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블랙 위도우의 삶에는 우리가 모르는 긴 시간이 있다
2021-07-09
글 : 배동미
<블랙 위도우>가 지난 <어벤져스> 시리즈로부터 이어받은 것, 앞으로 새롭게 만들어갈 것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란 거대한 세계 속에서 블랙 위도우만의 태피스트리를 솜씨 좋게 짜낼 수 있을까. 특히나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죽음을 맞은 캐릭터가 아닌가. 이런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블랙 위도우>는 지난 10년간 마블 스튜디오가 직조해낸 촘촘한 세계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만의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에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다. 태피스트리의 시작은 1995년 미국 오하이오. 파란 빛깔로 머리카락을 물들인 10대 소녀가 6살배기 여동생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뛰놀고 있다.

천진난만한 여동생과 달리 그늘이 비치는 소녀는, 쾌활한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옆에서도 진지한 여성 히어로 블랙 위도우로 성장할 나타샤 로마노프다. 나타샤의 곁에는 여동생뿐 아니라 어머니 멜리나(레이철 바이스), 아버지 알렉세이(데이비드 하버)까지 있는데, 나타샤의 가족사는 일찍이 MCU에서 전해지지 않던 이야기다.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에게 오랜 친구 버키(세바스티안 스탄)가, 스칼렛 위치(엘리자베스 올슨)에게는 쌍둥이 동생 퀵실버(에런 존슨)가 있었던 것과 달리 늘 혼자처럼 보였던 블랙 위도우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옛 소비에트연방 체제의 엘리트인데, 실은 미션을 위해 아이들을 키우고 있고, 이들 가족은 위장가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영화는 나타샤와 여동생이 레드룸에 입소하는 과거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란 고정된 마침표를 피하기 위해 <블랙 위도우>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사이의 틈새를 파고들어야 했다. 팬들이 그동안 블랙 위도우를 주인공으로 한 솔로 무비를 많이 기다려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제작자 케빈 파이기는 “블랙 위도우의 삶에서 우리가 모르는 긴 시간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의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사이 동안 나타샤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창의적으로 이 공백기에 집중한다면, 그녀의 과거는 물론 현재에 대해서도 많은 걸 발견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라고 설명했다.

영화 초반 나타샤는 어벤져스 멤버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임기응변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국방부 장관 선더볼트 로스(윌리엄 허트)는 군대를 데리고 그를 바짝 쫓고 있다. 전직 KGB 요원이자 스파이를 거쳐 어벤져스 히어로로 활약한 나타샤는 혼자서도 이들을 가뿐히 따돌린다. 그런 다음 로스 장관에게 “당신을 만나기 전 나는 다양한 삶을 살았어요. 난 떠날 거예요”라는 말을 남긴다. 마치 어벤져스 멤버들에게 잠시 안녕을 고하는 듯한 말을 뒤로한 채 나타샤는 배를 타고 훌쩍 떠나 자신을 찾아 나선다.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약 10년 만에 탄생한 솔로 무비 <블랙 위도우>에는 나타샤 로마노프를 제외한 기존 어벤져스 멤버들이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다(회상 신에서 호크아이가 목소리로 잠시 등장할 뿐이다). 이는 <블랙 위도우>가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오롯이 나타샤 로마노프의 서사로 채운다는 의미다.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처음부터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인물만 다루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설명했다. 레드룸의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 나타샤가 향하는 곳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어벤져스>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 블랙 위도우가 모종의 작전을 펼친 것으로 언급되는 도시다. 쇼트랜드 감독은 부다페스트와 레드룸을 이으며 떡밥을 제대로 회수하면서 <블랙 위도우>의 태피스트리를 짜내려간다.

기존의 어벤져스 멤버들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가 눈에 띈다. 나타샤의 동생 옐레나(플로렌스 퓨)는 레드룸에서 훈련을 거친 결과, 실력 있는 암살자가 되어 부다페스트에서 나타샤와 조우한다. 원작 코믹스에서 블랙 위도우의 맞수이자 2대 블랙 위도우로도 활동한 금발의 옐레나 벨로바는, 비록 위장가족이었지만 나타샤와 공동의 유년 시절을 나눈 동생으로 변주되었고, 플로렌스 퓨라는 야무지고 튼튼한 배우의 에너지에 힘입어 활기차고 생의 의지가 가득한 캐릭터로 재탄생했다. 그의 활력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은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몸싸움을 벌이는 부다페스트 은신처 신. 20년 만에 만난 자매는 서로에 대한 의심과 감정을 담아 몸싸움부터 벌이는데 “전작에서 보여준 블랙 위도우의 액션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원했다”는 쇼트랜드 감독은 이 신을 “거리의 싸움처럼 정신없고 생생하게” 그려냈다.

진지한 언니와 달리 극의 분위기를 산뜻하게 반전시키는 옐레나는, 액션은 물론 웃음까지 담당하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올리브색 야전 조끼가 두 사람의 농담 소재로서 큰 역할을 하는데, 이 조끼는 막 레드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옐레나가 처음 산 옷이다. 여성 스스로가 꾸려가는 삶을 상징하는 야전 조끼는,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알겠지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블랙 위도우가 착용했던 것이기도 하다. 나타샤와 옐레나가 힘을 합쳐 위도우들을 구하고, 나타샤가 다시 완다를 구할 때 반복해서 등장하는 올리브색 야전 조끼는 여성간의 무한한 연대의 연결점이 되어준다.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나타샤와 여동생 옐레나, 어머니 멜리나 그리고 위도우들까지, <블랙 위도우>는 여성 캐릭터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고 여성끼리 싸우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블랙 위도우>가 무찔러야 할 악은 냉전 시절부터 여성 암살자를 양성해온 레드룸과 그를 만든 드레이코프 장군으로 모아진다. 레드룸은 훈련 도중 약한 아이들을 제거하고 훈련받은 아이 중 5%만 살리는 지옥의 훈련기관으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짧게 묘사되었듯이 나타샤에게 자궁 적출 수술을 강제할 만큼 비인간적인 공간이다. 드레이코프는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여자아이, 전쟁 중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데려와 레드룸에서 암살자로 길러냈다. 그렇게 탄생한 위도우들은 세뇌와 과학적인 요법으로 인해 드레이코프가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블랙 위도우>의 관전 포인트는 이같이 여성을 향한 모든 종류의 억압을 여성들이 힘을 모아 깨부순다는 데 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작전 중 몸을 드러내는 원피스나 몸에 딱 붙는 유니폼을 입고 남성 히어로 사이에서 홀로 여성으로서 고군분투했던 블랙 위도우는 야전 조끼를 두른 든든한 여동생과 함께 많은 여성들을 구해낸다. MCU 페이즈4의 시작이 이렇다면 앞으로 이어질 MCU 안에서 다양성에 대한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블랙 위도우>는 젊은 여성들에게 일어서라고, 강해지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또한 함께 일어서라고 말하는 영화다. 함께일 때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다.”(케이트 쇼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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