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우비를 뒤집어쓴 인터폰 너머의 가사도우미(<기생충>)도, 방파제를 배회하는 이름 모를 부랑자(<미성년>)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배우 이정은이 <오마주>에서 선보일 캐릭터는 노련한 영화감독으로, 지금껏 그의 전매특허였던 작품의 다크호스 격이 아닌 원톱 주연이다. 거듭되는 투자 실패와 함께 갱년기까지 맞이한 영화감독 지완(이정은)은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다. 그를 둘러싼 상황은 적잖은 근심을 유추케 하지만 <오마주>는 결코 무겁고 처연한 수난기가 아니다. 아르바이트에 나선 지완이 한국영화의 1세대 여성감독인 홍은원 감독의 잊혀진 영화를 복원하는 작업을 떠맡게 되는 기묘한 모험담은 결국 지완이 자기 삶을 긍정하고 위로하는 힘을 얻는 결말로 나아간다.
<유리정원>(2017), <젊은이의 양지>(2020)를 만든 신수원 감독이 자신의 본령을 복기하고 쉼 없이 달려온 지난 작업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탄생한 <오마주>는 경기콘텐츠진흥원의 2020 제작·투자 지원작이다. 지난 10월 15일 크랭크업하고 막바지 후반작업에 한창인 <오마주>의 신수원 감독, 이정은 배우를 만나 여성 예술가, 그리고 중년의 희로애락에 대해 물었다.
-이정은 배우가 연기한 중년의 영화감독 지완은 신수원 감독의 데뷔작 <레인보우>(2010) 속 주인공과 이름이 같고, <레인보우>에서 지완이 막 직장을 관두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서른 끝자락이었다는 점에서 <오마주>가 그 속편처럼 보인다.
신수원 2010년 데뷔 이후 극영화, 다큐멘터리, 단편을 포함해 2년 정도 간격으로 꾸준히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러다보니 <젊은이의 양지> 끝낼 무렵 내 안에서 피로감 같은 게 확연히 느껴지더라. 나는 운이 좋은 감독이고, 앓는 소리는 하기 싫지만 정신적으로 조금 피폐해진 건 건 사실이었다. 새 작업에선 데뷔작을 돌아보면서 그때의 감각, 감수성을 되살려 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오마주>는 나의 지난 영화들과 달리 코미디와 판타지 기운이 좀더 강하다. 여러모로 <레인보우>를 떠올리며 작업한 작품이다.
-지완이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정서가 반영된 인물로 보인다는 점에서 캐스팅에 특히 애착을 가졌을 법한데, 이정은 배우를 떠올린 이유는.
신수원 <미성년>에서 부둣가를 막 휘젓고 다니던 모습, <기생충>에서 빗 속에 서서 문 열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 같은 것이 정말 대단하지 않았나. 모든 걸 다 내던지고 연기하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강렬했지만, <오마주> 같은 작품에서 긴 이야기의 중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가는 작업을 해보는 게 배우 자신에게도 중요한 경험이 될 거라는 기대를 했다. 김윤석 감독에게 연결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기생충>처럼 반향이 큰 작품을 거치고 나서 차기작 고민도 많았을 텐데 <오마주>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
이정은 감독님 말처럼 주연배우로서 가져갈 수 있는 온전한 호흡, 그리고 집중력을 발휘해서 작업해볼 수 있다는 건 배우로서 큰 메리트다. 확실히 내게는 매력적인 선택지였고, 시나리오를 읽으며 자기 일에 몰두하고 싶은 중년 여성으로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지점도 많았다. 자기 재료와 감성, 본인의 심성을 작품에 반영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부분에서 <오마주>는 굉장히 솔직한 면이 있어서 좋았다. 물론 감독님은 한 20% 정도만 자기 이야기라고 하시지만. (웃음)
신수원 하하. 공식적으로는 그 정도라고 답하겠다. 내 안에서 끄집어낸 세세한 감정들이라 가끔은 배우에게 말로 설명하기 쉽지 않을 때가 있고 현장에서 정신이 없을 땐 배우가 질문을 해와도 답을 제대로 못하고 넘어갈 때가 있다. 그런데 이정은 배우는 그런 상황에서도 혼자 집요하게 고민을 하고, 나도 깨닫지 못했던 의미를 결과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지완이 자기 아들이 써둔 시 편지를 읽는 장면이 있는데, 시를 어떤 감정으로 읽어야 할지 구체적인 디렉션을 주지 않았다. 배우가 혼자 오랫동안 궁리하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시작하는 순간 내가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어떤 의도를 갖고 썼는지 그 의미가 되살아나더라.
