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보는 것은 조숙한 청소년의 놀이에 동참하는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작업을 깎아내리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직관적인 차원에서 이 비유는 놀란의 영화가 지니는 동력을 지목하고 있다. 많은 관객이 놀란의 영화에 열광적으로 매혹되는 주요한 이유는 그의 영화가 소년적인 진지함과 쾌락을 겸비한 놀이의 특성들을 성공적으로 구조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놀란이 제공하는 매혹은 영화를 만드는 기본적인 요소와 절차에 앞서 일상의 규범을 넘어서는 거대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집요하게 세부를 분류한 뒤 물리적 규칙을 뒤집어버리는 현상(마술, 꿈, 역전된 기억과 시간)에 대한 열망을 진지하게 꾸며내는 데 있다. 이 과정에 잠입이나 속임수와 같은 범죄적 일탈의 감각이 수반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세계에서 통용되는 테크놀로지의 논리와 소품들은 언제든 관객과 즐거운 게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다. 다소 냉소적으로 바꿔 말하면 놀란의 영화는 언제나 놀이에 필요한 장난감들의 원리에 속박되어 있다.
<프레스티지>의 마술 기계와 <인셉션>의 토템, <테넷>의 ‘인버전’ 장치인 회전문에 이르기까지. 다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감독들이 쉽게 그려내지 않는 조숙한 남자아이다운 상상력과 형식적 디테일이야말로 동시대 영화감독으로서 놀란이 가지는 가장 특별한 면모일 것이다. 꿈속의 꿈의 연속으로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인셉션>의 원안을 16살에 구상했다는 일화는 놀란의 될성부른 천재성(!)을 보여주는 예시라기보다는 그 나이대의 청소년이 쉽게 탐닉할 법한 ‘심오한’ 이야기와 철학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확장해왔다는 사례로 읽힌다.
유년과 성인의 과도기적 경계를 통과하는 영화, 그것은 한편으로는 박쥐 가면을 쓴 히어로의 일대기를 뉴욕이라는 현실 도시의 질감 위에 얹어 묘사할 만큼 무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이자 엘리트인 영웅주의자의 고뇌와 딜레마를 한없이 무겁게 그려낼 만큼 진지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크리스천 베일)과 조커(히스 레저)는 단순히 한편의 영화 내부에서 서로를 완전케 하는 거울에 비친 영화적 분신일 뿐만 아니라 놀란의 영화 전반에 공존하는 두개의 다른 얼굴이라 말할 수 있다. 그의 영화에는 눈속임과 트릭을 일삼는 마술사,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패러독스를 자신이 구축한 공간 내부에 심어두는 설계자의 자리와 더불어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스스로의 정당한 자리를 끊임없이 자문(自問)하는 단독자가 있다. 놀란은 전자에 매혹되면서도 후자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크 나이트>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수인의 딜레마’에 관한 시퀀스. 서로 다른 배에 올라탄 시민들과 범죄자들이 상대편 배를 폭발시키는 버튼을 누르지 않음으로써 조커의 기획을 무위로 돌리는 이 순간은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주어진 이중의 딜레마를 돌연 폭로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커의 놀이는 끝나야 한다. 하지만 배트맨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를 처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시퀀스는 그런 두 가지 조건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이 ‘심각한 놀이’를 지속하기 위해 고안된 가상의 무대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분열된 주체와 분절된 세계의 조응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관통하는 원형적인 형상을 하나 떠올려보면 그건 조각난 거울 앞에 선 한 남자의 초상일 것이다. 이 남자는 의심에 찬 눈으로 거울에 비친 상을 바라보며, 생경한 표정으로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두리번거린다. 그는 결론이 내려진 자리에서 출발하지만 깨달음은 끝까지 유예되거나 끝내 획득되지 않는다. 놀란이 시간의 장력을 구부러트려 인물의 정체성과 현실의 위계에 혼란을 가하는 다중적인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대표적인 연출자로 거론되는 것은 익숙한 언술이다. 