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의 시대가 가고 SF의 시대가 오려는가. 설문에 참여한 55인으로부터 31표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장르는 ‘SF’(science fiction)다. 드라마, 스릴러, 액션 장르가 전통적으로 우세한 한국 상업영화 시장에서 SF의 미래가 이토록 밝게 예측된 적은 없었다. 엄밀히 말해 SF 시대의 개막은 일찌감치 2020년의 서두에서도 예견된 바 있으나, 코로나19의 악화로 두 SF기대작인 <서복>(감독 이용주)과 <승리호>(감독 조성희)가 개봉을 연기하면서 기대와 호기심만 더욱 높아진 상황이다. 여기에 2021년의 한국영화 최고 화제작으로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이 꼽히고 배우 정우성이 제작하는 <고요의 바다>가 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중 처음으로 SF에 출사표를 내밀면서, ‘우주’가 대세 아이템으로 떠오르는 다분히 기념비적 풍경이 펼쳐지는 중이다.
SF의 대두는 인접 장르의 부상과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판타지 장르의 불모지였던 한국 시장의 성향을 고려하면, 이번 설문 조사에서 SF에 이은 대세 장르 2위를 ‘판타지’가 차지한 것 역시 이례적인 변화다. 로봇, 시간 여행, 메타버스(현실과 가상의 결합), 초능력 등 SF와 판타지 장르의 하위 소재에 대한 세부적인 관심도 응답자들 사이에서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산업 최전선의 플레이어들이 이같은 도전 정신을 품게 된 배경에는 <신과 함께> 시리즈라는 국내 IP의 신기원, 그리고 소재 고갈의 위기 속에서 과학·기술 영역을 소재로 한 서사물의 전세계적 증가 추세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3~4년간에 걸쳐 착실히 진행된 장르영화에 대한 한국 관객의 눈높이 변화, 그리고 선호도 증가는 OTT의 대중화로 더욱 빠른 상승세를 탔다. 이 가운데 <외계인>과 같이 1천만 관객을 가늠케 하는 텐트폴 SF영화가 기획된 것은 특히 눈여겨볼 사례다. 영원한 트렌드일 것 같던 “남자들만 나오는 암청색 스릴러영화”(김혜리 <씨네21> 기자)가 저물고 그 바통을 SF가 이어받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제법 짜릿하다. SF가 안길 일말의 신비, 그리고 경이를 수혈받은 한국 상업영화의 새로운 지형도 변화가 산업에는 건강한 긴장을, 객석에는 청량감을 안기리란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액션, 멜로 등을 표방하면서 SF나 판타지 요소를 더해 차별화 전략을 추구하는 작품들도 새로운 계보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액션과 초능력 히어로물을 결합한 <마녀2>, 멜로드라마 장르에 판타지를 이식한 <원더랜드> 등이 대표적이다. 클라이맥스 스튜디오가 김초엽 작가의 단편소설 <스펙트럼>을 바탕으로 제작할 김보라 감독의 신작 프로젝트 역시 여성 중심, 그리고 작가적 SF의 새로운 출발을 기분 좋게 알리는 작품이다.
코로나19로 재난의 직접적 충격파를 경험한 콘텐츠 업계는 여전히 재난, 디스토피아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고 있다. 한 응답자는 “죽음, 고독”을 콕집어 새로운 소재로 전망했고 경제 위기의 지표인 코미디 장르 역시 상위권을 차지했다. 한국 CG의 저력을 입증하며 연말을 화려하게 수놓은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의 기세를 이어받아 좀비·괴수물 역시 2021년에도 꾸준히 사랑받을 것으로 보인다.
게임과 웹툰의 영화화, 인터랙티브형 영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장르와 소재 중심의 전통적인 콘텐츠 기획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형식’에 먼저 집중해야 한다는 기민한 답변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숏폼·미드폼 콘텐츠의 대세를 확신하며 장르의 파괴, 형식의 전복에서 혁신을 내다봤다.
※설문에 참여한 분들의 성함과 직함은 게재되며, 응답자의 문항별 답변은 공개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