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씨네21> 한국영화 베스트 설문 결과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점들이 있었다. 홍상수 감독의 <당신얼굴 앞에서>와 <인트로덕션>이 각각 1, 2위에 올랐고 5위권 내에 이름을 올린 상업영화는 <모가디슈>가 유일하다는 점이 특히 그러했다. 이에 ‘올해의 영화 결산’ 기획 기사에 참여한 송경원, 임수연, 김소미, 조현나, 남선우 기자가 모여 설문조사 결과와 함께 한국영화계의 변화와 흐름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홍상수 감독과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부진, 극장의 존재 의미, 넷플릭스와 같은 OTT 플랫폼이 한국영화계에 미친 영향 등 네개의 질문을 중심으로 다양한 답과 고민이 오갔다.
질문1.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또다시 ‘한국영화 베스트 1위’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뒤를 이을 시네아스트는 없는 것인가.
송경원 올해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두편이 한국영화 리스트에서 1, 2위를 차지했다. 두편이 개봉된 해에 두편이 다 올라간 적은 드물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는 관객이 1만명 이하로 떨어진 상황에서도 소환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까.
남선우 일단 필자들이 그의 영화는 전부 챙겨 보고, 또 높은 점수를주 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은 매년 거의 한편 이상을 만들어내며 자신만의 문법과 세계를 설득하려는 노력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결과라 본다. 하지만 올해 주목받은 감독들, 가령 류승완과 이준익 같은 감독들이 있었는데도 홍상수 감독이 늘 상위권을 차지하는 이유는 논의해보고 싶었다.
조현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좋아서 택한 필자도 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의 영화를 택한 건 아닐까. 홍상수 감독의 뒤를 이을 도드라진 누군가가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새로운 누군가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닌가 싶다. 팬데믹때문에 영화에 대한 주목도가 낮은 해였고 올해 개봉작들을 충분히들여다보려는 시도가 부족했던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임수연 홍상수 감독은 늘 좋은 영화를 만들기 때문에 1위할 만한 작품이 아니라고 반감을 가질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한편으로 올해 홍상수 감독의 영화만큼 필자들의 이목을 끈 영화가 없었고, 홍상수의 뒤를 이어 자신만의 영화 미학을 보여주는 시네아스트로서 주목받은 사람도 없었다. 평단과 관객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작가를 주목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도 고민해야겠다. 예컨대 장우진 감독처럼 말이다. 독립영화를 보다 폭넓게 살필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현재 관객이 주목하는 건 여성감독이 연출한 여성 서사, 눈에띄는 신인배우를 배출하는 영화인데 이 두 갈래에 속하지 않는 영화는 거의 조명받지 못한다.
송경원 한동안 독립영화 진영에서 <벌새>와 <남매의 여름밤>처럼 다른 경향의 영화가 나오는 흐름이 있었는데 지난해와 올해는 그렇지않았다. 지금 순위에 오른 <겨울밤에> <휴가>도 엄밀히 말하면 지난해에 공개된 것이고, 올해는 그렇게까지 이야기할 만한 영화가 없었다. 독립영화를 포함한 예술영화 시장 전체가 가라앉은 느낌이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은 그런 한국영화계의 흐름과 별개로 자신의 길을 가는 감독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때부터 완전히 다른 방향을 잡았고, 늘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것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과의 격차가 확실히 있어 보인다.
김소미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훌륭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왜 매번 1위를 하느냐가 문제라면, 필자들이 다른 독립영화를 보지 않는 건 아닌지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늦게 보거나 안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같이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해 독립영화에서 눈에 띄는 건 영화과 졸업 작품이 데뷔작이 된 경우다. 그 영화들이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화제가 되며 개봉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이 1980년대 후반~90년대생 감독들이 어떤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떻게든 극장 개봉까진 했는데 이렇게 외면받고서도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이들조차 등을 돌릴 것인가.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그 변화의 포인트가 지난해와 올해라는 생각이 든다.
질문2. 한국의 상업영화는 어디로 갔나.
송경원 한국영화 베스트 5위 안의 상업영화로는 <모가디슈>만 이름을 올렸다. 10위로 넓히면 <자산어보>와 <승리호>가 있지만 <자산어보>는 독립영화에 가까운 결을 지녔고 대체로 반응이 얕았다. 이는 코로나19로 인한 영화시장의 침체일까, 아니면 상업영화의 침체일까.
남선우 사람들이 QR코드를 찍고서라도 극장에 가고 싶게 만든 작품이 없었던 것 같다. 집에서 OTT를 보며 충분히 스펙터클을 즐길수 있다는 것이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정가영 감독의 <연애 빠진 로맨스>나 조은지 감독의 <장르만 로맨스>같이 이야기해볼 만한 중소규모의 상업영화가 있었으나 팬데믹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조현나 관객이 영화관의 문턱을 넘기 어려운 상황이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에 가야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가 없었던 것 같다. 단순히 좋은 영화를 넘어 영화의 수 자체도 적었다. 상업영화로 한정해 이야기한다면 현재 대다수의 관객이 아이맥스와 같은 체험이나 극한의 스펙터클을 즐기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것 같다. <블랙 위도우> <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과 같은 영화가 개봉하면 관객이 ‘이런 영화는 꼭 영화관에서 봐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국내에선 그런 영화가 <모가디슈> 정도였던 게 아닐까 싶다.
