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워 미드나잇' 임정은 감독 -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법
2020-11-11
글 : 남선우
사진 : 최성열
'아워 미드나잇' 임정은 감독

100일의 기다림으로 공주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려 했던 병사는 99일을 버텼다. 100일째 되는 날, 그가 공주를 떠난 것이다. “<시네마 천국>에서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왜 병사가 떠났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는 100일째에도 공주와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가지 않았을까.” 임정은 감독이 <아워 미드나잇>에서 비추고 싶었던 시간이 바로 병사의 100번째 밤이다. “문제가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아도, 심지어 상황이 더 안 좋아져도, 모든 순간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버티는 청춘들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건국대학교 영화과,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단편 <사랑의 무게> <인형뽑기> <새벽>을 만든 임정은 감독도 어쩌면 그런 청년이다.

앞서 만든 단편들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인디포럼, 그리스 드라마국제단편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았지만 언제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질문해왔다. 그런 그가 “멋몰라서 용감하다는 말을 들어도 좋으니 자유롭게 만든” 첫 장편이 <아워 미드나잇>이다. <비포 선라이즈>처럼 처음 본 청춘 남녀가 목적지 없이 계속 걷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그는 스러져 가는 꿈을 붙든 무명배우 지훈(이승훈)과 사내 연애를 하다 데이트 폭력을 당한 은영(박서은)을 한강으로 불러모았다. 공무원이 된 선배의 부름으로 자살 방지 비밀 순찰을 돌게 된 지훈이 은영을 도와주면서 밤 산책이 시작된다. 동작대교에서의 만남을 시작으로 서울 일대를 돌아다니는 두 사람은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속엣말을 나누며 포근한 새벽을 보낸다. 하지만 이들에겐 또 서로가 없는 내일이, 상처만 주는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모든 풍경은 “대담하게 그림자 속에 피사체를 두고 생동감 있는 흑백 사진을 찍는” 로이 디캐러바의 작품을 레퍼런스 삼아 찍었다.

“흑백의 화면으로 지훈과 은영 둘밖에 없는 세계처럼 서울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들은 임정은 감독이 생각하는 극과 극의 유형이기도 하다. 지훈은 이상을 좇아온 데 반해 은영은 남들이 정답이라고 여기는 현실적 선택만을 해온 것. <아워 미드나잇>은 두 사람이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물로서 영화가 끝나가는 지점에 짧은 연극 공연을 선보인다. 이때 지훈이 읊는 대사가 연극 <갈매기>의 주인공 니나의 독백이다. 니나는 자신이 진 십자가를 깨닫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내려놓는 인물이다. “지훈도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법을 깨닫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오열하거나 무너지기보다, 마지막일지 모르는 이 공연을 아껴서 예쁘게 해내길 바랐다.” 한편 은영은 소리내어 노래하고 화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그의 마음속에도 김광석의 <너에게>처럼 “시적이고 아름다운 가사”가 있음을, 그러므로 반드시 꺼내놓아야 하는 이야기가 있음을 임정은 감독은 관객에게 확인시켜준다.

감독의 따뜻한 시선은 마지막에 이르러 다른 인물들에게도 가닿는다. 영화를 뒤로하고 살아가는 지훈의 친구들에게도 각자의 아침이 온다. <아워 미드나잇>은 그렇게 지금은 물론 언젠가 꿈을 가졌던 모든 이에게 바치는 러브 레터로 마무리된다. 이는 임정은 감독 자신이 받고 싶었던 편지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꿈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인기와 인정을 위해 타협하고 싶지 않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정직하게 표현한 영화가 각자의 자리에서 백일을 맞이하는 청춘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감독 임정은 / 출연 이승훈, 박서은, 임영우, 한해인 / 제작연도 2020년 / 상영시간 77분 /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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