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김혜리 기자의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 스포일러 인터뷰
2022-07-14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정리 : 윤현영 (자유기고가)
불가피하다면 불가결하게

박찬욱 감독이 몇편의 사랑영화를 만들어왔나 헤아려보고 흠칫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는 대놓고 러브 스토리였고 조금 비밀스러운 데야 있지만 <스토커> <올드보이>도 여기 묶을 수 있다. 6부작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신작 <헤어질 결심>에 이르러 관객이 박찬욱식 멜로드라마를, 혹은 그 변태성을 전에 없이 화제로 삼아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건 이번 영화의 연인이 그나마 보편적으로 감정이입하기 용이한 인물들이라서일 수도 있다(동시대 인간이고, 헤테로섹슈얼이고, 근친이나 적이 아니다). 혹은 마침내 연애가 영화의 중심 사건이자 플롯이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피해 사랑을 표현하는 말과 몸짓의 총화다. 욕망의 문답은 취조와 심문의 언어를 빌려오고 정의, 진실, 예의 같은 다른 범주의 인간 행위가 끌려들어온다.

송서래(탕웨이)와 장해준(박해일)은 자부심에서 비롯된 기품이 있는 남자와 여자다. 깨끗하지만 친절을 모르는 남편에게 모욕당하며 살던 서래는 경찰서 사체 검안실에서 해준을 처음 만난다.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서툽니다.” “한국말, 저보다 잘하시는데요.” 어색하게 시작된 둘의 대화는 예상을 뛰어넘어 지속되고 어떤 강보다 험하게 굽이치며 끝내 바다까지 흘러간다. 품위 있는 두 인간의 사랑은 그러나 그들의 품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해준은 과거부터 쌓아올린 현재를, 서래는 미래를 위협받는다. 우스꽝스러움과 애절함이 산 정상에서 만나고 죄와 영광이 가장 깊은 바다 밑에 한데 묻힌다. <헤어질 결심>은 수석과 분재를 확대한 듯한 모양의 바위와 나무가 있는 해안에 마지막으로 도착한다. 자연의 축소판인 수석과 분재를 다시 실물 크기 바위와 나무로 옮겨놓은 것 같은 그 이미지는 현실과 관념, 구상과 추상 사이 박찬욱 영화가 서 있는 자리의 표식 같기도 하다. <공무도하가>의 백수광부처럼 파도 속으로 걸어들어갈지 썰물이 남기고 간 폐선의 잔해처럼 살아갈지 짐작할 수 없는 남자는 영겁의 시간에 갇힌 것처럼 보이고 서래의 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이번에도 박찬욱의 연인들은 세상 끝에 당도하지만 서로를 보지 못함으로써 사랑은 영원해진다.

2023년 오스카 레이스에 <헤어질 결심>이 가을부터 합류할 경우 차기작 <동조자> 제작 스케줄과 조정이 될까? 그런 아무도 시키지 않은 걱정을 하며 박찬욱 감독을 만나러 갔다. 그는 연출적 선택에 대해 “아껴뒀다가 썼다”라는 표현을 종종 썼다. 영화언어의 한 음절 한 음절을 귀중히 다루고, 무난한 숏은 곧 실패로 여겨 파기하며, 불가피한 조건을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격상시켜 결과에 통합하는 그의 연출 태도는 작품이 거듭될수록 굳건해지고 있었다.

- <헤어질 결심>은 투자자 이름을 나열하는 한국영화 특유의 크레딧이 오프닝에 생략돼 있고 곧장 총성으로 시작합니다.

= 그런 한국영화도 종종 있지 않았어요? 영화를 총성으로 시작한 것은 사건 현장, 심지어 액션을 상상하도록 오도하려는 뜻도 있었어요.

- 저는 사건 현장의 소리인가 싶어 몇발이 발사됐는지 속으로 셌어요.

= (웃음) 허무하라고 한 거예요. 해준(박해일)은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인물인데 틀린 선입견도 만들고 싶었어요. 관객은 사격장 신이 나오면 표적을 얼마나 잘 맞혔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데 그것도 안 보여줬죠.

- 그렇게 허를 살살 찔러가며 시작한 영화는 러닝타임 90분 즈음까지 부산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이후 50여분은 이포에서 전개됩니다. 두건의 살인 -뒷부분에는 철성(서현우)의 어머니 사건도 숨겨져 있지만-, 두곳의 경찰서, 두명의 경사 파트너. 이처럼 가운데가 접히는 형식은 <아가씨>도 그랬지만 <아가씨>는 원작의 구조가 이미 있었잖아요. <헤어질 결심>의 2부 구성은 어느 단계에서 결정됐나요?