-박남옥, 홍은원 감독과 같은 한국영화의 1세대 여성감독을 작품 소재로 삼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
신수원 홍은원 감독에 대해서는 2010년에 MBC를 통해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안받으면서 처음 알게 됐다. 관련 취재를 하면서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홍은원 감독은 특히 박남옥 감독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그 당시 처음 알게 된 상황이었다. 다만 <오마주>를 작업하면서 단순히 여성감독에 대한 헌사를 의도한 건 아니다. 내가 영화를 하게 만든 작품 중 하나가 <시네마 천국>(1988)인데 내 버전의 <시네마 천국>을 만들고 싶었던 마음에 더 가깝다.
-한편에서는 홍은원 감독과 관련된 고전영화들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아들의 편지에 적힌 시가 흘러나오는 영화일 것 같아 몹시 기대된다.
신수원 D. H. 로렌스, 비슬라바 심보르스카의 시들을 조각조각 인용했다. 마음이 각박하고 시간에 쫓길 때도 시는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서 읽을 수 있다는 점, 그렇게 발견한 문장들이 묘한 위로가 된다는 점에서 좋아한다.
-배우 이정은의 쓰임새는 그동안 주로 장르적이었다. 서민의 일상 속 대소사를 연기하는 일일극에서도 특유의 드라마 연기 톤이 있다는 점에서 생활적인 연기와는 거리가 있었는데, <오마주>는 그런 의미에서 숨통을 틔우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정은 맞다. 만약 <마돈나>같이 센 작품이었으면 출연을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웃음) <오마주>는 일상의 자잘한 디테일들이 살아 있고 감독님의 최근 작품들에 비해 좀더 소소한 삶의 감각들을 말하는 영화라 내 개인적인 취향과도 닿아 있었다.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시절을 지나 조금씩 장르물에서 꼬여 있던 고리가 풀리다보니 어느새 장르적 색채가 강한 배우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대중 드라마의 연기 역시 기본적으로 더 표현하는 방식에 가깝고. 주연배우라는 게 조연처럼 특정 이벤트를 담당하는 게 아니고 특별한 사건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가야 하는 거니까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영화판이 여성의 불모지였던 시절에 활동했던 여성감독을 현재의 인물들과 잇는 영화다. 작품 제목대로 그들로부터 가장 오마주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정은 그들이 걸어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분들도 나도 마찬가지고, 내 삶에 빗대자면 아버지도 생각났다. 어린 시절에 전쟁을 겪고 살아오신 아버지와 정치적 부분에서 갈등도 많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부분에선 충돌하고. 하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어느 날 우울증이 찾아오자 내가 막걸리를 사드리며 그랬다. 열심히 잘 사셨다,고. 영화든 연극이든 예술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그런 칭찬이 너무 인색한 경우가 많다. 매일 열심히 투쟁하지만 과정에 대한 찬사는 없고 오로지 결과물만 있는 일이라 가끔 안타깝다. <오마주>는 과정에 대한, 서로를 향한 박수가 아닐까.
신수원 2010년에 <레인보우>를 마치고 홍은원 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실은 다큐라는 매체가 겁이 났지만 일단 덤벼본 거였다. 그 당시 홍은원 감독님과 관계된 분들을 쭉 팔로하면서 신기한 점이 많았다. 한번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을 만나기도 했다. 특유의 정신력, 기개가 대단했고 진짜 여장부를 만난 느낌이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일기를 다시 들춰보니 그분이 내게 ‘감독으로 계속 살아남으라’는 말을 해주셨더라. 우리가 모르는 여성감독들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그렇게 모험적으로 살아온 분들의 기운을 <오마주>에 담고 싶었다.
-투자를 못 받아 고초를 겪고 있는 극중 지완과 달리 <오마주>는 이번에 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 제작·투자 지원을 받게 됐다. 직접 경험한 지원 프로그램의 이점은 무엇이었나.
신수원 코로나19로 가뜩이나 영화산업의 투자가 동결된 상황에서 나처럼 중저예산 작품을 촬영하는 감독들에겐 지역 영상위의 이런 지원 제도가 큰 도움이 된다. <오마주>에는 경기도민 스탭들이 참여했는데, 그 인건비를 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 제공해주는 방식도 좋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내년에도 다양성영화가 계속 활발히 태어날 수 있도록 경기콘텐츠진흥원이 꾸준히 힘을 써주면 좋겠다. 지원을 통해 영화산업이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