김소미 사실 올해는 상업영화 수가 너무 적어서 작품의 질적인 수준이나 작품의 경향을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다. 그 작품들이 올해 나온 이유도 시장 논리에 따라 강제적으로 나온 부분이 있었던 것 같고. 어쩌면 올해 상업영화에 대한 관객의 관심이 적었던 이유는 거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명절 등 특정 시기가 되면 관객이 개봉을 기대하는 영화들의 유형이 있는데 올해는 그런 게 없었고, 일부관객은 달라진 배급 추세에 낯설게 반응하는 한국 영화시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송경원 영화시장 자체가 줄어든 건 당연한 상황인데, 외국영화와 한국영화 관객을 비교해볼 때 그 편차가 심했다. 과거에는 외국영화, 한국영화에 거의 50 대 50 비율로 관객이 들었다고 하면 올해는 80 대20 수준이었다. 영화시장의 전체 파이가 줄어든 것과 더불어 한국영화의 파이도 줄어들었다. 영화 편수로 보면 그렇게 차이나지 않는데 그중 상업영화 규모의 영화는 20편도 안되는 것 같다. 사실상 거의 없다. 흥행이 되든 안되든 일단 개봉하는 독립영화와는 큰 차이가 있다. <모가디슈>는 류승완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었다. 감독이 힘을 많이 빼고 강박도 없어졌고, 프로덕션 규모가 큰 만큼 그에 맞게 제 역할을 다하는 영화였다. 그외에는 기억나는 상업영화를 떠올리기 힘들다.
임수연 지금 상황을 보면 배급사들이 중간급 규모의 영화를 기획하고 촬영에 들어간다. 이를 보면 올해 불거진 문제들이 앞으로도 되풀이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정가영, 조은지 감독의 작품은 몇년 전이었으면 그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로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중소 규모의 상업영화는 ‘OTT에 뜨면보겠다’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다. 현재 상영 중인데도 OTT 플랫폼에서 영화를 검색하고 있으니까. 설, 추석 같은 대목에 큰 규모의 작품이 나오지 않으면 관객이 실망하고 극장에 가지 않고. 지금 만들어지는 영화들의 스타일을 봤을 때 같은 문제가 반복될 위험이 있다.
질문3. <오징어 게임> 열풍과 <듄> 아이맥스 전쟁 속에서 사람들이 극장에 가지 않는, 혹은 극장에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송경원 극장에 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갈리는 것 같다. 하나는 <듄>처럼 시각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또 하나는 <그린 나이트>처럼 영화관에서 봐야만 온전히 즐길 수 있다고 여기는 예술영화를 보기 위해서. 그외 대다수의 중저예산 영화, 아니면 드라마에 해당하는 영화들은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로 쏠리지않을까. 결국 극장에는 스크린을 필요로 하는 스펙터클한 영화와 예술영화만 남지 않을까 하는 과격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조현나 일부 10대들이 핸드폰 화면에 익숙해져서 오히려 큰 스크린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팬데믹을 차치하고서라도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는 기존의 영화 경험에 관한 조건이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다. 최근 배급사나 독립예술영화관측 이야기를 들어보면 멀티플렉스에는 아이맥스와 같은 특수관만 남고 독립예술영화관은 축소된 채 작은 영화를 찾는 관객만 맞이하게 될 거라고 예측한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란 생각이 들어 착잡했다.
임수연 젊은 관객은 2시간을 오롯이 극장에 할애하는 것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다. 평소에 1.5배속으로 보고 15초씩 스킵하는 게 습관이됐는데 영화관에선 그게 불가능하지 않나. 최근 홈시어터 시장도 점점 커지는 추세다. 집에서도 충분히 스펙터클을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미래의 관객에겐 ‘비싼 티켓 값과 내 시간을 충분히 지불할 만하다’라는 게 전제가 되어야한다. 달리 말해 그들을 극장에 오게 하기 위해선 단순히 스펙터클을선사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김소미 가성비의 망령이 극장에도 확실히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이다. 티켓 값이 많이 오른 만큼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의 재미, 스펙터클, 다른 관객과 함께 즐기는 분위기 등 복합적인 요소들을 다 충족시키길 바란다. 미래의 극장은 완벽한 스펙터클을 체험할 수 있는 프리미엄화된 공간으로 남고 그럴 필요가 없는 영화들은 OTT에서 소화하겠구나 싶다. 하지만 <승리호>처럼 극장에서 즐겨야 할 것 같은영화들이 자꾸 OTT로 가는 경험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한국영화에 있어서는 점점 프리미엄화된 공간조차 필요 없다고 생각할까봐 두렵다. 정말 <듄> 정도는 되어야 극장에 간다면, ‘이 영화만큼은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논리로는 한국영화가 관객을 끌어들이기 어려운 미래도 가능하다.
