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던 <도희야>의 정주리 감독이 또 한번 칸을 찾았다.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된 <다음 소희>는 특성화고등학교의 취업률 경쟁이 학생들의 현장실습 근로환경을 어떻게 악화시키는지, 하청업체의 문어발식 경쟁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이다. 매사에 당당하고 화를 참지 않던 소희(김시은)가 콜센터 현장실습을 나가면서 겪는 심리 변화가 먼저 묘사된 뒤, 졸속으로 처리된 소희의 사건을 의심하며 진상을 파헤치는 형사 유진(배두나)의 시점이 이어진다. <다음 소희>의 월드 프리미어 상영이 있던 다음날, 영화제가 열리는 해변가에서 정주리 감독과 배우 김시은을 만났다.
- 전주 콜센터 현장실습생 자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이 사건은 어떻게 접하게 됐나.
정주리 <그것이 알고 싶다> ‘죽음을 부른 실습-열아홉 연쇄사망 미스터리’ 편을 우연히 보고 이게 어떻게 벌어진 일인지 일단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나는 여러 뉴스를 보면서 ‘어린 친구들이 왜 그곳에서 일을 하다가 죽게 됐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죽은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죽은 19살 외주업체 직원, 제주 생수공장에 현장실습을 나갔다 죽은 고등학생…. 콜센터 사망 사건을 본격적으로 취재하면서 판단이 섰을 때 이 일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 타이틀 롤에 해당하는 소희 역의 김시은 배우는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김시은 조감독님의 추천으로 시나리오를 읽을 기회를 얻었다. 감독님과 처음 미팅했을 때 따로 리딩도 하지 않았는데 감독님이 “다음에 만나면”이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놀라서 “다음이요? 그럼 다음에도 절 만나신다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정주리 시나리오를 어떻게 봤냐고 물었더니 이 영화가 꼭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비범하다고 생각했다. (웃음) 내가 구체적으로 상상하던 소희에 딱 맞는 친구를 만난 게 아니라, 나의 소희가 바로 이 아이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또래 배우들을 모조리 만나면서 매우 긴 오디션을 거칠 각오가 되어 있었는데 첫 번째로 만난 시은이가 바로 마음에 들어왔다.
- 소희와 유진의 연결고리로 ‘춤’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도희야>에 이어 이번에도 춤을 등장시킨 이유가 있나.
정주리 주인공이 춤을 춘다는 건 실제 사건과는 무관하게 내가 갖고 온 설정이다. 자신을 표현하고 분출하는 수단으로 몸을 사용하는 무언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다. 내가 원래 춤을 추는 사람도, 추고 싶어 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 계속 영화에 춤을 등장시키게 되는지 모르겠다.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는 몸짓에 끌리는 것 같다.
김시은 그냥 소희는 춤을 출 때 살아 있다는 희열을 느낀다. 심플하게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다. 극중에서도 아이돌이 되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이냐는 대사가 나오는데, 아마 본인도 알 것이다. 아이돌에 도전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재능의 문제를 떠나서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줄 사람이 없어서 힘들다는 것을. 영화에 춤 설정이 포함된 것에는 춤을 잘 춘다는 이유만으로 가수가 될 수는 없다는 현실도 반영되지 않았을까.
- 고등학생이 등장하는 학원물은 많지만, 특성화고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매체에서 많이 재현되지 않았던 공간을 다뤘다는 점에서 오는 긍정적인 생경함이 있었다.
정주리 ‘지금 이 사건에서 등장하는 특성화고등학교가 어떤 곳이지?’ 막연하게 이 질문부터 시작했다. 중학생 때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의 절반 정도가 실업계, 절반 정도가 인문계 고등학교로 가는데 그렇게 나뉘고 난 후에는 서로 교류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간간이 가졌던 의문이 있다. 이미 일을 시작한 친구들도 있을 텐데 왜 수능일이 되면 대한민국의 모든 고3이 수능을 보는 것처럼 구는 걸까? 그래서 <다음 소희> 첫 장면에서 소희가 춤을 추는 날도 수능일로 설정했다. 사회가 자연스럽게 소외시키는 학생들이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다루는 주제와도 연관된다.
- <도희야>에 이어 또 한번 배두나 배우와 작업했다. 1부가 소희의 이야기라면, 배두나가 연기하는 유진이 2부를 이끈다.
정주리 칼같이 인물을 이해하고 연기로 정확히 표현하는 배우다. 그의 연기를 감상하는 첫 번째 관객으로서 늘 감탄하며 지켜보게 된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배두나라는 배우를 통해 만들어진 <도희야>의 영남은 이전에 없던 캐릭터였다. <다음 소희>는 소희의 이야기로 시작한 뒤 완전히 새롭게 등장하는 유진을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사건을 들여다본다. 독보적인 아우라로 등장하자마자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배우로 오직 배두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김시은 극중 선배님과 만나는 장면이 많지 않았던 게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오다 가다 마주칠 때마다 선배님이 현장 분위기를 이끄는 모습을 보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현장에서 누군가와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 선배님은 사람들과 무척 건강한 관계를 맺는 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선배님을 많이 본받고 싶다.
- 전작 <도희야>는 도발적인 장르적 실험을 보여줬고, <다음 소희>는 굉장히 직설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정주리 최대한 설명적이지 않게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는 마음도 컸다. 유진은 물론 그의 대척점에서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하는 말들이 있는데, 전혀 이해받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일이 벌어지기까지 각자의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신 인물의 감정은 최대한 영화적인 고민을 거쳐서 표현했다.
- 김시은 배우에겐 감독과 소통을 많이 하며 큰 비중의 연기 경험을 처음 선사한 감독이 정주리 감독일 거다. 정주리 감독에게 김시은은 첫 만남 때 바로 캐스팅을 결정할 만큼 매력을 느낀 배우였고.
김시은 감독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소희와 감독님이 생각하는 소희가 다를 수도 있는데, 감독님은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매 장면 납득 가능한 설명을 해주셨다. 그래서 사소한 거 하나일지라도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바로바로 물을 수 있었다.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은 처음이다 보니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배려도 많이 해주셨다. 가령 콜센터 상담 장면은 헤드셋에서 실제 고객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게 준비해주셔서 리얼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정주리 내가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 이렇게까지 말해준다고? (웃음) 아주 베테랑이야~. 시은이가 날 만나서 행운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소희를 찾아야 하는 내게 시은이를 만난 게 진짜 행운이었다. 콘티를 미리 준비하지만 실제 촬영에서는 그것만 찍지 않는다. 어쩔 때는 특정 컷만 찍겠다고 하고서는 그 신 전체를 찍기도 하고, 호흡이 좋으면 쭉 이어서 찍는 일도 많았는데 그런 요구에 한번도 머뭇거린 적이 없다. 덕분에 모든 스탭들이 테이크가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시은이가 처음에 보여준 집중력 때문이다. 첫 테이크로 찍은 게 영화에 들어간 경우도 굉장히 많다. 놀라운 친구다.
- 김시은 배우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 또 있나. 정주리 감독은 <도희야>와 <다음 소희> 사이 공백보다 빨리 차기작을 만나고 싶다.
정주리 그렇게 오래 걸리면 절대 안된다. 그러면 내가 50대가 된다. (웃음) 차기작은 빨리 해야지.
김시은 조현철 감독님의 영화 <너와 나>를 찍었다. 드라마 <멘탈코치 제갈길>에서는 쇼트트랙 선수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