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이혼 그 후. 갈등의 불길은 진화되었으나 각자의 상처를 돌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침묵만이 내려앉은 와해의 풍경 속에서, 영화과 졸업을 앞둔 23살의 젊은 감독은 자신이 통과해야 할 첫 번째 창작의 관문을 직감했다.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여성영화제) 아시아단편경쟁 부문에서 최우수상, 관객상을 수상한 백지은 감독의 <결혼은 끝났다>는 감독의 부모와 오빠, 그리고 두 이모와의 대화를 경유해 파경의 진실을 들추어내는 다큐멘터리다. 연애 기간까지 포함해 부부가 함께한 시간은 26년. 두 사람의 사이는 암 수술을 마친 백 감독의 할아버지가 장남의 집에 머물렀던 단 3개월 만에 급속도로 무너져내렸다. 가장이 외출한 사이,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갈등(“아침에 밥만 차려주는 데 뭐가 그리 힘드냐”, “할아버지가 발가벗고서 나한테 자기를 씻겨달라고 하셨어”)은 점점 극으로 치달았다. 백 감독의 어머니가 더이상의 노동을 거부한 바로 그날. 할아버지는 원인을 며느리로 지목한 채 자살했고, 락스 두잔을 들이켰다가 살아난 어머니는 마침내 이혼을 선언했다.
<결혼은 끝났다> 감독 백지은 / 상영시간 36분 / 제작연도 2020년
“이혼 후 엄마가 하루는 아빠에게 분노했다가 또 하루는 과거의 행복한 한때를 추억하더라. 그렇게 험한 일을 겪고도 어떻게 다시 결혼 생활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복잡한 마음이 일었다.” 부모가 남긴 결혼의 소용돌이를 복기하기로 결심한 감독은, 촬영에 앞서 한달가량 가족 구성원들을 한 사람씩 만나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눴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 것처럼, 이 다큐멘터리가 가족의 트라우마를 심화시키지 않길 바랐다. 다행히 외면하고 있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각자가 감정적으로 회복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가족을 판결대 위에 세우지 않으려는 노력은 “딸의 서사, 카메라의 주관을 배제한 채 저마다의 입장을 여과 없이 배열하는” 추적의 구조로 이어진다. <결혼은 끝났다>는 가부장제 가족주의의 구조적 불평등, 특히 돌봄 노동에 대한 선명한 윤곽선을 그려내 보인다. 백 감독의 외할머니가 거친 오랜 암 투병에 대한 아버지의 무관심,“시댁에 매진하는 엄마 대신 외가의 돌봄 노동을 짊어져야 했던 큰이모의 서사”가 등장할 때는 서늘한 긴장이 감돈다. 특히 “할아버지를 수발하는 과정에서 엄마가 여성으로서 느끼는 성적 불편감”을 짚어내는 장면은 이성간 돌봄 노동에 대한 세심한 접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백지은 감독은 <결혼은 끝났다>를 통해 “누군가의 일방적인 노동 혹은 희생으로 지속되고 있는 경우라면 결혼은 조금도 의미가 없는 무엇”이며 “이 경우 가부장제가 주는 묘한 안정감은 착각”이라고 말한다. 때로는 담담한 사적 고백이 그 어떤 직접적인 구호보다도 강력한 정치적 선언이 된다.
인터뷰 말미에서 홍재희, 강유가람, 이길보라, 마민지 감독 등의 작품을 언급하며 여성 감독의 다큐멘터리에서 영화 만들기의 단초를 얻었다는 백지은 감독은, 올해 여성영화제 우수상 수상작인 전규리 감독의 <다신, 태어나, 다시>(선택적 여아 낙태 생존자인 감독 자신의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다.-편집자)에도 응원의 목소리를 보탰다. 백지은 감독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여성 영화인과의 커뮤니티다. “여성 창작자와의 연대와 교류가 지금의 내게는 절실하다. 그로부터 힘을 얻어 앞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지속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