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③] 경기 시나리오 기획·개발 지원작 '퍼스트 레이디' 멘토 감독 김영탁, 멘티 작가 안영수
2020-12-18
글 : 김소미
사진 : 최성열
소수자를 위한 법정 드라마
김영탁, 안영수(왼쪽부터).

쉽지 않은 선택이다. 올해 한국영화감독조합(DGK)과 손잡고 진행된 2020 경기 시나리오 기획·개발 지원사업의 대상작으로 선정된 안영수 작가의 <퍼스트 레이디>는 대중의 선택에 쉬이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작가의 뚝심이 빛나는 작품이다. 영상화가 가능한 순수 창작 장편 시나리오 혹은 시나리오화가 가능한 트리트먼트를 대상으로 공모를 열어 선정작을 대상으로 7인의 감독(김영탁, 손영성, 윤가은, 이수연, 이수진, 장유정, 장항준)이 멘토링에 나서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김영탁 감독은 특히 무거운 책임을 스스로 떠안았다. 그는 <퍼스트 레이디>에서 “성소수자의 존재와 그에 얽힌 범죄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밀어붙인 용기, 그리고 진정성”을 알아보고 멘토링을 자처했다.

김영탁 감독에게 이런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킨 작품 <퍼스트 레이디>는 어느 야심한 밤에 일어난 납치, 성폭행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파 드라마다. 귀가 중이던 피해자에게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세 남성은 즉각 경찰에 붙잡히지만, 이들은 뻔뻔하게도 강간죄에 대해 무죄를 주장한다. 피해자 반희가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이유에서다. 안영수 작가는 정의 앞에 물불 가리지 않는 열혈 검사 박진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건을 단순 성추행으로 치부하는 경찰과 사회의 무지, 그리고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작중 배경은 “트랜스젠더라는 용어조차 통용되지 않던”(안영수) 1995년이지만, <퍼스트 레이디>가 가리키는 소수자 억압과 차별의 뿌리는 2020년에도 소리 없이 누군가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다. 안 작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별 정정 소송을 신청한 트랜스젠더 사례를 취재했던 어느 기자의 회고록을 읽고 작품의 실마리를 잡았다. “1990년대라 하면 민주화나 경제 회복을 비롯해 거대 담론이 사회를 휩쓸고 있을 때다. 당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성소수자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했다”는 게 안영수 작가의 말이다.

안영수 작가가 늦깎이로 시나리오 전공 대학원에 진학 후 빠르게 써내려간 <퍼스트 레이디>의 초안을 본 김영탁 감독은 “용기 있는 소재인 데 반해 예산 운용의 측면에선 핸디캡이 많은 작품”이라는 일침을 놓았다. 저예산 독립영화로 만들기엔 1990년대라는 시대 재현이 필요하고, 상업영화로 소화하기엔 규모가 작은 이야기라는 진단은 안영수 작가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3개월의 밀도 있는 협업 작업에 돌입한 멘토·멘티의 첫 관문은 우선 뼈대를 추려내 장르부터 재설정하는 일이었다. “법정물로 확실히 틀을 잡아야 한다”는 김영탁 감독의 계획을 따라 안영수 작가는 젊은 검사가 가해자측의 악명 높은 전관예우 변호사와 맞서는 팽팽한 구도에 집중했다. <슬로우 비디오> <헬로우 고스트>를 연출한 김영탁 감독의 이력을 생각하면 어딘가 드라이한 방향 설정이 아닌가 싶지만, 김영탁 감독은 “작가 생활을 하며 마지막으로 썼던 시나리오가 법정물이고, 스릴러 작품을 준비하기도 했다”고 또 다른 취향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회자된 최초의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되새기며, 보다 구체적인 취재와 생생한 당사자성이 필요하다는 점도 절감했다. “나 자신의 고리타분함을 문득 경계하게 되었다”는 안영수 작가는 트랜스젠더 변호사를 찾아가 한국 사회의 주요 젠더이슈와 인권법 등을 배워나갔다.

김영탁, 안영수(왼쪽부터).

멘티가 멘토에게 힘을 얻는 만큼 멘토도 멘티로부터 배운다고들 한다. 김영탁·안영수 콤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즐거워서 안영수 작가를 자꾸 귀찮게 하고 만나자고 했다”는 김영탁 감독은 이번 작업을 늘 책상에서 혼자 작업해야 하는 작가의 고립 생활을 구해준 뜻밖의 활력으로 기억한다. “영화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어가는 차에 젊은 작가들로부터 새로운 비전을 확인하는 뜻깊은 경험”이기도 했다. 김영탁 감독은 기성감독에게 이런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새로운 글을 여럿 접하는 좋은 자극이 될 거라는 추천도 아끼지 않았다. 안영수 작가는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작가, 그리고 매체를 넘어 소설가로서의 다양한 내공을 가진 김영탁 감독과 작업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 생각한다”는 적확한 존경을 보탰다. 안 작가는 이번 경기 시나리오 기획·개발 지원으로 멘토링 프로그램의 이점을 체감한 것은 물론, 김영탁 감독을 통해 제작사의 구체적인 피드백을 받는 등 영화화 가능성에도 성큼 다가섰다.

“김영탁 감독과의 만남 이후로 <퍼스트 레이디>는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을 품던 차에 대상 소식까지 거머쥐었으니 그에게 올 연말은 마냥 엄혹하지만은 않은 계절이다. 그는 “매우 디테일하게 전 과정을 꼼꼼히 관리해준 경기콘텐츠진흥원과 DGK의 노고 덕분에 멘토링 과정이 탄탄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덧붙였다.

얼핏 영부인에 관해 다루는 영화인가 착각하게 만드는 제목인 <퍼스트 레이디>는 도입과 엔딩에서 성경 속 아담과 이브 신화를 차용해 젠더에 대한 믿음을 뒤흔든다. 에덴 동산에는 아담과 이브가 아닌 오로지 주인공 반희만 존재하다가 그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최초의 여자’라 호명된다. 이 간결하고 힘 있는 상징은 안영수 작가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접근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이미지”를 고심한 결과로 법정 드라마의 시작과 끝을 차분하게 감싼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범죄의 복잡다단한 스펙트럼 중에서도 트랜스젠더의 인권에 주목한 <퍼스트 레이디>가 극장에서 더 짙은 호소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을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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