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를 소망하는 인간과 살기를 염원하는 안드로이드가 하나의 육신 안에 공생한다. <인간증명> 속 혜라(문소리)의 아들은 그런 존재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는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 영인(장유상)을 되살려낸 혜라는, 얼마 못 가 안드로이드가 아들의 뇌 생체 조직 회로를 차단해 뇌사 상태에 이르게 했다는 깊은 의심에 빠진다. 아들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누군지 알 수 없는 기계의 존재는 결국 법정에 호출돼 애원하기에 이른다. “계속 산책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싶어요.”
김의석 감독의 <인간증명>은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단연 주목할 만한 한국영화다. SF 앤솔러지 <SF8>의 일부로 공개된 50분 분량에서 나아가 90분 장편 버전을 공개했는데, 두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흥의 차이 또한 흥미롭다.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주제와 자연광을 살린 미니멀한 미장센까지, 새로운 SF에 대한 형식적 고민을 거듭한 김의석 감독과 작품의 면면을 탐색했다.
-장유상 배우는 눈동자가 커서 안드로이드에 정말 잘 어울리더라. 실의에 잠긴 문소리 배우의 모습은 적역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그동안 잘 보지 못한 모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맞다. 혜라는 내가 팬으로서 보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던 문소리 선배님의 모습이었다. 장유상 배우의 경우 안드로이드라는 설정만 가지고 있을 뿐,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연기를 하면 오히려 더 독특해질 거라고 봤다. 리얼과 드라마 사이에 놓인 이상한 캐릭터. 그런 인물을 두면 대화 구성도 우리가 실제로는 잘 쓰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작 소설 <독립의 오단계>보다는 감독의 데뷔작인 <죄 많은 소녀>와 짝을 지어서 생각해보고 싶은 영화였다. 우선 두 영화 모두 취조와 탐문의 과정으로 도입해 서사의 동력을 미스터리가 끌고 간다.
=내게는 세상이 그렇다. 미스터리다 정말. 세상은 우리가 계속해서 무언가 해결해나가고 조금씩 답을 찾아간다고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교육받아왔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억울하고 답답한 젊은 인물과 의심하고 추궁하는 중년이 대립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우연한 공통점일까.
=한 사람의 양면처럼 보이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딜레마에 이끌리는 편이다. 나이대가 다르고 서로 상황이 달라서 다른 빛으로 보일 뿐이지, 출구가 없는 상황은 같다. 혼자 응어리를 안고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죄 많은 소녀> 때도 한 생각인데 이 경우 그 둘만큼 서로를 잘 알고 치열하게 소통하는 관계도 드물 것 같다.
-청년들은 죽음이나 부상을 겪고, 남겨진 어른들은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겪는다. 이런 주제나 정서에 끌리게 된 사회적 영향이 있었나.
=사회가 죽음을 자꾸 잊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누군가의 부재함을 당했을 때 인식의 혼란이 급작스레 덮친다. 꽉 짜여 있던 알고리즘들이 일순 깨진다고 해야 할까.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 사람은 없으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그런 불행을 겪을 텐데 우리는 관련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다.
-앞으로도 비슷한 주제에 천착하리라 기대해도 될까. 이를테면 김의석의 테마라고 부를 수 있을지.
=더 뻗어나가서 존재에 대한 사유 같은 것도 좀더 전개해보고, 앞선 철학자나 소설가들의 유산을 떠들어보고 싶다. 이런 시선을 한국 사회에서 일어날 법한 일로 치환해서 잘 만들고 싶은 것이 내 고민이다.
-감독이 가진 부조리의 감각이 이번 영화의 엔딩에서도 선연히 드러난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게 하는 선문답이 오가는데.
=SF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연극적으로 하고 싶기도 했다. 대사도 관념적으로 가고. 혜라 캐릭터가 스스로 성찰하는 캐릭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탄식 끝에, 결국은 스스로 아들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아들의 보고 싶지 않은 면까지도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고 말이다.
-미래적인 색감이나 조명을 쓰지 않으려는 노력은 SF영화의 전형적인 스펙터클에 대한 일종의 반감 같은 걸까.
=SF영화를 좋아해서 많이 보지만 내가 기존의 표현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인간증명>의 이야기를 그렇게 표현한다면 일단 관객에게 잘 안 와닿을 것 같았다.