= 초창기 트리트먼트를 쓸 때, 서래(탕웨이)가 중국 사람스럽게 예를 들면 당시(唐詩) 같은 옛날 문장 형식의 말을 좀 하면 좋겠다고 정서경 작가와 이야기했어요. 그 결과물의 예가 “죽은 남편이 산 노인 돌보는 일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대사죠. 그런데 어느 날 정서경 작가가 <산해경>을 가지고 왔어요.

- <산해경>은, 특별한 서사는 없고 어디로 가면 무슨 산이 있고 어떤 신기한 짐승이 있다고 나열하는 식의 책인데요.

= 어쨌든 산과 바다에 관한 책이고 산과 바다는 우주죠. 공교롭게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바다에서 끝나니까 제목만으로도 영화에 부합하는 것 같았어요. 각본에는 완성된 영화에서보다 <산해경>이 중요하게 언급되죠. 서래의 외조부 계봉석이 취미 삼아 필사했고 본인이 덧붙이기도 했다는 대사도 있었어요. 그리고 서래는 물려받은 계봉석 판본 <산해경>을 공부 겸 한국어로 번역하며 필사한 거죠. 그러다가 영화를 두 챕터로 아예 나눠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산과 바다라고 표기한 타이틀 카드가 각장 서두에 나오는 편집본이 오랫동안 있었어요. 형식적으로 단정하고 괜찮았는데 러닝타임이 길다는 걱정이 나오면서 내가 관객이라면 보통 영화 한편 끝날 즈음 갑자기 ‘바다’라는 소제목이 뜨면 여태 본 만큼 또 봐야 하나 싶어 공포스러울 거 같았어요. 실상 ‘바다’는 절대 ‘산’만큼 길지 않은데, 그러면 난 정말 억울한 거죠. 그래서 뺐어요. (좌중 웃음)

- 극중 부산은 우리가 아는 부산이지만 이포는 가공의 도시입니다. 호미산도 경남 의령의 호미산이 아닌 듯합니다. 이포를 만든 것은 영화가 이 도시에 필요로 하는 속성 -원전, 안개, 조수간만- 을 한꺼번에 가진 실존 도시가 없어서였나요?

= 그렇죠. 호미산은 이포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 부산과 이포 챕터 사이의 시간적 갭이 13개월인데, 이건 어떻게 계산해 나온 시간인가요?

= 1년보다 짧으면 서래가 큰 변화를 겪기에는 좀 밭은 것 같았고 마음의 정리도 될 만한 긴 시간은 곤란할 것 같았어요. 원래는 두 번째 남편 임호신(박용우)을 만나는 경위에 관한 신이 각본에 있었어요. 서래가 돌보는 화요일 할머니가 결국 돌아가시고, 상갓집에서 어떤 유족보다 섧게 우는 서래를 아들이 눈여겨봤다가 접근한다는 설정이었어요.

- 그 장면이 있었다면 임호신이 조금 더 입체적이었겠네요.

= 아쉬워요. 그걸 찍기로 한 시점엔 이미 이대로 가면 굉장히 긴 영화가 되겠다는 압박이 있어서 찍지 않았어요.

- 그렇다면 이포 부분의 서래가 본연의 모습에 가깝다고 보면 될까요?

= 어느 서래가 진짜냐 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도수(유승목)와 살다보니 해소하지 못한 욕망이 많아서 값비싼 물건도 사고 싶고 그럴 마음이 생겼을 수 있는 거고.

사랑의 심문

- 스릴러의 틀로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영화적으로 어떤 이점이 있을까요?

= 긴장이 깨지지 않는다는 점이죠. 나는 사랑영화를 볼 때 대개 좀 지루해졌어요. 밀당도 있고 다툼도 있지만 결국 그들의 사랑은 변치 않고 헤어지거나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해도 그들의 사랑은 당연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긴장이 떨어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사랑하는 관계에 의심이 개입하면 좀더 드라마틱해지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만나 연애해도 의심할 수 있지만 용의자와 형사로 만났을 때의 의심과는 비교할 수 없겠죠.

