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촬영 현장에서 스틸 작가의 역할은 정확하게 무얼 의미할까. 촬영 현장을 담은 한장의 스틸컷에는 다양한 현장 상황을 기록하는 의미도 담겨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비하인드 컷이라 부르는 사진이 그에 해당한다. 그런데 관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현장의 비하인드를 보여줄 목적의 사진만 있을까. 지금은 필름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며 한편의 영화 촬영 현장을 담은 사진의 양이 실로 어마어마해졌다. 몇 테라바이트를 훌쩍 넘는 수만장의 사진을 통해 영화를 기억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을 보면 그 의미를 곱씹게 될 것 같다. <아가씨>의 촬영 현장을 누비며 현장 곳곳과 배우들의 면면을 모두 찍은 이재혁 스틸 작가는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 스틸 작가로 시작해 20년 넘게 한국 영화 현장을 촬영해온 베테랑 작가다. 국내뿐만 아니라 <이퀄스><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등 해외 영화에도 스틸 작가로 참여한 이력이 있다. 그를 만나 스틸 작가의 역할에서부터 <아가씨> 현장에 있었던 다양한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 스틸 작가는 전체 영화 제작 과정에서 어떤 일을 주로 하나.
= 선배들에게 듣기로는 과거에는 스틸 작가들이 현장에서 찍은 사진으로 앨범을 만들어 지방 극장주에게 돌렸다고 하더라. 프린트가 귀하던 시절에는 매번 상영을 할 수 없었으니 사진 앨범을 들고 전국 극장을 싹 돌았던 거다. 그 앨범을 보고 영화를 걸지 말지를 결정했지. 처음 일하던 시기에는 극장 스틸컷을 10장씩 묶어 로비 벽에 포스터와 함께 붙여놨다. 그 사진들을 찍었고, <로드쇼> <스크린> 등 영화 잡지에 제공하는 사진도 찍었다.
- 스틸 작가는 어떤 제작 부서에 속해 있나.
= 내가 일을 시작하던 1990년대에는 제작사와 계약했다. 현장 스탭으로 순제작비에 포함된 인력이었으나 이제는 마케팅 비용쪽으로 빠지면서 우리의 인건비가 P&A 비용에 속하게 되었다. 할리우드나 해외에서도 스틸 작가는 제작 부서에 속해 있다. 한국만 상황이 다르고 OTT쪽은 또 다르다고 들었다. 스틸 작가들은 어떤 단체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데, 과거에는 스틸작가협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10년 넘게 어시스턴트 활동을 했고, 사진이 귀하던 때라 스틸 작가들이 찍은 사진으로 배우 개개인의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인건비도 제대로 못받던 시기였다. 나도 3편 정도 할 때까지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 촬영 들어가기에 앞서 어떤 사전 준비를 하는지 궁금하다.
= 보통 시나리오를 읽고 그에 맞는 영감을 얻고자 노력한다. <아가씨> 때는 시나리오를 읽고 아내와 해외여행을 가게 됐다. 여행지 파리에서 피카소의 그림을 봤는데 파란색이 굉장히 강렬하더라. 박찬욱 감독의 전작에서도 파란색이 많이 쓰였다.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일례로 <기생충>을 찍을 때는 곰팡이 색깔, 녹색 계열로 찍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현장에서 찍어야 될 사진들의 톤 앤드 매너를 마음속에 정하고 현장에 임하는 것이 작업하는 데 수월하다. 프로덕션 노트에 실을 목적의 현장 사진도 꼭 찍는 편이다.
- 카메라의 선택 기준은 무엇인가, 혹은 선호하는 기종이 있나.