토마스 엘제서는 “결정적인 정보가 유예되거나 모호하게 제시”됨으로 써 극중 인물과 관객이 영화가 창안한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서사적 전략의 사례들을 ‘마인드-게임’이라는 명칭으로 분류하는데, <메멘토>는 그 대표적인 예시로 거론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놀란에게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러한 서사적 전략이 궁극적으로 그의 영화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남성 단독자의 정신적 위기(<메멘토>의 단기기억상실증, <다크 나이트>와 <인셉션>의 트라우마, <인썸니아>와 <프레스티지>의 죄의식과 편집증…. <인터스텔라>에 이르면 주인공은 심지어 블랙홀 내부에서 끝내 ‘유령’의 손짓으로 되돌아온다)와 매개된다는 점이다. 놀란의 영화에서 특유의 비선형적이고 역행적인 시간성과 그로인해 펼쳐지는 왜곡된 공간의 질서는 한 인간의 심층적인 혼란과 피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세계에 입회하는 주체는 결코 통합적인 상태에 내맡겨지지 않다. 사적 관념이 분열된 주체의 지각이 분절된 세계의 이미지와 조응한다는 것, 놀란이 구축한 놀이적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는 명제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테다.
이러한 분열적 주체의 초상은 낯설지 않다. 놀란이 참조하는 주요한 레퍼런스 가운데 하나는 오슨 웰스의 주인공들일 것이다. 여럿으로 쪼개진 거울 속에 비치는 바로크적인 분신의 형상. 기억을 되짚어 최종적인 진실과 대면하려는 열망에의 여정. 되돌아보면 <인셉션>은 의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로즈 버드’의 자리를 은폐하고, 위치를 바꾸고,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는 무의식적 변형과 복권의 이야기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변용의 영화를 만든 적은 있어도, 진정 다층적인 영화를 만든 적은 없다. 이 말이 조금 지나치게 들린다면, 그의 영화는 매번 고전적인 결론으로 수렴된다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놀란의 영화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몇번이고 <메멘토>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이와 유사하다. 단기적으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증세에 붙들린 한 남자(가이 피어스)는 달리는 차 안에서 끝내 목적지와 목표를 전부 잊어버리고 만다. 혹은 모든 걸 잊어버려야만 한다. 그러므로 <메멘토> 이후로 놀란이 만들어온 영화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 그 비워둔 목적지를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 목표를 망각한 자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놀란이 추구하는 다중 내러티브는 서로 다른 이해와 결론의 자리를 마련하는 서사적 가능세계의 확장을 목표로 삼는다기보다는 서사 내부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주체의 뒤늦은 깨달음으로 수렴된다. 그의 영화에서 대다수 인물이 몰개성적이며 도구적으로 다뤄진다고 비판하는 견해가 놓치는 부분은 놀란의 인물들이 이미 주어진 것들을 되짚어가는 과정에 투신한다는 사실이다. 놀란은 인물을 입체적으로 구현해낼 생각이 없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관찰된다기보다는 배치되는 이들이며, 단일한 기능으로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이를 그 자체로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사의 여정은 주인공이 그 자신을 대면하기까지의 시간일 뿐이다. 놀란은 마치 영화 자체를 하나의 도구처럼 다룬다.
인물의 정념을 영화적 구성의 근원이자 목적지로 두는 계열은 놀란의 최근작으로 올수록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런 도구들을 집합을 통해 정념적 초상화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인터스텔라>와 <덩케르크>의 엔딩에서 화면에 각인되는 이미지는 정념을 드러내는 한 인간의 초상이다. 놀란의 기획은 그들 얼굴에 드리운 파토스적인 표정으로부터 개인적이거나 자아도취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타인과 긴밀히 연결되는 집단적인 정서를 추출하는 것에 가깝다. 이 기획이 가장 성공적으로 묘사된 순간은 개별적인 인물들의 드라마를 극도로 억제한 <덩케르크>의 마지막일 것이다. 적군에 붙잡힌 파리어(톰 하디)는 그 누구도 아닌 카메라쪽의 허공을 강렬하게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라 영화가 지나온 전쟁의 흔적들, 혹은 전쟁 중에 시력을 잃은 조지(배리 케오간)의 눈과 서로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공명한다. 강력한 전염성과 호소력의 얼굴. 정념, 정동(情動)을 간직한 표면이 스크린에 붙잡히는 것이다.