- <친절한 금자씨>부터 함께한 정서경 작가와 작업하면서 <헤어질 결심>에서만 겪은 일이 있다면요?

= 배우를 정해놓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죠. 박해일은 실제로 캐스팅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이런 사람을 상상해보자. 예를 들면 박해일 같은”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마다 박해일에게 받는 인상은 다르겠으나 내가 사적으로 만나보고 받은 인상은 담백한 사람, 친절한 사람, 점잖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연애의 목적>에서 너무 강한 인상을 줬는지 다른 사람들은 의외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꼿꼿해요”라고 해준이 서래를 묘사하는 말이 내가 박해일에게 받는 느낌이기도 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꼿꼿한 사람이라고 해준이 서래를 묘사하는 건 자기 이야기예요. 덧붙여 박해일에 대한 내 인상을 굳힌 작품은 <덕혜옹주>였어요. 캐릭터가 군인이라는 면도 작용했겠지만 실존 인물을 그린 작품에서 가공의 캐릭터를 연기할 때 자칫 허황돼 보일 수도 있는데 박해일이 하니 의젓하고 기품이 있었어요.

- 왜 이번 작품은 배우부터 정했어야 했나요? 사랑 이야기라서?

= 박해일은 작가에게 이미지를 제시하기 위해 참고했던 이름인데 실제로 이뤄졌으니 행운이었고요. 남자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애초부터 직업과 성격이 잡혀 있었는데, 여자는 용의자라는 점 외에는 백지 상태였어요. 그런데 정서경 작가가 갑자기 중국 사람으로 하자고 해서 왜냐고 물었더니 그래야 탕웨이를 캐스팅할 수 있지 않냐는 거예요. 나 역시 탕웨이를 좋아했고 오래전부터 탕웨이를 캐스팅할 수 있는 영화를 우리가 좀 만들어야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해온 터였죠. (한국영화에) 굴러들어온 복인데 마땅한 기획이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헤어질 결심>의 여주인공은 무엇이건 만들어갈 수 있으니 기회였죠.

- VIP 시사회에서 탕 배우가 아이맥스 상영관에 꽉 찬 관객을 가리키며 “산처럼 보인다”고 하더군요. 극중 대사를 인용하는 인사였는데 평소에 말을 밀도 있게 하는 사람 같았어요. <헤어질 결심>은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라는 대사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순간부터 해준의 사랑이 시작됐다고 봐야 할까요?

= 배우들도 그걸 꼭 물어요. 그래서 여러 가설을 주고받았는데 내 경우는 심문 과정에서 서서히 시작됐다고 생각했어요.

- 처음 시신을 보러 온 서래와의 대화 중 이례적으로 사이가 길게 뜨고 “패턴을 좀 알고 싶은데요” 하는 순간 같기도 하고.

= 난 그 장면 찍을 때 “아이고, 대사를 까먹었구나. 그 몇 마디 되지도 않는걸, 쯧쯧” 하며 컷을 부르려고 했는데(좌중 폭소) 배우의 의도였어요. 물론 사이를 떼라고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길게 할 줄은 몰랐지. 그래도 만나자마자 너무 반한 사람처럼 보이면 곤란할 것 같아 일단 보류했는데 현장 편집으로 보니 침묵의 순간이 너무 재밌어서 결국 사용했어요. 그 밖에 사랑의 시작이 될 만한 순간이 몇몇 있어요. 시신 상태를 어떻게 확인하겠냐는 질문에 서래가 처음에는 ‘말씀’으로 듣겠다고 해서 실망했다가 사진으로 선택을 바꾸니까 반기는 표정으로 변한다든가. 동족이라고 느끼는 거죠.

- 계단참에서 해준이 수완(고경표)에게 부검에 대해 서래에게 설명해주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묘하게 찍혀 있어요. 대화인지 독백인지 알 수 없도록 해준과 수완을 나눠 찍었는데 해준이 계단 모퉁이를 돌아 위층으로 사라지는 순간이 이제 그는 수완과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신호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 그냥 두 사람이 분리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후로는 둘이 대치하는 국면으로 전개되죠.

- 초밥 먹은 상을 치울 때 10년 산 부부처럼 손발이 척척 맞는 대목도 그렇습니다.

