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의 주연이자 <헌트>의 연출자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이정재가 마침내 감독 데뷔작으로 칸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았다. <헌트>는 1983년 안기부 해외팀의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의 김정도(정우성)가 내부의 스파이와 대통령 암살 사건과 마주하면서 경계와 의심의 고삐를 조이는 화끈한 첩보액션영화로, 이정재는 영화의 연출, 각본, 연기를 맡았다. 제75회 칸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돼 5월19일 첫 상영을 가진 뒤 홍보 강행군을 이어가던 이정재는 비타민 한알을 입에 털어넣으며 <씨네21>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 칸에서 영화가 처음 공개되던 밤, 쉽게 잠들지 못했을 것 같은데.
= 곯아떨어졌다. 후반작업 일정이 빠듯해서 정신없이 영화를 만들었고, 그럼에도 완성도를 갖추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꼼꼼히 체크하고 영화를 잘 설명하고 알리는 일만 남았다. 그 일을 하러 여기 온 거니까.
- <헌트>의 준비 단계에서부터 칸영화제를 염두에 두었나.
= 목표는 있었다. <남산>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 판권을 샀을 땐 프로듀서로 영화를 제작하고 주요 캐릭터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정지우 감독님, 한재림 감독님이 이 시나리오를 멋지게 찍어주기를 바랐지만 결과적으로는 함께하지 못했다. 1980년대가 배경이고 액션 분량도 많고 해외 촬영까지 있는, 제작비 규모가 큰 작품이라 다들 각자의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나까지 포기할 수는 없으니, 나라도 써야겠다 싶어 직접 시나리오를 고쳐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왜 이 이야기를 꼭 써야 하는지, 왜 이런 방향으로 써야 하는지, 시나리오 첫줄을 쓸 때부터 질문이 쏟아졌다. 아무도 내게 질문하지 않는데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하고 앉아 있는 거다. (웃음) 배우로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영화는 만들어지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영화를 완성하고 공개하고 그 이후에 따라올 질문들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보편적 주제를 잡았다. 단순히 남북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왜 갈등하고 대립하는가, 왜 전세계에선 끊임없이 대립과 분쟁이 일어나는가, 우리를 대립하게 만드는 이들은 누구인가, 혹은 우리가 거짓 정보나 선동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이어나갔다. 그런 방향과 주제라면 해외에서도 영화가 소개되면 좋겠다 싶었고, 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이는 것도 자연스러운 방법일 것 같았다. ‘그럼 영화제는 어디에 갈 수 있지? 일단은 목표를 크게 잡아놓자. 칸을 목표로 삼아보자’ 했던 거다. (웃음)
-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민주화 열망이 뜨거웠던 1980년대 초반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당시의 역사적·정치적 상황을 비중 있게 묘사한다.
= 가슴 아프지만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기억해야 할 역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묵직한 이야기를 내가 감히 영화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주저함이 왜 없었겠냐마는 그럼에도 이야기하고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왜 주저하지? 왜 얘기하면 안되지? 왜? 그런 의문이 들면서 어느 순간 더 과감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 첩보물에 액션이라는 난이도 높은 장르에 도전했다.
= 스파이물은 이야기 구조가 촘촘해야 하고 복선과 반전도 정교해야 한다. 거기에 인물들의 딜레마적 상황 표현도 중요했고, 모든 캐릭터에 나름의 매력을 담아야 했고. 어휴, 중간에 몇번이나 포기하려 했는지 모른다. 왜 한재림 감독님이 못하겠다고 손을 놨는지 이해가 됐다. (웃음) 그런데 이렇게 헤매는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끈기 있게 퍼즐 맞추듯 작업을 이어갔고,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제작사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는 ‘집념의 승리’라고 하더라.
- 액션영화 팬들이 열광할 영화다. 어떻게 액션의 밑그림을 그렸나.
= 관객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어서 20분 단위로 액션 신을 배치했다. 액션 신이 파워풀했으면 좋겠다,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렬해 보이는 게 목적이지 길게 멋있게 보여주는 것은 선호하지 않았다. ‘짧아야 한다. 하지만 강렬해야 한다.’ 그 컨셉을 허명행 무술감독에게 충분히 말씀드렸다. 중요한 것은 총을 뽑기 전까지의 상황을 긴장감 있고 설득력 있게 그리는 거지, 한번 총을 뽑으면 빨리 끝내고 싶었다. 첫 번째 스탭 회의에서, 액션 콘티 회의 때는 무술팀뿐만 아니라 미술팀, 소품팀, 특수효과팀 등도 다 와야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액션 콘티 짤 때 여러 팀을 다 오라고 한 감독은 내가 처음이라더라. (웃음) 그만큼 철저히 하고 싶었다.
- 첫 연출에 연기까지 했다. 고생을 자처한 셈인데, 박평호 캐릭터는 포기하기 힘들었나.
= (정)우성씨와 같이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영화에서 가장 멋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김정도를 우성씨가 연기해주길 바랐고, 최대한 우성씨를 멋있게 찍을 자신이 있었고, 우성씨가 정도를 연기한다면 내가 평호를 연기하고 싶었다. 그러면 드디어 우리가 <태양은 없다> 이후 다시 영화로 만나게 되는 거니까.
- 본인의 연기에 대한 판단도 스스로 내려야 했는데.
= 아쉬운 지점 중 하나다.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평호에 대한 다른 표현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직접 쓴 이야기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평호를 잘 안다고 생각했고, 내가 연기하고 내가 오케이하는 게 어색하진 않았다. 레디, 액션, 컷을 외치는 조감독이 있었기 때문에.
- 영화에 참여한 화려한 스탭과 배우들을 보면서 감독 이정재를 응원하는 사람이 참 많다고 느꼈다.
= 나뿐 아니라 정우성씨와 한재덕 대표님이 <헌트>를 한다고 하니까 응원 차원에서, 아니 응원의 차원을 넘어 다들 잔칫집에 놀러온 것 같은 느낌으로 함께하지 않았나 싶다. 왜 나는 초대 안 해줘? 이 잔치에. 그런 느낌. (웃음) 저들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다 해야겠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고, 진심으로 고마웠다.
- <오징어 게임>과 <헌트> 이후의 행보도 궁금하다.
= 우성씨와 함께하고 있는 ‘아티스트 스튜디오’에서 차근차근 작품을 개발하고 있고, 제안 들어오는 역할도 잘 선택해야 할 테고, <오징어 게임> 시즌2도 해야 하겠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