= 보통은 기동성이 좋은 카메라를 쓴다. 무거운 DSLR 카메라의 셔터 소리를 감추기 위해 카메라 보디를 감싸는 장비까지 더해지니 장비 무게가 상당하다. 그래서 스틸 작가들은 반나절 촬영하고 나면 젓가락 들 힘도 없어진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촬영 도중에도 찍고 싶어서 그런 무리를 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전자 셔터가 탑재돼 찍을 때 소리가 나지 않는 미러리스 카메라를 많이 이용한다. 스틸 작가 대부분 미러리스 카메라의 선두주자인 소니 카메라를 많이 쓴다. 개인적으로는 <아가씨> 이후에 <1987> 촬영장을 찍을 때 처음 소니의 A9 카메라를 썼다. 신세계가 열리더라.
- 촬영 장비는 개인이 직접 구매하나.
= 개인이 구매하고 인건비에 포함된다. 작품마다 카메라 구매 비용이 인건비에 포함되니 손해를 많이 봤다. 카메라를 너무 자주 바꾸기 때문에 손실이 굉장히 크다. <기생충>을 촬영한 카메라가 1억만 화소로 찍을 수 있는 페이즈원인데 가격이 1억원이다. 그런 카메라는 너무 고가라서 대여를 하기도 한다.
- <아가씨>의 촬영 현장에서 찍은 사진과 관련해서 박찬욱 감독과 직접 나눈 대화가 <아가씨의 순간들>에 수록된다. 거기서 스틸 작가는 원하는 사진을 찍어주는 역할에 가깝다는 뜻으로 “공을 던지면 물어오는 사람”이 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어떤 현장 스틸이 좋은 사진인가.
= 내 목표는 영화의 한 장면을 담아내는 것이다. 배우가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걸 인식하면 혹은 불편해하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최대한 현장에서 스탭들 틈에 몸을 숨기고 찍는다. 또 배우가 연기할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촬영장에선 대부분 무채색의 옷을 입는다. 옷장을 열면 전부 검은색 계열의 옷만 있다. 같은 순간을 찍더라도 다양한 앵글에서 그 순간을 담기 위해 앵글을 계속 바꿔가면서 찍는다. 촬영 현장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조용히 찍는 노하우는 매 순간 집중 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다.
- 배우가 연기에 집중하는 걸 방해하지 않는 한편, 촬영 도중에 스탭들 사이에 몸을 숨겨야 하니 고충이 많을 것 같다.
= 박찬욱 감독이 해외에서 작업하고 와서 현장 분위기를 조금 바꿔놓은 게 있는데, 감독님 현장에서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동안 모든 스탭이 자리에 앉아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 <이퀄스>의 촬영 현장을 찍을 때였는데 배우가 연기를 시작하면 모든 스탭이 등을 돌리더라. 배우와 눈을 마주치게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오래 작업하다 보니 현장에서 몸을 숨기는 노하우를 많이 쌓았다.
- 이번 사진집에 실린 사진 중에 연속촬영으로 찍은 사진들이 있는데 히데 코와 숙희 사이의 감정이 격해지는 장면을 골라 실었다.
= 연속촬영으로 사진을 찍을 때 이점이 있다. 영화 촬영 중에는 알 수없는, 마케팅 단계에서 영화의 홍보 방향을 수정해야 할 경우, 사진 한컷에 실린 배우의 표정만으로도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연속촬영으로 다양한 순간의 감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남겨야 한다. 사진집에 실린 두 장면을 연속촬영 컷으로 실은 이유는 두 사람의 동작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편, 현장에서 보고 느낀 배우들의 감정 변화를 전해주고 싶어서였다.
필모그래피
1998 <아름다운 시절>
1999 <내 마음의 풍금> <신장개업>
2000 <리베라 메>
2001 <꽃섬>
2002 <연애소설>
2006 <타짜>
2009 <작전>
2010 <악마를 보았다>
2011 <고지전> <오직 그대만>
2013 <설국열차> <관상>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
2014 <해무> <나의 독재자>
2015 <암살> <이퀄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2016 <아가씨>
2017 <옥자> <1987>
2018 <국가부도의 날>
2019 <기생충> <엔딩스, 비기닝스>
2021 <서복>
2022 <프레스 플레이> <외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