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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관광객의 영화, <그랜드 투어>
한 눈에 보는 AI 요약
미겔 고메스 감독의 <그랜드 투어>는 근대적 식민주의와 영화적 이미지를 결합한 '관광객의 영화'로, 시공간의 연속성을 파괴하며 파편화된 이미지를 제시한다. 영화는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혼합하며, 관광객의 시선과 이동을 통해 내러티브의 인과성을 흐트러뜨린다. 또한, 불확정적인 몽타주 기법을 활용해 장면 간의 연결을 모호하게 만들며, 관광객의 이동성과 시각적 경험을 강조한다.
  1. 근대, 영화, 관광객
    1. <그랜드 투어>는 영화가 발명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근대적 식민주의와 영화적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
    2. 두 개의 여행 서사를 통해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교차하며 관광객의 시선을 재현
  2. 관광객의 시선과 이동
    1. 영화 속 관광객은 특정한 목적 없이 이동하며, 도망과 추적의 서사를 넘어서 산만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
    2. 수평적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특정 장소에 정박하지 않는 관광객의 시선을 강조
  3. 전염의 몽타주
    1.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개념을 차용해,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세계의 단면들이 연속적으로 교차
    2. 픽션과 다큐멘터리,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며 불확정적인 이미지와 내레이션을 통해 모호한 관계 형성
  4. 이동 수단과 탑승객
    1. 영화는 특정한 목적지를 향하지 않으며, 관객을 관광객처럼 이동하는 존재로 설정
    2. 고다르의 비유를 차용해, 영화는 고정된 장소가 아닌 이동하는 수단으로 기능

19세기 후반 유럽에선 카이저파노라마(Kaiser panorama)라는 기계장치가 발명되었다. 이 새로운 시각 매체는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원통 주변에 둘러앉아 자기 앞에 뚫려 있는 투명한 유리 입체경을 통해 사진 이미지를 관람하는 장치다. 관람객들은 각자의 관람 기기에 동전을 넣고 정해진 시간마다 연속적으로 전환되는 이미지의 연쇄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조너선 크래리의 관측에 따르면 카이저파노라마는 “로마에 있는 교황의 아파트 실내에서 중국의 만리장성으로, 다시 이탈리아의 알프스로 120초 간격을 두고 이동”하는 체험을 제공한다.

이국의 낯선 풍경을 볼거리로 삼는 카이저파노라마의 시각 체험은 시공간적인 연속성과 계열의 논리를 파괴한다. 관람자들은 나이아가라폭포,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자들, 런던 거리의 일상 사진을 파노라마처럼 연달아 보며 파편화된 이미지를 수용한다. 연속된 사진 이미지는 하나의 일관된 세계를 파괴하면서 서로 다른 시공간의 단면으로 채워진 일시적이고 복합적인 세계를 구획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지각을 닮은 이 경험 위에서 카메라가 포착한 사진적 이미지, 근대의 식민주의, 그리고 여러 가지 볼거리를 연속적으로 조망하는 관광객의 파노라마적 시선이 혼합된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의 철학적 개념을 제시하면서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근대’를 몸에 걸치는 행위의 일환”이라는 말을 인용한다. 그의 말을 풀어 쓴다면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근대의 시각과 기계장치를 흡수하는 행위다. 다시 말해 영화적 지각을 체화하는 행위다. 그것은 우리의 통합적인 시각을 해체한다.

근대, 영화, 관광객

미겔 고메스 감독의 <그랜드 투어>는 영화가 발명되기 전부터 특별한 관계로 결부되어 있던 근대적 식민주의, 영화적 이미지,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연달아 이미지를 관측하는 관람자의 시선을 다시 결합한 21세기의 ‘관광객의 영화’다. 이 영화엔 두 가지 여행이 있다. 하나는 미얀마에 파견된 영국의 공무원 에드워드가 약혼녀인 몰리를 피해 도망치는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에드워드를 뒤쫓는 몰리의 여행이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 서사에 한정된 진술이다.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가 가리키는 한 가지 여행은 20세기 커플의 발자취를 뒤쫓는 인공적인 픽션의 여행이고, 다른 하나의 여행은 현재 시점에서 수많은 아시아 국가의 풍속을 촬영한 다큐멘터리의 여행이다. 하나는 도망과 추적이라는 내러티브의질서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행동의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맥락에서 삽입된 것인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불규칙한 단면들의 여행이다. 그 단면들에는 인형극과 오페라 무대, 유람선과 기차와 오토바이, 이름 없는 엑스트라들이 부르는 노래와 에드워드가 그리는 자화상, 자꾸만 달아나는 동물과 반복해서 잠드는 인간들이 적혀 있다.

