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②] 경기도 다양성영화 제작·투자 지원작 '빅슬립' 김태훈 감독, 김영성·최준우 배우
2020-12-18
글 : 김성훈
사진 : 최성열
탈가정 청소년을 말하다
최준우, 김태훈, 김영성(왼쪽부터).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과 제목이 같은 영화의 타이틀만 보면 탐정이 등장해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경기도 다양성영화 제작·투자 지원작으로 선정된 장편영화 <빅슬립>(감독 김태훈)은 탐정이 주인공도 아니고, 하드보일드 장르도 아니다. 외골수로 살아가는 30대 후반 공장노동자 기영(김영성)과 17살 가출 청소년 길호(최준우), 일면식도 없는 두 남자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지방 소도시, 기영은 집 앞에서 자고 있던 길호를 집에서 재워준다.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집을 나온 길호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깊은 잠을 잔 지 오래됐다. 길호는 자신에게 친절한 기영에게 마음을 열고 그의 집에서 머문다. 기영은 길호에게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불안해한다.

인디포럼 폐막작, 미쟝센단편영화제 비정성시 부문 초청작 등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된 단편 <명희>(2014)를 연출한 김태훈 감독이 자신의 첫 장편영화로 가출 청소년을 다룬 건 예술 강사로서 탈학교 청소년들과 시간을 보냈던 경험에서 비롯다. “2012년부터 탈학교 청소년들에게 영화를 가르쳤다. 예술 강사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뒷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수업 시간에 잠을 잤다. 내 수업이 재미없나 싶어 수업이 끝난 뒤 ‘왜 자냐’고 물어보았는데 대답을 하지 않더라. 이후 그 학생에게 관심을 보이자 어느 날 ‘아버지가 무서워서 밤마다 집을 나가 밤길을 서성거리다가 학교에 와서 자는 거’라는 얘기를 해주었다.”(김태훈 감독) 가정 학대에 노출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는 그 학생의 사연은 큰 충격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수업 시간에 그 아이를 깨울 수 없었다. 그가 수업 시간에 자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눈 앞에 아른거렸다”라는 게 김태훈 감독의 회상이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교사로서 그가 겪은 딜레마는 영화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오랫동안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친구처럼 대할지, 아니면 거리를 둬야 할지. 감당할 수 없다면 수업 이외의 시간을 할애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런 주변의 조언을 따를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이렇게 해도 되나. 선생으로서 진심을 다하려면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게 김감독의 설명이다. 선생으로서 아이들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한 그의 고민은 이 영화 속 어른인 기영에게 반영된 셈이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자의 삶을 체험한 나의 경험과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 탈학교 청소년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몇몇 선생님을 조합해 만들어낸 인물”(김태훈 감독)이 기영이다.

깊은 고민 끝에 나온 감독의 진심은 기영과 길호를 연기한 배우 김영성과 최준우에게도 전달됐다. 김태훈 감독에게 김영성은 “오디션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운명처럼 ‘기영을 찾았다’고 생각할 만큼 적임자”였다. <오이디푸스 왕> <꽃담-청주> <난세에 저항하는 여인들> <내일은 다산왕> 등 연극 무대에서 주로 활동하고, 영화는 거의 처음인 김영성은 “시나리오를 읽는 내내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다 읽은 뒤 감독님을 빨리 만나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장편영화 연기가 전무한 최준우 또한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길호가 대단해 보였다”라며 “어른인 기영에게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는 길호가 다른 가출 청소년들보다 대단하게 느껴졌다”고 전했다. 김태훈 감독은 최준우를 두고 “외모는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데, 굉장히 성숙해 길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최준우, 김태훈, 김영성(왼쪽부터).

기영과 길호, 두 인물이 만나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관건이다. 김태훈 감독이 김영성, 최준우 두 배우에게 특별히 주문한 점은 “서로 대화하면서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감독으로서 배우들의 의견을 최대한 듣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장에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김태훈 감독)

배우들도 감독을 크게 신뢰했다. 김영성은 “시나리오에 기영을 이해할 만한 단서들이 있었다”라며 “기영은 내 모습과 닮은 면도 많고, 나보다 안타까운 면도 있으며,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도 있다. 그의 말과 행동이 모두 공감됐다”고 말했다. 최준우는 “길호가 기영과 부딪치는 상황이 다 이해가 됐다”고 밝혔다. 기영과 길호 사이에 발생하는 오해가 서사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인물의 갈등을 부각시킨다. 김태훈 감독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며 살아간다. 이 영화는 기영과 길호, 우리가 접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오해를 그려내는 이야기”라고 힌트를 주었다.

예산이 넉넉지 않고, 코로나19 때문에 순발력 있게 현장을 운용해야 하는 촉박한 상황에서도 20여회차 만에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건 서로에 대한 신뢰 덕분일 것이다. “급할 때는 눈빛만으로도 소통이 가능했다.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희열을 느꼈던 건 배우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서로 말이 필요없게 된 순간까지 경험한 것이다.” (김태훈 감독)

장편영화가 처음이다시피한 세 사람에게 <빅슬립>은 꿈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태훈 감독은 “앞으로 영화를 못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그는“독립영화는 버티기 쉽지 않으니까. 이 영화 또한 찍겠다고 생각하고 쓴 게 아니라 하루에 한신 쓰면서 완성했고, 운이 무척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노력하면 누군가가 알아주는구나 싶다. 경기도 다양성영화 제작·투자 지원작으로 선정된 덕분에 후반작업을 무사히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선정 소감을 밝혔다.

김영성은 “이 작품을 찍으면서 매일 감사하고 소중했다”라며 “뜨겁거나 차가운 인생을 살아라는 선생님의 말대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선택을 후회하지 말고 계속 도전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최준우는 “류준열씨처럼 동료 배우, 스탭들과 함께 긍정적으로, 자신감 있게 작업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재능있는 감독과 배우들이 의기투합해 촬영한 <빅슬립>은 진열을 재정비해 내년 후반작업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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