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은 이제 우리 시대의 대통령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다. 일탈과 반항의 아이콘, 멜로드라마의 주역, 누아르 속 정념의 존재들을 거쳐 그는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강철비2>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남북미 정상의 협상 타결에 사명을 다하는 대통령 한경재는, 배우 정우성에 대한 호감과 신뢰에 뿌리내리고 있다. 연륜에 걸맞은 카리스마가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닐 터, 첫 장편영화 연출작인 <보호자>의 후반작업에 한창인 정우성을 만나 그 비결을 묻고 싶었다. 대통령이라는 직업에의 탐구, 인물의 외로움에 접근하는 태도,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첨예한 국제 정세를 풀이하는 소신과 성실함까지. 구름이 낮게 깔린 장마철의 하늘 아래서 생각을 꼭꼭 눌러담아낸 정우성의 말들은 쉽사리 증발되지 않을 듯하다.
-<강철비>에서 비밀 지령을 받은 북한군이었다가 <강철비2>에선 한국의 대통령이 됐다. 양우석 감독은 일전에 <씨네21>에 <강철비2>를 “상호보완적 속편”이라고 소개하면서 “<강철비>를 보고 <강철비2>를 보면 정우성이 정말 훌륭한 배우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상호보완적 속편이라니, 양우석 감독님다운 표현이다. (웃음) 냉전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얽혀서 살 수밖에 없는 불운의 민족이잖나. 이 불운 자체는 남과 북의 체제가 바뀌어도 결국은 똑같았을 거라 생각하며 내게 주어진 인물의 입장에 충실했다.
-동시대 한반도 정세와 긴밀히 연관된 영화라 배우 입장에선 재미가 있는 만큼 부담도 될 법한 프로젝트다. 어떤 마음으로 속편까지 수락했나.
=<강철비>는 두 철우(배우 곽도원과 정우성이 연기한 남과 북의 캐릭터 이름이 모두 철우다.-편집자)를 통해서 만들어낸 판타지가 좋았다. 이를테면 우리는 다른 체제에서 살지만 어떻게 보면 같은 이름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형제일 수도 있다는 것,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면 모두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강철비2>는 영화 촬영 시기에 실제로 정상회담이 몇 차례 있었기 때문에 현실과 호흡하는 느낌이 더 컸는데, 감독이 더한 적극적인 풍자들이 오히려 무거움을 덜고 영화적인 이해를 도왔다. 나 정우성이라는 배우도 어느 순간 난민 이슈로 인해 일각에서는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있지 않나. 그래서 이 작품에 과연 나라는 배우가 맞는 건지, 정치적 이유와 시각을 걷어내고 누구나 온전히 이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배우가 맞는 건지 고민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남북미 정상이 모였을 때 한국 대통령은 계속해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 역학적으로 가운데 낀 사람이기도 하고, 캐릭터적으로도 평화협상을 위해 신중히 고뇌하는 이미지가 부각됐다.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중재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의 아이러니를 연기했다. 어떻게 보면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듯하지만 실은 그 안에서 계속해서 주도하는 입장이고, 그로 인해 겪는 혼자만의 답답함과 외로움이 있다. 바람직한 결정에 대한 막연한 희망, 자기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야 하는 무게감 같은 것에 초점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이번 영화는 액션만큼 리액션을 연기하는 구간이 돋보인다.
=그게 대한민국 지도자의 입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캐릭터를 만들다보니 그렇게 됐다. 아마 양우석 감독님도 캐스팅을 제안할 때, 내게 다양한 리액션의 얼굴이 있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싶다.
-귀여운 코미디 포인트들이 있더라. 인상적이었던 건 우리가 원래 잘 아는 배우 정우성은 훨씬 능청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코미디를 일부러 약간 더 썰렁하고 어설프게 처리했다는 거다. 대통령의 유머랄까.
=역할과 책임감이 무거운 캐릭터에게 코미디는 숨통을 틔워주는 장치다. 달리 말하면 어디까지나 장치일 뿐 과해선 안된다. 코미디가 너무 튀어나가면 캐릭터의 본연을 해치게 되니까. 적정선에서 캐릭터답게 표현하려고 했는데 그게 가닿았다니 다행이다. (웃음)
-당황해하거나 골치아파하는 모습, 테러 위협 속에서 진심으로 두려움에 떠는 모습처럼 대통령 한경재는 무척 인간적으로 풀이됐다.
=완장을 찬 권력자들이 제왕처럼 행동할 때 시민에게 얼마나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목격했다. 사람 사는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지도자는 더 사람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간다움을 표현하려 했다. 살다보면 상대를 규정할 때 나도 모르게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불변의 법칙 위에서 사고했고, 감독님도 내 해석에 동의해주셨다.
-정우성은 남자들의 우정, 버디무비에도 특화된 배우다. 이번 영화에선 북미 정상뿐 아니라 북한 잠수함 부함장인 신정근 배우와의 케미가 특히 좋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신정근 배우가 정말 딱이다, 싶더라. 그가 원체 겸손해서 ‘이거 내가 해도 되는 역할이야?’ 묻기에 ‘이미 감독님에게 강추했거든요!’라고 답했다. (웃음) 사적인 자리에서 신정근 배우와 종종 함께했는데, 동숭동에서 연극할 때부터 생긴 리더로서의 자질이 절로 느껴졌다. 사정이 어려운 동생들,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마음이 돋보이는 분이다.
-<증인>의 변호사, 그리고 이번 <강철비2>의 대통령처럼 중년의 정우성이 연기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 반대편에 <더 킹> <아수라> 등이 있다. 극단의 스펙트럼이 있다고 했을때, 도덕이나 대의를 고민하는 전자의 인물에게서 배우 자신은 어떤 영향을 받나.
=성향에 맞든 안 맞든 연기하다보면 분명히 감정적 동화가 있다. 표현적인 멋과 재미를 위해 배우가 악역을 택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지만, 때로는 좀 밋밋하거나 지루해 보여도 혹은 배우로서 뭘 표현해야 할지 조금 막막해도 선을 추구하는 인물을 연기해보면 좋겠다. 나에게도 분명 좋은 영향이 있었다. 물론 그런 의미를 바깥에서 너무 크게 평가하면 그것대로 또 하나의 부담이 될 수는 있겠지.
-아까 난민 이슈를 언급한 것처럼 배우 정우성을 향한 기대 혹은 정의에 민감해질 법도 한데 <강철비2>는 오히려 더 힘을 빼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접근했다.
=직업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성향 자체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너무 힘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 가치관과 경력이 맞아들어가면서 캐릭터 구현에 반영이 되는 것 같다.
-장편영화 <보호자>에서 감독과 주연을, 넷플릭스의 SF 오리지널 시리즈인 <고요의 바다>에서 제작자로 나선다. 감독과 제작자로서의 정우성은 어떤 점에 재미를 느끼나.
=일단 걸어가보고 있다. 내가 어떤 감독이고 어떤 영화를 찍으려는지 미리 규정하고 다가가도 달라지는 게 영화 만들기 같다. 연기할 때도 사전 준비할 때도 일절 레퍼런스를 참고하지 않았다. 제작자로서는 여러 변수에 대비하는 준비성을 갖추려 노력한다. 아, 그리고 요즘 편집실에서 작업하면서 아무래도 관찰에는 약간 재능이 있다고 느낀다. 배우가 갖고 있는 무언가를 캐치해서 담아내는 일이 참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