고메스는 “내게 픽션의 기본적인 원칙은 서로 다른 언어와 규칙을 결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편의 영화에 담긴 이처럼 다층적인 관광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스튜디오 촬영과 로케이션 촬영,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진행된 원거리 화상 촬영을 뒤섞는다. <그랜드 투어>는 각자 다른 환경에서 생겨난 이미지와 사운드를 낯설게 교차해 화면의 위상을 구분 짓는 근거를 흐트러트린다. 이것은 영화를 역동적이고 잠정적인 상태로 간주하는 표류 중인 그림엽서다. 미겔 고메스는 후렴구처럼 자신의 모든 영화는 <오즈의 마법사>의 리메이크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고메스가 꿈꾸는 도로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관광객의 동선을 따라 끝없이 장소를 이동하고 그렇게 흩어진 장면들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다.

영화 속의 관광객은 고메스가 설정한 특수한 좌표에 놓여 있다. 에드워드와 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도망치고 뒤쫓는 충동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들의 여행이 전적으로 도망과 추적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동선은 관광객의 시각이 전제하는 산만한 눈짓과 일탈적인 움직임에 노출되어 있다. 이 영화는 차라리 도망과 추격이라는 여정의 목적과 관광객적인 여행의 형식 사이에서 경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반부의 한 장면에서 에드워드는 가면을 쓰고 이동하는 일본 승려들의 행렬에 얼굴을 가리고 동참한다. 그는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낯선 행렬에서 평온한 안식을 느낀다. 그가 탑승한 열차가 느닷없이 전복되는 것처럼, 관광객은 단 하나뿐인 규칙에 맞춰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곳으로 향한다. 다른 장소로 침입해 다른 규칙을 수행하고 다른 것들을 바라본다.

관광객(Traveller)의 숏

관광객(Traveller)의 숏은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로 끝없이 이어진다. 바라보는 대상에 직접 관여하거나 심층에 도달하는 대신 유람선이나 기차에 탑승해 수평적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지켜보거나 소형 택시나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한한 공간으로 이어진 파노라마의 한 단면에 있는 관광객은 특정한 장소에 정박할 수 없다. 그들은 눈앞에 주어진 세계의 외양에 집중하면서 그전까지 인식하고 있던 세계의 단면을 순식간에 잊어버린다. 에드워드와 몰리는 순간마다 외부에서 다가오는 생경한 자극에 반응하는데, 직전 장면에서 주어진 자극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샌더스와 춤을 추던 몰리는 문득 주변을 돌아보며 말한다. “다들 어디로 갔죠?” 영화는 관광객들의 주변에서 잠시 나타나고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향한다. 미얀마에서 출발해 싱가포르, 방콕, 사이공, 일본과 중국을 가로지르는 <그랜드 투어>의 여정은 내러티브의 인과율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러티브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는 탈출구를 찾을 뿐이다.

몰리를 피해 양쯔강 상류행 배에 탑승한 에드워드를 비추는 대목에서 영화의 내레이션은 난데없이 배 안에서 마작을 즐기는 중국인 가족을 묘사한다. “배에서 중국인 가족이 마작을 즐기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규칙을 알 듯해서 노인의 자리에서 엉망으로 게임을 했다. 노인은 웃었다.” 이 내레이션이 장면에 입혀지는 동안 카메라는 어느 노인이 담배를 피우며 무표정으로 마작을 하는 모습을 비춘다. 화면에는 에드워드는 없고, 노인은 웃지도 않는다. 노인과 함께 마작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의 가족인지도, 그들이 중국인인지도 확증할 수 없다. 화면의 노인이 에드워드와 같은 허구적 세계에 속하는 존재인지, 연출자의 통제 바깥에서 카메라가 포착한 현실 속의 피사체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화면과 내레이션 모두 노인과 마작을 공유하고 지시한다. 단지 그것으로 인해 이 장면은 해결되지 않는 모호함으로 흔들린다.