= 그러고 나서 해준이 따라오라며 먼저 방을 나가고 서래는 다시 안 돌아올지 몰라 가방과 코트를 챙겨 드는데 밖에서 해준이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다시 올 거예요!”라고 소리쳐요. 그러면 서래가 별일이네 하는 표정을 지으며 코트를 내려놓죠. 그게 탕웨이의 아이디어였어요. 서래가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됐다”라고 말은 했지만 내 생각엔 사랑을 깨달았다는 의미지 사랑은 그전부터 싹텄죠. 사건이 종결돼 유품까지 돌려받았으면 더이상 이 남자를 속일 이유도 없는데 계속 밥도 먹고 절도 가고 홍산오(박정민) 사건이 해결된 날 찾아와 재워준다고도 하고.

- 재워준다고 방문한 날은 기도수 사건의 증거를 인멸하려는 목적도 있었지 않나요.

= (시큰둥하게) 어쨌든 종결됐다고 하는데, 굳이 뭐 그렇게까지.

- 사건이 끝나서 기쁘냐고 물어보는 것도 불필요한 질문이잖아요.

= 그 대화를 좋아해요. 탕웨이도 대놓고 말하는 품이 탕웨이 같고 박해일도 왜 묻냐고 했다가 잠시 후 인정하는 것이 박해일 같아요.

- 이야기의 반환점인 서래의 아파트에서의 이별 장면에서 카메라 움직임이 주의를 끕니다. 카메라의 위치가 높아 인물들이 깊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가 해준이 떠난 다음 서래가 다시 떠오릅니다.

= 서래가 자리에 앉으며 프레임 아래로 나갔다가 카메라가 틸트 다운하며 다시 들어오죠. 인물을 놓쳤다가 다시 찾아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고 그 장면의 시공이 좀 다르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서래의 집은 계속 등장한 장소지만 그 순간을 위해 천장이 많이 보이는 앵글을 아껴뒀다가 내리누르는 느낌으로 썼어요.

어쩌면 SF

- 형사가 용의자를 감시한다는 설정에서는 서래가 일방적 욕망의 대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균형을 바로잡는 장치 중 하나가 해준과 서래가 동족이라는 가설인 것 같아요.

= 사회적 조건이 매우 이질적인 두 사람이지만 살면서 중요시하는 면이 통한 거죠. 감시당한다는 상황은 불쾌한 것인데 지금 믿음직한 남자가 잠을 안 자고 지켜주는 기분이 든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정말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겠죠. 형사를 속여야 하는 용의자의 자리에서 벗어난 심리 상태인 거지. 뭐, 이미 초밥의 맛을 볼 때부터 호감을…. (좌중 웃음) 작은 실수가 있었는데 시마스시라는 초밥집이 실제로 있다는 걸 모르고 상호를 지었어요.

- 사실 엿보기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같은 예술영화부터 1980년대 할리우드 에로틱 스릴러까지 무수히 쓰인 장치라, 어떻게 진부하지 않게 찍을 것인가가 중대한 과제였을 법합니다. 엿보는 쪽이 대상이 있는 공간으로 텔레포트한 것처럼 연출하셨는데 이 방식으로 무엇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 호기심이죠. 첫 순간이동의 계기가 서래의 얼굴이 커튼에 가려졌을 때예요. 얼굴을 더 잘 보려고 망원경을 든 해준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겁니다. 안 보일 때 오히려 상상의 클로즈업이 작동하는 거죠.

- 그런데 2부에서 서래가 해준을 훔쳐볼 때에는 순간이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욕망의 작동 방식은 해준의 고유한 것이구나 짐작했습니다.

= 서로 다른 방식을 택하는 거죠. 편집 중 없어진 장면 중에는 서래가 돌봄 노동을 얼마나 프로페셔널하게 수행하는지에 관한 해준의 감탄도 있었어요.

- 탕웨이 배우를 캐스팅한다는 목표가 먼저고 서래를 디아스포라의 일원으로 설정한 것이 나중이라는 사실이 의외입니다. 외국어로 대화한다는 문제가 영화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모티브라서요.