-인공적인 미장센을 배제하는 대신에 공간에 대한 상상력에 힘을 실었다. 이를테면 재판이 이뤄지는 법정 공간은 오래된 성당 같은 곳에 빛이 쏟아지는 모습으로 현실과는 완전히 다르게 디자인했다.
=최대한 미니멀하게, 그리고 아날로그하게 가려고 했다. 인물들의 감정을 부각하기 위함이었는데, 실은 제작 여건상 목표했던 것만큼은 다 구현하지 못해서 아쉽다. 로케이션헌팅하는 제작부가 고생을 많이 했다. 예산이 넉넉지 않은데 내가 자꾸 다시 되돌려 보내니까…. (웃음)
-대구를 이루는 오프닝과 엔딩의 롱테이크 신, 새롭게 추가된 등장인물들까지 더해진 장편 <인간증명>은 제자리에 제 리듬대로 존재하는 숏의 연결들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영화적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결과적으로 50분 버전과는 꽤 다르게 체감되는데.
=안 그래도 문소리 선배가 그런 반응을 들었다고 연락해왔는데, 솔직히 두 작품 사이에 차이가 선명한지 감독 입장에서는 잘 믿지 못하겠다. 그냥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시는 것 같고. (웃음)
-그런가. 애초에 장편으로 기획했다가 단편을 먼저 공개하는 과정이었는데 절차적으로 어떤 세부가 있었나.
=애초에 <SF8> 앤솔러지 기획이 확실히 있었는데,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내게 작품을 추천할 때 장편화를 적극 권유했다. 나로서는 실험해볼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고. 다만 예산이나 촬영 일정은 50분 버전에 맞춰져 있으니까 모든 컷을 여분 없이 딱 저스트만 찍어야 해서 힘들었다. 가끔은 나 혼자만 탈선한 느낌이 들면서, 누굴 위해 이렇게까지 하고 있지 하는 심적 어려움도 있었다. 장편으로 편집하고 초반 50분만 끊어서 공개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말이 쉽지 그것도 뜻대로 안되더라. <SF8> 시리즈는 여러모로 생소한 길이와 포맷에 맞춰 작업하는 경험이었다. 장·단편 버전은 같은 신이라 해도 사용된 테이크라든가 호흡 면에서 미세하게 다르다.
-편집에서 리듬을 만진다고 감안해도 애초에 숏의 호흡을 굉장히 길게 잡았다.
=롱테이크를 좋아하는데 데뷔작에서는 무빙도 많고 공간을 넓게 쓰는 방식으로 진행했었다. 그래서 이번엔 빛이나 인물의 표정 변화에 좀더 길게 집중하자는 마음이었다. 그걸 느린 호흡으로 세공하면 스크린이 아닌 TV나 모니터로 보아도 관객이 알아봐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숏폼의 경우 콘티는 물론 시나리오 단계부터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본의 아니게 급변하는 영화시장을 몸소 체감 중이다. TV, OTT 플랫폼의 영화 연출에 이어 올해 춘천영화제와 부산영화제 등 팬데믹 시대의 영화제를 경험했다. 이런 변화가 창작에 영향을 미치나.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똑같다. 오히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그래도 한편을 만들었다는 것에 위로를 얻는다. 어떤 부분에서는 자긍심을 느끼기도 하고.
-지금까지 만든 두 영화 모두 무죄를 입증하거나 인간이기를 증명해야 하는 호소의 상태를 그렸다. 다음에 등장할 주인공은 어떤 모습일까.
=현실의 세속적인 조건들이 다 벗겨진 상태에서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을 그리고 싶다.
<인간증명>은 어떤 이야기
감독 김의석 / 출연 문소리, 장유상 / 제작연도 2020년 / 상영시간 90분 /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혜라는 급발진 사고로 죽은 아들 영인이 자살했을 가능성을 믿기 힘들어한다. 안드로이드가 보편화된 한국, 구태여 영인의 뇌 생체 조직을 이식해 그와 똑닮은 존재를 만들어낸 것도 혜라의 비탄과 집착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예고된 혼란은 눈앞의 영인이 전과 같지 않다는 불안함 속에서 끝없이 증폭된다. 김의석 감독이 그리는 근미래는 의심과 불안, 탄식조차 제대로 내뱉기 힘든 깊은 상실감으로 점철되어 있는 동시에 눈앞의 풍경은 눈부실 만큼 환하고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