<인터스텔라>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기획이 구축한 하나의 분기점이다. 바닥 없는 블랙홀의 표면 아래로 추락하던 쿠퍼(매튜 매커너헤이)는 그곳이 무한한 평면 위에 과거와 미래가 중첩된 다른 차원의 공간임을 깨닫는다. 끝없는 추락 끝에 도달한 목적지는 출발점과 같은 곳이었다. 서재 너머에서 주어진 그들의 부름은 나의 손짓이었다. 쿠퍼는 중얼거린다. “내가 날 여기 데려온 거야.” 이 바로크적인 무대에서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은 마침내 되찾은 남성 주체의 자리/지위다. <인터스텔라>의 결론은 놀란이 지속한 트라우마적 여정의 피날레에 걸맞다. 하지만 드라마의 구체성을 와해시킨 뒤 평행편집의 비약적인 표현력으로 서로 다른 시공간에 위치한 자들에게까지 강력한 전염의 몽타주를 일으키던 <덩케르크>와 다르게, <인터스텔라>에서 그려지는 한 남자의 재귀적 여정은 수축적인 열망으로 가득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수십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마주친 재회와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이 영화의 마지막은 <인셉션>의 결말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위계와 질감으로 구성된 세계 바깥에서 ‘진정한 세계’에 가닿으려는 손쉬운 욕망으로 수렴되고 만다. 놀란이 마련한 게임의 긴장은 이제 유지되지 않는 걸까.
방치된 영화의 도구들
앞선 말이 길었다. <테넷>은 어떤 영화인가. 먼저 몇 가지 차원에서 영화의 생김새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쉽지 않은 물리학적 개념과 상상력을 블록버스터 규모의 작업으로 구상해낸 건축적 영화. SF의 디자인과 첩보물의 구조를 조합해낸 장르적 변용의 영화. 시퀀스마다 이야기의 목표를 조정하는 탐사적 내러티브의 영화. 운명과 자유의지를 가로지르는 남성의 실존적 여정을 따르는 영화. 물리 법칙의 역전을 전제한 뒤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의 시각적 움직임을 동시에 포착하려는 영상의 열망을 보여주는 영화…. 영화의 이런 모든 내적 요소들은 분명 크리스토퍼 놀란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비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테넷>만큼 그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맞물리고 구체적인 리듬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 사례는 드물 것이다. 놀란 영화의 동력을 구성하던 익숙한 도구들로 가득하지만 <테넷>은 최근의 놀란이 만든 결과물 가운데 가장 지루하고 뻣뻣하다.
<테넷>의 장르적 상상력이 새롭지 않다거나 난해한 과학적 개념을 설득력 있는 서사적 흐름에 녹여내지 못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물론 그런 식의 비판도 가능하다. 역행하는 시간과 타임 패러독스를 소재로 삼은 SF영화 가운데 <테넷>보다 훨씬 집요하게 내러티브의 개념을 작동시키고, 놀라운 이미지의 중첩을 보여주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열거할 수 있다. 특별히 셰인 카루스의 <프리머>와 토니 스콧의 <데자뷰>가 떠오른다). 그보다는 영화의 도구들이 거의 방기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싶다. 영화에서 특별한 대상은 그 자체만으로 순수하게 특별한 것으로 관측되지 않는다. 대상은 그것이 소개되고 다뤄지고 작동하는 방법, 또는 그것의 효과를 보여주는 방식과 분리해서 논의할 수 없다.
