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미얀마의 여객선 터미널, 영국인 에드워드가 7년 만에 만나는 약혼녀 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정장을 차려입고 꽃다발을 품에 안고서, 그는 약혼자를 환영할 생각으로 그곳에 섰다. 하지만 저 멀리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며 생각이 바뀐다. 그녀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두려워진다. 돌연 에드워드는 도망치고 싶어진다.
손에 쥔 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변명의 편지를 쓰고, 그는 싱가포르행 배에 오른다. 이후 태국과 베트남, 필리핀, 일본, 중국 등지를 거치는 그의 여행기가 진행된다. 몰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는 계속 이동한다. 하지만 몰리는 상상 이상으로 고집이 세다. 기필코 그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녀는 치열하게 그를 뒤쫓는다.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갈 기세이다.
언뜻 로맨틱코미디에 가까운 줄거리에 의존해서 극장을 찾는다면, 분명 당황하게 될 것이다. 영화 <그랜드 투어>는 시작되자마자 모든 고정관념을 해체하며 진행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은 20세기 초반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풍 화면이 현재의 시점을 반영한다. 즉, 과거와 현재가 겹쳐진다. 그리고 3인칭 내레이터 목소리가 언어를 변경해서 등장한다. 음성과 음악 사이에 소음이 삽입되고, 아이리스 화면이나 슈퍼임포즈 같은 초기 영화의 기술들이 나타난다. 시각적으로 시간성이 깨어지고, 공간적으로 고전성이 깨어진다. 마치 자유연상을 하듯 자유롭게, 영화는 시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요컨대 매우 낭만적이지만 완전히 서사가 사라져버린 한편의 영화가 완성된다.
‘현재의 사라짐’보다 두려운 것
식민지 유령을 만나러 아시아를 투어하는 인물, 이 영화 <그랜드 투어>의 이야기는 신화적이든 개인적이든 무언가의 종말을 바라보고 있다. 일단 주인공들은 각각 하나의 서로 다른 재주를 지닌다. 먼저 에드워드는 그림을 잘 그린다. 들르는 장소마다 그림을 그려서, 그는 몰리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한편 몰리는 잘 웃는다. 입술을 꾹 닫고 파열음을 내면서 거친 소리를 빚는 것은 그녀의 특기나 다름없다. 누군가의 귀에는 거슬릴 수도 있지만, 이러한 그녀의 능력은 에너지를 뿜는다. 에드워드의 이미지성과 몰리의 사운드적 능력, 이들 커플은 한마디로 시청각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적이다. 어쩌면 주인공 에드워드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현재의 사라짐’이 아니라 ‘예술의 종말’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제국주의가 성행했다. 그리고 무성영화가 활개치던 시대였다. 당시 무성영화는 불협화음을 드러내는 음침한 세계관을 보여줬다. 1910년대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들, 그리고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영화들, 이 영화들이 지닌 콘트라스트는 마치 에드워드의 음울함만큼이나 깊었다. 이와 대치되는 미국식 유성영화의 가벼움, 서로 다른 장기를 가진 예술의 흐름이 본인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래서 당대 흑백영화는 더 날카롭게 자신을 다듬었다. 그리고 무성영화 시대의 극장은 조용하지 않았다. 영화관은 시끄러웠다. 악단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실제 소리가 공간에서 음악과 뒤섞여서 부딪혔다. 간혹 외국영화가 소개될 때에는 새로운 자막이 필름의 한가운데 편집되는 일도 있었다. 마치 <그랜드 투어>의 시작부처럼, 조금 복잡하고 시각적인 이야기가 전시되었다.
이 영화 시작부의 놀이공원 장면을 되돌아본다. 어쩌면 수동적 율동의 시대를 사는 인물들에게 기계식 테크닉의 도래야말로 불필요한 무언가이다. 망각되어야 할 유산이다. 강가에 서서 노래하기 위해 노래방 기계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들, 집 안에서 자동 LP판을 재생하는 사람들, 에드워드는 이들과 마주치지 않는다. 심지어 왕궁에 도착해서도, 그는 눈을 감고 도망친다. 그 대신 <그랜트 투어>는 아날로그 문명의 번성함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대형 관람차를 움직이기 위해 놀이공원 운영자들은 끊임없이 발을 굴러야 했다. 그리고 인형술사들은 어둠 속에서 팔을 휘저어야 했다. 그들은 그것만이 예술이라 믿었다. 스펙터클은 아날로그로부터 도출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 초반부의 사운드가 엑스트라-디에제틱한 것은 메타-시네마를 위해 기획된 것일 수도 있다. 대사를 설명하기 위해 자막이 이용되었고, 배경 영화음악은 순전히 영화 전체의 감정을 주도하기 위해 등장했다. 주변부 소음을 무시하고 노래를 부르는 행위, 그것은 마치 1920년대 흑백 영화관의 풍경처럼 보인다.
이어지는 2부, 역시 몰리의 선택은 에드워드와 정반대이다. 사운드 엔지니어, 혹은 아름다운 목소리의 배우로 대체될 수 있는 그녀의 등장은 새로운 청혼자로 인해 더욱 활력을 얻는다. 메콩강가에 살고 있는 부유한 샌더스, 그에게서는 가축 냄새가 난다. 그는 긴 여행에 지쳐 쓰러진 몰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몰리는 그의 마음에 응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그의 집사나 다름없는 응옥을 선택한다. 응옥, 프랑스어로 대사를 말하는 그녀는 이 영화의 주제에 근접해 있다. 그녀의 곁에는 항상 비눗방울이 주기적으로 피어오르고, 영혼의 예언이 수집된다. 몰리는 응옥에게 고향에 대해 묻는다. 잠시 수다가 이어진다. 그리고 영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디에제틱하게, 길어진 대사를 말하고 그만큼 긴 숏을 보여주며, 또한 배우들의 얼굴을 더 높은 확률로 사운드와 매치시킨다. “한명만 사랑하면 이기적이죠”라고 말하는 응옥의 말에 반응하며 몰리는 치유받는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영성 혹은 종교적인 정신, 아마도 미겔 고메스 감독의 이 영화는 영화의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영화 속 모든 캐릭터들이 여행에서 죽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감동과 마주한다. 에드워드와 사공, 그리고 심지어 신의 사제마저 목숨을 잃지만 몰리와 응옥은 끝내 살아남는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안개가 낀 대나무 숲에 도착한다. 언젠가 에드워드가 꿈처럼 목격했던 그 판다들을, 그녀들은 직접 다시 한번 만난다. <그랜드 투어>의 이 후반부 장면은 멜랑콜리하다. 누군가 이 영화를 보고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단언하건대 이 목격담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사랑이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살아간다. 새로운 예술을 향해 움직인다. 코로나19를 보내고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영화를 떠올린다. 영화 속 점성술사 바동에 따르면, 몰리에게는 곧 새로운 파트너가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되살아난다. 그것이 화면의 바깥이든, 기계적인 배경에서이든, 아무튼 예술은 지속될 것이다. 이 결말에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사실은 예술의 영속성이다. 응옥과 함께, 몰리는 노래 듣기를 이어나갈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지속적으로, 그녀들은 시네마를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