이 장면은 <그랜드 투어> 속의 이미지와 내레이션이 놓여 있는 영역을 미묘하게 연결 지으면서 동시에 떨어뜨려놓는다. 내레이션의 목소리가 설명하는 상황과 화면 속의 상황은 언뜻 유사한 요소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명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그랜드 투어>라는 영화 전체에 걸쳐 있는 불확정적인 증상이다. 픽션으로 촬영된 장면과 다큐멘터리처럼 포착된 장면, 20세기의 과거와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두 가지 시제, 인물의 정념을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화면 속 인물의 행위, 그리고 결국 에드워드의 여정과 몰리의 여정 사이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물리적 격차가 존재하는 것일까? 두 세계는 서로 부딪칠 만큼 가까이 있으면서도 끝내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염의 몽타주

<그랜드 투어>에서 미겔 고메스의 관광객들이 수행하는 것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결코 연결될 수 없는 세계의 단면들을 연속적으로 지나치는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영화를 두고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영화 속의 모든 요소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분리 불가능한 관계에 존재한다는 “전염의 몽타주”를 증언하는 자들이다. 디디 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영화에서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상을 전염의 몽타주라 부른다. <그랜드 투어>에서 중국의 숲속에서 잠든 에드워드의 머리맡엔 뜬금없이 불상이 놓여 있다. 그것은 중국에 도착한 몰리가 목격하는 거대한 불상으로 뒤늦게 되돌아온다. 이 순간에 인물과 세계는 어긋난 시제로 서로에게 전염되고 만다.

미겔 고메스는 <그랜드 투어>의 토대를 이루는 두 가지 참조 대상으로 고전기 할리우드의 스크루볼코미디와 아다치 마사오의 <약칭: 연쇄살인마>로 대표되는 60년대 일본의 풍경영화 이론을 제시한다. 생각지 못한 조합이다. 고메스는 스크루볼코미디의 소란스러운 활력과 유희, 풍경영화의 이완된 공백과 침묵을 혼란스럽게 배열한다. 이 배열은 장면과 다른 장면이 접속되고 연결되는 논리에 혼선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랜드 투어>는 연인들의 활력으로 가득한 스크루볼코미디에 속하지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풍경의 잠재력을 이미지로 환기하는 풍경영화에 속하지도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는 관광객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관광객은 연인들이 주고받는 스크루볼코미디의 활력을, 인물의 궤적과 침묵하는 풍경이 느슨하게 접속되는 풍경영화의 엄습하는 감각을 그저 지나칠 뿐이다. <그랜드 투어>는 만나지 않는 커플의 스크루볼코미디이며 인물과 풍경의 느슨한 접촉면조차 파괴된 풍경영화다.

몰리는 에드워드가 보낸 편지를 읽거나 그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린다. 이는 1940년대 캐서린 헵번이 출연한 스크루볼코미디에서 빌려온 특유의 제스처이지만, <그랜드 투어>에선 다른 의미를 지닌다. 몰리는 멀리 떨어진 에드워드의 세계가 가까이 다가와 관광을 중단시키고 연인들의 결합이라는 목적을 환기하려고 할 때마다 그 연결을 해체하는 몸짓으로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린다. 웃음은 커플의 만남을 영원히 유예하는 장치이자 관광객의 이동을 영원히 끝내지 않는 제스처로 재활성화된다.

이동 수단과 탑승객

장뤼크 고다르는 조너선 로젠봄과의 대화에서 독특한 비유로 자신을 빗댄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역이나 터미널이라고 즐겨 생각한다. 기차나 공항들 사이를 오가는 비행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자신을 공항이 아니라 비행기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고다르가 사망한 이후 로젠봄은 이 말을 인용해 영화는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이동 수단이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경로는 이동 수단을 이용하는 사람의 경로와 일치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고 적는다. 언젠가 우리는 고유한 얼굴과 이름을 간직하고 출발지와 목적지를 구분할 수 있는 영화의 탑승객이었다. <그랜드 투어>는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명인 영화의 관광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관광객인 우리는 한 장소에 도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얼굴을 감추고 잠시 머문 뒤 사라진다. 우리는 흩어지고 부서진 관광객의 눈으로 영화와 다시 접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