내게 <테넷>에서 주요하게 펼쳐지는 대부분의 개념과 드라마는 동사가 억제된 명사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시작과 동시에 수많은 계획과 임무가 끊임없이 제시되는데 그것들이 어떤 논리와 움직임으로 엮이면서 영화의 리듬을 형성하는지의 문제는 방치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숏의 밀도는 현저히 떨어지고, 헐거운 편집으로 인해 동선은 어그러지며, 개별 장면의 연결은 인물들이 내뱉는 파편적인 정보를 통해 간신히 이어지고만다. 영화가 제기하는 주요한 문제와 개념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 지각적으로 충분히 감지되고 유기적인 효과를 발휘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영화의 답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조롭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는 것이고, 우리는 결국 우리의 현실과 대면할 것이라는. 이러한 결론 자체는 전작에서 익히 보아온 것으로 특별한 측면은 없다. 다만 그간 놀란의 영화가 예측 불가능한 과정의 힘으로 결론에 도착하는 여정을 그렸다면, <테넷>에서는 이미 주어진 결론의 힘이 과정을 압도한다.
영화의 중반부에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현재와 ‘인버전’된 미래가 서로를 마주보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스크린 장치에 유비되는 유리창 반대편에서 미래의 인물들은 거꾸로 돌린 말과 이미지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이러한 구도는 스크린 이미지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비디오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창을 경계로 나뉜 두개의 시간축.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재생되는 이미지들. 마치 영화 전체의 알레고리처럼 각인되는 장소. 감독 자신이 밝혔듯이 <메멘토>에서 시도된 바 있는 리와인드 이미지에서 착안한 <테넷>의 아이디어는 디지털영화의 스크린 이미지에 대한 물질적 성찰을 유도하는가? 확신하기 어렵다. 그렇다기보다 이곳은 선행과 역행의 동시적 발생이라는 아이디어를 무엇보다 유혹적인 매개체인 스크린을 통해 손쉽게 과시하기 위한 구성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스크린 장치는 대면의 치명성도, 보기의 쾌감도 부재하는 공허한 전시에 머물게 된다.
복잡한 개념들을 제거하고 보면 역설적으로 <테넷>의 플롯은 지금껏 봐왔던 놀란의 영화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태로 다가온다. 이는 미래로 향하는 절차를 이행하는 기계적인 방법론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이름조차 부여되지 않은 익명의 주도자(protagonist)는 이 절차를 따라 주어진 미래로 향하는 점진적인 단계에 몸을 싣는다. 놀란의 영화는 이러한 기계적인 단계 속에서조차 기묘한 시간의 중첩과 비약으로 파토스로 둘러싸인 얼굴과 몸짓을 이끌어내는 것이었지만, 반복건대 <테넷>에서 그러한 효과는 발현되지 않는다. 장엄한 구조물과 정념의 얼굴이 사라진 곳에 요령부득의 원리를 설명하는 나르시시즘적 이야기꾼만이 남아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작가인가? 오늘날의 영화를 둘러싼 환경에서 이는 성립될 수 없는 질문이다. 원래의 의미에서 ‘작가’는 정당한 평가를 얻지 못하는 이들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한 비평적 정책의 차원에서 제기된 개념이었고, 단순히 몇 가지 유사한 라이트모티브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연출자들을 모두 일컫는 말은 아니었다(그러므로 ‘작가주의’라는 표현은 오도된 어법이다). 질문을 바꾸자면 이런 식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고유한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변주하면서 여전히 유효한 영화적 성찰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연출자인가? <덩케르크>가 과감한 형식적 전환으로 고착된 스타일에 제기된 의문을 타파하는 사례였다면, <테넷>은 거창하지만 진부한 요설을 늘어놓은 결과물이다. 이 지루한 신작에서 얻을 수 있는 매혹과 교훈은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