남선우 정리하면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와 같은 최대치의 오락적경험을 좇거나 <그린 라이트> <퍼스트 카우>처럼 예술적 경험을 원하는 관객이 극장에 간다는 건데, 둘은 다른 것 같지만 결국 본인이 추구하는 자극을 따라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다보니 그 자극의 범위에 들지 못하는 중간급 영화들이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거다. 반면 시리즈는 정주행하면 6~10시간을 봐야 하는데 그건 보고, 영화는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똑같이 시간을 들인다고 치더라도 본인이 통제 가능하기 때문인가 싶은데, 또 그렇게 단순하게 볼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송경원 2000년대 멀티플렉스 위주의 극장이 ‘간 김에 영화 본다’는 인식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찾아가야 하는 극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걸 제공할 수 있는 곳인지 극장도, 관객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상황이다. 작은 화면, 다른 매체의 형식에 익숙해지는 상황이 늘고 그런 경험이 5~10년간 쌓이면 우리가 아는 영화적이라는 문법 자체가 바뀔 거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질문 4. 넷플릭스는 한국영화계에 무엇을 남겼는가.
조현나 넷플릭스가 신작을 바로바로 공개하는 만큼 작품도 현실을 발빠르게 반영하고 있어서, 그에 비해 한국영화는 느리게 간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때문에 한국영화에 대한 기대도 점점 줄어들고. 한국영화계의 제작자뿐만 아니라 마케팅, 배급사 인력들이 OTT로 많이 넘어간 데에는 속도의 차이랄까, 상대적으로 순환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송경원 제작사는 이미 인력이 다 넘어갔고, 거기서 자본을 받고 그 포맷에 맞춰 영상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영화계에서 넘어간 인력이 유지되면서 결과물을 낼 것인가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영화와 시리즈의 수익 배분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영화판에 익숙해진 플레이어들과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또 늘어나는 OTT 서비스를 사람들이 전부 구독하기 버거워한다. 몇몇만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고 플레이어들도, OTT 시장도 한번 전체적인 조정이 있을 것 같다. 한국영화에 한정해서 본다면 플레이어들이 전부 OTT로 이동한 뒤에 영화계가 다시 재편되면 이게 제대로 굴러갈까, 유지가 될까 싶다. 지금은 OTT업계가 완전히 기회의 땅처럼 여겨지지만 여러모로 굉장히 위험한 상황으로 보인다.
임수연 OTT에서 잘 먹히는 작품의 스타일과 스토리텔링이 있다. 넷플릭스도 장르성이 강하고 어떤 뾰족한 포인트가 있는 작품을 선호한다는 건 다들 동의하는 포인트다. 최근 시나리오 피칭 행사를 취재하러 갔을 때 다들 영화가 아니라 시리즈, 웹툰, 영화로 확장해 세계관을 넓힐 수 있는 IP를 피칭하고 있더라. 그런 식으로 어떤 유행의 흐름이 생기면 향후 몇년간 그 결과물들을 보게 될 것이다. OTT로 모든 게 완전히 넘어간다면 과거 할리우드 스튜디오처럼 시스템이 새롭게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국영화계에 아직 변수가 많다고 생각해서, 전부 넷플릭스로 쏠린다고 납작하게 해석하기는 이른 것 같다. 더 역동적인 시장으로 바뀌어가지 않을까.
남선우 한편으로 넷플릭스는 <맹크> <파워 오브 도그> 등을 제작하면서 할리우드와 접점을 만들어가는데, 한국영화계에서는 그런 흐름이 생길 수 있을까 싶다. <옥자>라는 예외적인 작품도 있었지만 넷플릭스 로고를 달고 나오는 봉준호 감독,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한국영화 시장에서 가능할까.
김소미 지금 한국만큼 영화계 주요 플레이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시리즈물을 만드는 상황도 드물다. 한국영화가 발전하고 존속하려면 영화를 믿는 창작자들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상황은 영화 창작자들로 하여금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스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게 만드는 것 같다. 신인감독들에게조차 그런 정서가 공유되고 있고. 그러다보면 지금 넷플릭스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들, 혹은 웹툰과 숏폼 스타일의 자극적인 스토리에 매몰된 가능성도있다.
송경원 우리나라는 창작자도 그렇고 시장이 정말 빠르게 순환한다. 장점이기도 하지만, 한국영화에 한정해 이야기하자면 내부 기둥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한국 콘텐츠가 각광받고 있는데 그렇게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영화계가 폐허가 되어있을 것 같다. 다들 만드는 방법을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밀물과 썰물이 몇 차례 급격하게 다녀가면 독립영화보다도 상업영화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정말 빠르게 전환되고 있고 그만큼 미래가 불안하다는 게 전반적인 올해의 평이다. 개봉을 미뤄온 상업영화들이 내년에 꽤 쏟아져나올 텐데, 내년이 한국영화계의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