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영화 연극 학교를 졸업한 이후 미겔 고메스 감독은 영화평론가로서 활동하다 데뷔작 <네게 마땅한 얼굴>을 발표하며 영화감독으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천일야화> 3부작을 개별 작품으로 계산한다면 첫 장편을 발표한 2004년 이후 20여년간 그는 8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시공간과 플롯의 틀에 갇히지 않고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미겔 고메스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의 다채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는 필모그래피를 소개한다.
<타부> 2012
노년의 오로라(로라 소베랄)는 자신을 돌봐주는 산타(이사벨 카르도주)와 연금으로 검소하게 살아간다. 타지에 있는 딸과는 연락이 잘 닿지 않고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오로라의 유일한 위안이다. 그래서인지 위독한 오로라가 죽음을 앞두고 떠올린 이는 가족이 아닌 벤투라(헨리케 에스피리토 산토)라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오로라와 산타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돕던 이웃 필라르(테레사 마드루가)는 가까스로 벤투라를 찾아 병원으로 향하지만 오로라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벤투라는 1960년대 포르투갈령이었던 아프리카에서 과거 자신이 오로라와 보낸 시간을 들려준다. <타부>의 제목은 F. M. 무르나우 감독의 동명 영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영화는 프롤로그와 1부 ‘잃어버린 낙원’, 2부 ‘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부녀인 오로라에게 벤투라와의 불륜은 스스로 끝없이 정당화해야만 유지 가능한 관계였다. 둘의 사랑이 낭만적으로 묘사될지언정 불안의 정서를 근간에 둘 수밖에 없던 것처럼, <타부>에서 ‘낙원’으로 지칭된 아프리카는 안온한 공간으로 비쳐지나 착취 구조가 뿌리 깊게 자리한 식민지로서 그 비참한 현실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제6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인 알프레드 바우어상,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 수상작이다.
<천일야화> 3부작 2015
살기 위해 밤마다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던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 왕비와 해당 고전의 구조를 가져온 작품이다. 2012년, 포르투갈의 금융위기로 인해 신작 제작이 무산된 미겔 고메스 감독은 당시 포르투갈이 맞이한 정경계의 위기를 영화에 그대로 반영했다. 중동의 고전과 마찬가지로 <천일야화> 3부작에는 개별 스토리들이 병렬식으로 나열되며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구조를 띤다. 3부작의 문을 여는 <천일야화 1부: 불안해하는 자>는 경제 위기를 초래한 정치인들에 관한 풍자, 고난을 버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려준다. <천일야화 2부: 비탄에 빠진 자>에선 현실을 기반으로 빈곤한 시기를 통과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표현했다. 제목과 마찬가지로 3부작 중 가장 음울한 정서가 깔려 있다. 반면 <천일야화 3부: 마법에 걸린 자>는 가장 희망차다. 셰에라자드 왕비는 아버지와 재회해 자신이 결국 왕의 손에 생을 마감할 것이라며 두려워하지만 아버지는 딸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다. 이는 극의 후반으로 갈수록 공동체의 회복과 연대라는 주제로 나아간다. 미겔 고메스 감독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 다큐멘터리와 픽션, 과거와 현재, 풍자와 은유를 자유롭게 뒤섞으면서도 블랙코미디와 비판의 목소리가 더 높은 것이 특징이다. 제68회 칸영화제 초청작.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 2021
‘8월’(august)의 철자를 뒤집어 제목을 지은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셧다운이 시행되고 모두가 고립됐을 시기에 제작됐다. “아무도 영화를 찍지 않기에 우리라도 만들어보려 했다”는 미겔 고메스는 재난에 굴하지 않고 최소한의 조건으로 영화를 촬영하며 이러한 제약 자체를 극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감독, 스태프, 배우 등 모든 제작진이 코로나19 PCR 검사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 한집에 모여 리허설을 하고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그대로 담겼다. 특징은 스토리가 역순으로 진행된다는 것인데 자연스러운 편집 덕에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제작진이 머무는 집은 울창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 안에선 사람들의 삶이 전과 다름없어 보인다. 어쩌면 영화감독으로서의 일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미겔 고메스 감독이 부인 모린 파젠데이로와 공동으로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친애하는 8월> 2008
미겔 고메스가 연출하려던 공포영화가 제대로 투자를 받지 못해 무산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도리어 <친애하는 8월>의 시작점이 됐다. <친애하는 8월>은 한 감독이 스태프들과 <빨강 망토>를 원작으로 한 공포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한 마을을 방문하며 시작한다.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려 했지만 촬영은 지연되고, 감독의 관심은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채집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실제로 미겔 고메스 감독은 공포영화 기획이 수포로 돌아간 뒤 16mm 카메라를 들고 동료들과 무작정 포르투갈의 산골 마을 아르가닐로 향했다. 그곳에서 미겔 고메스는 8월 여름의 풍경들, 밴드 공연과 야영, 불꽃놀이 등을 빠짐없이 기록한 뒤 1년 후 다시 아르가닐을 찾아 소녀 가수 타냐와 기타리스트 헬더의 청춘 멜로라는 픽션을 촬영했다. 다큐멘터리처럼 시작해 유려하게 청춘 로맨스로 이어지는 <친애하는 8월>은 주민들의 삶과 두 청춘의 첫사랑이 현실적이면서도 애틋하게 묘사됐다.
<네게 마땅한 얼굴> 2004
“서른까지의 얼굴은 신이 준 것이지만, 그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의미심장한 대사와 함께 시작하는 <네게 마땅한 얼굴>은 미겔 고메스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타부> <천일야화> 3부작, <그랜드 투어> 등 그의 근작들로 이어지는 실험적 시도와 풍자, 유머의 자취를 체감할 수 있는 그의 데뷔작이다. 30살 생일을 맞이한 교사 프란치스코는 학생들이 준비한 <백설공주> 연극에 참여해야 하지만 영 내키지 않는다. 아프다는 핑계로 일찌감치 빠져나와 잠자리에 들었는데 실제로 프란치스코는 홍역에 걸리고, 이때부터 극은 몽환적인 분위기로 흘러간다. 뮤지컬과 연극, 동화의 형식을 오가며 영화는 유년기의 상처, 자아 정체성, 성숙과 미성숙 사이의 경계 등 프란치스코의가 겪는 내면의 갈등을 그린다.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유연성과 창작자로서 미겔 고메스가 가진 지향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