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 가장 아찔하고 짜릿했던 순간은 폐막식에서 벌어졌다. 단편부문과 명예 황금종려상 등의 시상이 이루어진 뒤 본격적으로 경쟁부문 결과 발표가 시작될 참이었다. 사회자는 심사위원장인 스파이크 리에게 배우상, 심사위원상, 각본상, 감독상, 심사위원대상, 황금종려상 중 어떤 상부터 시상하면 되냐는 의미로 질문을 건넸다. “어떤 게 첫 번째 상(first prize)이죠?” 수상자 명단이 적힌 종이를 펼쳐보던 스파이크 리는 중간 과정은 생략한 채 최종 결과로 직진해버렸다. “황금종려상은 <티탄>.” 사회자는 다급하게 “잠깐만!”을 외쳤고, 동석한 심사위원들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제일 마지막에 발표해야 할 최고상을 제일 먼저 공개하다니. 수습이 불가능한 대형 사고였다. 결과적으로 시상식은 70분짜리 혼돈의 스릴러가 돼버렸고, 스파이크 리는 폐막식을 망쳐버려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발표 과정이 아찔했다면 결과는 파격적이었다. 스파이크 리가 의도치 않게 서둘러 <티탄>을 호명한 건 명백한 미스 커뮤니케이션의 결과지만, 한편으론 스파이크 리의 뇌리에 <티탄>이 강렬히 박혀 있어 심사위원단의 과감한 선택을 빨리 알리고픈 조급증이 무의식중에 작동한 결과가 아닌가 짐작해보게 된다. 그만큼 <티탄>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티탄>이 처음 공개된 뒤 평론가들의 반응은 극단으로 갈렸다. 문화 주간지 <텔레라마>는 “<티탄>이 영화제에 전기 충격을 가할 거라 알려졌는데 그 소문이 딱 맞았다.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이들도 많고 성급하게 거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미지근한 반응은 없다”며 이 영화가 만장일치를 받기는 힘든 작품이라고 설명했다(참고로 영화제 영어 공식 데일리인 <스크린 데일리>의 평점은 1.6점으로 낮았고, 프랑스 공식 데일리 <르 필름 프랑세즈>의 평점에선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히어로> 다음으로 총점이 높았다).
문화 시사 잡지 <레쟁록>은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탈리아의 거장 마르코 벨로치오가 영화감독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로 “상상력과 용기”를 꼽은 것을 언급하며 “상상력과 용기에 관해서라면 <티탄>은 부족할 게 하나도 없다. 사실 이 두 가지가 <티탄>의 가장 큰 덕목이다. 심사위원들의 이 선택은 현대영화의 지배적 미적 기준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을 확실히 보여준다”고 했다. 시사 일간지 <르 파리지앵> 또한 “<티탄>에 황금종려상을 주는 건 시적 선언이다. 작열하는 이미지에 대한 송가이며, 트라우마를 겪은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젊은 여성감독의 용기를 칭송하는 송가다”라고 평했다.
<티탄>, 영화제에 전기 충격을 가하다
화제의 중심에 선 젊은 여성감독은 1983년생 프랑스 여성감독 줄리아 뒤쿠르노. 참고로 올해 경쟁부문에 오른 감독 중 가장 젊다. 줄리아 뒤쿠르노는 <티탄>으로 칸영화제의 역사를 새로 썼다. 지금까지 칸에서 여성감독이 단독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93년 <피아노>의 제인 캠피언이 여성감독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았지만, 당시 제인 캠피언은 <패왕별희>의 첸카이거 감독과 공동으로 수상했다. 올해 24편의 경쟁작 중 여성감독의 영화가 단 4편뿐이라는 사실은 실망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경쟁부문뿐만 아니라 주요 부문의 최고상이 모두 여성감독에게 돌아간 것은 기억할 만하다. 단편 황금종려상(<세상의 모든 까마귀들>(감독 탕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언클렌칭 더 피스츠>(감독 키라 코발렌코)), 황금카메라상(<무리나>(감독 안토네타 알라마트 쿠시야노비치))까지 여성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해였다.
<티탄>은 <로우>에 이은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2016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소개된 첫 장편 <로우>는 채식주의자였던 소녀가 성적 욕망과 카니발리즘에 눈뜨는 잔혹한 성장의 과정을 충격적으로 제시하는 호러영화였다. 자동차와의 교배, 젠더 유동성(gender fluid), 부성애의 탐색 등을 한데 뒤섞는 <티탄>의 이야기는 <로우> 못지않게 파격적이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은 알레시아(아가트 루셀)는 자동차에 특별한 애정을 느낀다. 모터쇼의 에로틱 댄서로 살아가던 그녀는 초자연적 임신을 하고, 연쇄살인을 한 뒤 남자로 위장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러다 소방관 뱅상(뱅상 랭동)을 만나는데, 뱅상은 그(녀)가 10년 전 사라진 자신의 아들이라 생각한다.
줄리아 뒤쿠르노는 “스스로는 아주 전형적인 장르영화를 만든다고 얘기하지만 사실 모든 관습을 날려버리는”(<프랑스 텔레비전>) 감독이다. 심사위원 밀렌 파르메르가 “영화제에서 장르영화는 언제나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했듯, 관습을 파괴하는 장르영화, 그것도 파격적 호러영화에 칸영화제 최고상이 돌아간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수상 직후 무대에서 눈물을 보이며 “괴물에게 자리를 내줘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영화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내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기괴함은 누군가를 공포에 떨게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가두고 서로를 분리시키는 정상성의 벽들을 밀어낼 수 있는 무기이며 힘”이라 말했다.
