크루즈가 액션 촬영을 꼭 직접 수행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실제로 CG나 대역을 통해 얻어지는 화면보다 우위에 선 무언가가 있는 것이라기보다 그저 다른 종류의 결과물이 있을 뿐이다. 다만 그것이 아무나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물리적 조건을 수반한 것이기에 신기한 구경거리 혹은 마케팅의 한 요소로 소비될 따름이다. <테넷>에서 실제 비행기를 건물에 들이받았을 때 그 영상은 좀더 진짜에 가까운가. 그 영상의 희귀성 때문에 특별할 순 있을지언정 그것 자체가 실감의 근거가 되진 못한다. 하지만 나는 바로 이‘신기한 구경거리’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한다. 초기영화가 성취했던 마술의 또 다른 이름, 바로 시간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발견이다.
수많은 현재(들)를 창조하는, 시네마의 악마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짐작하자면, 놀란에게 있어 영화란 편집이다. 좀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놀란에게 영화는 시간을 구현하는 도구다. 그리고 시간을 묘사하는 여러 방식 중에 놀란은 편집을 택했다. <배트맨> 이전의 놀란은 플롯을 통한 시간의 구조화에 집착했다. 이것은 이야기의 결과물로서의 시간, 다시 말해 내러티브다. 영화 이외에도 내러티브를 통해 시간을 ‘말하는’ 방식은 많다. 하지만 영화는 시간이 흐른다는 걸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매체로 출발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포획’으로 표현하며 시간을 박제, 부활시키려는 미라 콤플렉스로 해석하기도 한다. 필름이 빛의 판화를 찍어내는 순간 시간은 두개의 축으로 분화되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는 거기에 있었고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로서의 시간, 또 다른 하나는 필름에 찍혀 실시간으로 재현되는 현재로서의 시간이다.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어떤 순간에도 현재적인 시간 위에서 있는 것이다.
필름 위의 시간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다. 그것을 과거의 기록과 복원으로 보는 사람들에 의해 다큐멘터리가 탄생했다. 한편 시간의 포착으로 보고자 하는 이들은 제작 과정에서부터 있는 그대로의 순간들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담아내려는 욕망에 빠진다. 롱테이크 등의 형식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편집은 어떤가. 편집은 시공간을 잘라내어 다시 붙이는 행위다. 오랜 시간 그것은 내러티브에 종속된 스토리텔링의 방식 중 하나로 여겨져왔다. 본래의 성질을 유지하지 않고 자르고 붙여 새로운 맥락으로 만드는 작업은 일종의 환영(혹은 거짓말)을 자아낸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편집이 내러티브 영화의 주요 형식으로 종속되면서 관객의 뇌리에서 지워진 사실이 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현실이자 현재적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화면은 단순히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도구가 아니라 거기에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시간이다. 놀란의 영화는 기본적으로여기에 집중하고, 현재적 시간의 가능성을 복원시킨다. 놀란의 전반부가 플롯을 통한 이야기 차원의 복원이었다면 <인셉션> 이후의 그의 영화들은 물리적인 복원에 집중한다. <테넷>은 그 상상력과 영화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로 다시 짜낸 결과물이다.
필름이란 기본적으로 3차원을 2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작업이다. 여기엔 필연적으로 선형적인 정리가 뒤따른다. 그 무엇도 시간이 흘러간다는 명제를 뒤집을 순 없다. 그런데 영화는 이걸 역전시킬 수 있다. 뤼미에르 형제가 필름을 거꾸로 돌려 무너진 벽을 다시 일으켜 세웠을 때 그것은 시각적인 환영이자 마술인 동시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현재적 사건으로 거듭난다. <배트맨 비긴즈> 이후 자본의 선택을 받은 놀란은 시간을 물리적으로 디자인하는 데 좀더 집중한다. <인셉션>에서는 밀도에 따른 시간의 층위를 나눈 뒤 꿈을 매개로 이를 기하학적으로 디자인했다. <인터스텔라>에선 아예 4차원의 방을 만들어 과거의 자신과 인물들을 필름이라는 한 공간 안에 포획한다. 그리고 <덩케르크>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사건들을 선형적으로 보여주되 단지 이미지의 유사성과 동작의 일치, 편집의 방향만을 가지고 시간을 꿰어내는 알고리즘을 선보인다. <덩케르크>는 일주일, 하루, 한 시간을 설명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106분 동안 연쇄되는 장면들의 율동이다. 그 리듬은 스크린 위에 영화적인 시간, 즉 화면과 마주하고 있는 관객의 현재를 창조해낸다. 놀란의 영화의 부피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는 실존에서 ‘내가 여기서 목격한다’는 현재적인 실감으로 초점을 옮겨왔다고 해도 좋겠다.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 ‘맥스웰의 도깨비(또는 악마)’에서 착안한 <테넷>의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순방향으로 가는 존재가 있고, 엔트로피를 조작해 역방향으로 가는 존재가 있다. 놀란은 그걸 스토리로 설명하는 대신에 물리적으로 한 화면 안에 포착하는 프로젝트를 시행한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을 프리포트에서 인버전된 주인공이 동시에 세명 존재하는 장면을 통해 목격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이 욕망의 메커니즘 자체는 한 화면에 과거의 유령들을 이중 인화하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과 닮았다. 2차원의 평면 하나에 겹쳐두면 복잡하지만 면을 여러 개로 나누면 아주 단순명료한 접근. 요컨대 이것은 관객과 영화 사이 각각의 현재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시도다. 물론 놀란의 영화는 위라세타쿤의 그것보다 훨씬 투박하고 대신 어마어마하게 거대하다. 그런 의미에서 스탈스크-12에서의 작전은 실은 작전이라기보다 차라리 행위예술, 멈춰보고 돌려보며 여러 번 시도해야 파악 가능한 설치예술에 가깝다. 우리는 정방향과 역방향의 존재들의 액션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거기에 시간이 겹쳐 있고, 현재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목격할 따름이다. 무언가 굉장한,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압도감. 놀란이 되살리고 싶은 건 어쩌면 이야기의 도구나 환영으로서가 아닌 초기영화가 품고있던 물리적인 실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걸어가는 주인공을 쇠창살 너머에서 찍는 카메라를 보며, 1초에 24번 돌아가는 프레임의 흔적을 발견한다. 관객의 발견을 기다리는 각자의 현재(와 기억)가 스크린 표면 위에 잠들어 있다. 성패 여부를 떠나, 이런 규모와 자본의 관심 한가운데에서 (어쩌면 관객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본인의 유희를 끝까지 밀어붙인 야심(혹은 허영심)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