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불안과 결핍을 영화 곳곳에 세팅했다
2021-12-11
글 : 조현나
사진 : 최성열
<흐르다> 김현정 감독

취업 준비생인 진영(이설)은 어머니와 가까운 반면 아버지와는 소원하다. 가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어머니가 사라진다면 이 가족은 어떻게 될까. <흐르다>는 어머니의 공백 이후로 불거진 진영과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다. 부녀 관계는 김현정 감독이 오랜 시간 염두에 둔 주제였다. 샤워를 한 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다 문득, 김현정 감독은 ‘이 상황이 부녀 이야기의 적절한 시작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흐르다>는 진영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되며 진영과 아버지의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를 암시한다.

진영은 성실한 가운데 어딘가 무기력한 인상이다. 오랜 취업 준비로 지친 기색이 드러나는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인물의 감정을 절제하는 김현정 감독의 연출 또한 영향을 미쳤다. 가령 어머니의 죽음은 감정을 가장 고조시켜 보여줄 법한 사건임에도 영화상에선 장례식과 주변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다. “진영과 가족이 슬퍼하는 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남은 식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민 끝에 장례식 장면을 생략했다.” 진영은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기 전,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버지의 공장 업무를 돕는다. 새 직원과 함께 호기롭게 사업을 확장하던 아버지는 도리어 공장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어머니의 죽음과 공장의 경영 악화. 그럼에도 진영은 캐나다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정신없이 일을 마무리한 진영이 길을 걷다 돌연 눈물을 터트리는 순간은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는다.

지역인의 소외감을 다룬 전작 <입문반>과 마찬가지로 <흐르다>에도 지역의 정서가 잘 담겨 있다. “가만 보면 진영과 같은 취업 준비생들에게 어떻게든 중심부로 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보이지 않는 축으로 작용한다.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은 지역인이라면 전부 한번쯤 해봤을 거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공장의 풍경과 같은 요소 외에도 경쟁에서 이기고 모든 일을 잘해야 한다는 불안과 결핍을 영화 곳곳에 세팅했다.”

김현정 감독이 영화계에 발을 들인 건 시나리오작가가 되고 싶어서였다. 현장을 경험하면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대구에서 워크숍에 참여했고, 몇 차례 습작을 하며 큰 규모의 작품에 대한 꿈을 키웠다. 서독제의 기획개발지원작으로 선정된 후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지원을 받아 첫 장편작 <흐르다>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셈이다. 김현정 감독은 ‘관계’라는 주제를 유심히 바라보는 연출자다. “가족이나 동료처럼 가까우면서도 쉽게 상처줄 수 있는 관계에 관심이 간다. 예전에는 생채기를 내는 상황 자체를 포착하는 데 주안점을 뒀는데 요즘은 회복이 중요한 화두다. 개인적인 삶 안에서도 고민이고, 영화를 통해서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있다. 다음 작품도 아마 그런 관계, 그리고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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