반골정신과 젊음이 주요 키워드
스파이크 리, 마티 디옵, 예시카 하우스너, 밀렌 파르메르, 매기 질런홀, 멜라니 로랑, 송강호,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타하르 라힘까지 올해 심사위원들의 선택에 대해선 놀랍지만 균형잡혔고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는 반응이 다수다. 특별히 수상을 하지 못해 슬퍼해야 할 작품은 없다는 것인데, 다만 심사위원상과 심사위원대상이 모두 공동 수상이었기 때문에 “모든 작품에 상을 주고 싶어 하는 ‘팬들의 학교’ 같은 면이 보였다”(<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지적이 있었다. 올해의 수상작들, 심사위원대상을 공동 수상한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히어로>와 유호 쿠오스마넨의 <6번 칸>, 감독상을 받은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 각본상을 수상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심사위원상을 공동으로 받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와 나다브 라피드의 <아헤드의 무릎>은 모두 현대적인 문법과 고유한 예술적 제스처를 취한 작품들이다.
폐막 이후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라디오 채널 <유럽1>과의 인터뷰에서 “<티탄>은 폭력적인 영화가 아니라 그저 다른 영화”이며 “올해 칸의 선택은 오늘날의 영화가 어떤 것인지 잘 설명해준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영화. 그것은 관습을 거부하고 열린 태도를 보이는 ‘젊은’ 영화, 그래서 기존의 영화와 ‘다른’ 영화를 칭하는 말일 것이다.
다수의 거장들이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반골정신과 젊음이라는 키워드에 부합한 <아네트>로 감독상을 받았다. 개막작으로 공개된 <아네트>는 레오스 카락스가 선보인 첫 영어영화인 데다 무려 장르는 코미디 뮤지컬이다. 60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독창적인 레오스 카락스의 ‘젊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게 외신의 평이다.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히어로>와 유호 쿠오스마넨의 <6번 칸>은 사이좋게 심사위원대상을 나눠 가졌다. 칸 경쟁부문에 네 번째 초대받은, 칸이 사랑하는 이란 감독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히어로>는 영화제 내내 수상권에 이름을 올린 작품이다. 도덕적 딜레마를 집요하게 다루는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장기는 이번에도 여전해 보인다. 빚을 갚지 못해 교도소에 간 라힘이 이틀간 휴가를 얻어 밖에 나왔다가 여자 친구가 발견한 돈가방 때문에 점점 복잡한 미로에 빠지는 이야기다.
<인디와이어>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이후 최고작이라 평하기도 했다. <6번 칸>은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로 2016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았던 핀란드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북극권의 고고학 발굴 현장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탄 핀란드 여성 로라가 러시아 남자 광부와 좁은 침대칸 객실을 나눠 쓰게 되면서 긴 여행의 한 자락을 공유해야 하는 상황을 따라간다. “느린 속도로 만경을 찍는 작품”(<프랑스 텔레비전>)이다.
고유의 리듬과 템포가 돋보이는 화제작들
각본상을 받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와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 나다브 라피드의 <아헤드의 무릎> 또한 고유의 리듬과 템포가 돋보이는 영화들이다. 3년 전 <아사코>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처음 초대받았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각색해 3시간짜리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완성했다. 아내를 잃은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남자와 그의 전속 운전기사로 고용되는 여성의 로드트립을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 영화와 연극의 이야기가 혼합된다. 정교한 영화적 언어로 채워진 이 작품에 단순히 각본상만 주는 건 아쉽다는 반응도 확인할 수 있었다.
<메모리아>는 <열대병>으로 칸에서 심사위원상을 받고 <엉클 분미>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처음으로 모국 태국이 아닌 남미에서 찍은 영화이며, 할리우드 배우 틸다 스윈튼과 협업한 영화다. 동생을 만나러 콜롬비아의 보고타에 도착한 제시카(틸다 스윈튼)가 어느 날 미스터리한 감각 증후군의 일종으로 수면 중 큰 폭발음을 듣게 되고, 알 수 없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곳을 방문하는 이야기다. 실제로 콜롬비아를 방문했다 남미와 사랑에 빠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여행 중 폭발성 머리 증후군(Exploding Head Syndrome)을 경험한 것이 영화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시너님즈>로 2019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이스라엘 감독 나다브 라피드는 <아헤드의 무릎>을 통해 이스라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정부로부터 검열을 당하는 영화감독이 자유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을 동시에 맞닥뜨리는 이야기로, 역시나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된 영화다. 나다브 라피드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어머니에 대한 애도이자 조국에 대한 애도”라 했다.
여우주연상은 <최악의 사람>의 레나트 라인스베에게 돌아갔다. 요아킴 트리에의 <최악의 사람>에서 라인스베는 노르웨이의 오슬로에 사는 방황하는 서른살의 줄리를 연기한다. 놀랍게도 이번 영화가 타이틀롤을 맡은 첫 번째 영화다. 영화가 공개된 뒤 외신은 일제히 ‘스타 탄생’을 외쳤다. 남우주연상은 <니트람>의 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수상했다. 저스틴 커젤의 <니트람>은 1996년 호주에서 발생한 포트 아서 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로, <쓰리 빌보드> <플로리다 프로젝트> 등으로 익숙한 미국 배우 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참혹한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를 연기했다. 비극적 결과를 향하는 외로움, 분노, 광기를 비범하게 연기했다는 평을 들었다.
많은 이야기를 남긴 채 74회 칸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올해 칸영화제는 용기 있는 영화에 힘을 실어주는 과감한 선택을 보여주었고, 이 선택이 앞으로의 칸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이 영화들을 하루빨리 국내 극장에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