= 예를 들어 탕웨이와 영화를 찍고 싶어서 중국 사람으로 캐릭터를 설정했다면,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주연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어떻게 서툰 언어로 연애 스토리를 끌고 갈 것인가, 즉 약점을 어떻게 에둘러 갈지를 중심으로 접근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조건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서 마치 각본이 먼저 정해지고 배우를 구한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되길 바랐어요. <복수는 나의 것>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신하균이 연기한 류가 말을 못하는 것은, 당시에 하도 캐스팅이 어려워 홍콩 배우를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 기본적으로 사랑에는 언제나 암호의 요소가 있으니까 외국어의 모호함이 잘 어울리는 면이 있지만, <헤어질 결심>에서는 외국어 사용자는 네이티브보다 말의 사전적 정의를 정확히 안다는 사실도 중요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해준은 서래의 정확한 화법을 좋아하는 남자고, 두 남편은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자이거나 한국어를 지저분하게 쓰는 사람들입니다.

= 서래와 해준이 동족인 이유 중 하나죠. 관객이 막 웃어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한국말을 못 알아듣더라”라는 대사를 내심 좋아해요.

- <아가씨>에서는 남에게 들은 말을 자기 말처럼 제3자에게 반복하는 상황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번역 앱이 쓰였습니다. 여기에는 언어의 거리와 시간적 거리가 동시에 게재됩니다. 통역에 걸리는 시간도 있고 과거에 녹음된 걸 현재 듣는 시차도 있죠. 덕분에 해준과 서래의 연애뿐 아니라 보편적으로도 모종의 ‘이격’(離隔)이 사랑의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 예컨대 한국어를 못하지 않는 서래가 굳이 통역 앱을 써서 중국어로 말할 때에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일 테니 해준은 궁금함이 더 간절해지고 그 갈망을 관객이 공유하게 됩니다. 한편 서래는 한국어로는 정확히 전달하기 어려워 답답했던 감정을 발산하고요. 그러고는 앱이 내 말을 잘 전달하나 유심히 듣죠. 내가 외국 가서 인터뷰할 때 통역이 정확히 전하고 있나 듣고 있는 것처럼. (웃음)

- 그러고 보니 앞서 2부의 서래가 본래 서래에 가까울 거라고 짐작한 데에는 통역 앱의 음성이 1부에서는 남성, 2부에서는 여성이었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 2부의 호미산 장면에서만 여성 목소리가 나오죠. 실존하는 통역 앱보다 기능이 훨씬 우수해서 일종의 SF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웃음), 여성 음성을 선택할 수 있는 모드가 13개월 후에 개발된 거죠. (웃음) 여자 목소리는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는 호미산의 대화를 위해 아껴뒀어요.

죽은 자와 눈 맞추기

- <산해경>은 1부의 서래 집 벽지에서 보듯 시각적 모티브도 된 것 같습니다. 한편 해준의 부산 집은 온통 M. C. 에셔의 큐브 같은 격자무늬투성이고 이포의 정안(이정현) 집에는 기하학적 추상화들이 걸려 있던데요.

= 해준의 벽지는 고야드 가방의 패턴처럼 보일까봐 걱정도 했는데 그냥 반듯하고 규칙적이고 정리벽이 있는 사람이 좋아할 법한 느낌을 살렸어요. 네모에 갇힌 고지식한 느낌과 루틴의 반복을 표현했죠. 서래 집의 벽지도 반복 무늬긴 하지만 변화의 기운이 있죠. 정안 집의 그림은 말레비치 계열 그림의 변형일 거예요.

- 1부에는 기도수 추락사 사건 외에, 알고 보면 치정 범죄(crime of passion)인 서브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홍산오 사건의 속성과 비중에 대해서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각본에서 기능으로 보면 장해준 형사가 일하는 매너를 보여주는 예시이고 시간적으로는 사랑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했을 텐데요.

=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쓴 마르틴 베크 시리즈나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여기 보면 강력반 형사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면서 메인 사건과 서브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는 기법이 등장해요. 두 사건이 관련이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끝에 가서 만나기도 하고 여러 용도가 있어요. 홍산오 사건은 돈을 둘러싼 젊은이들의 사건같이 보이다가 나중에 가서 본질이 드러나죠. 그리고 서래가 이 사건의 해결에 영감을 주는데 수사관도 아니면서 힌트를 주려면 인간 본성 내지 사랑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겠죠. 해준이 옥상에서 산오와 대치해 설득할 때 갑자기 “나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말이야”라며 죽은 기도수가 살아 있는 양 이야기하잖아요. 정말 용의자를 설득하려고 트릭을 쓰는 건지 정말 과몰입해 자기 이야기를 흘리는 건지 구별되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 두 차례의 추격전이 모두 옥상 같은 공간에서 마무리됩니다. 앞의 추격전은 서래가, 뒤의 추격전은 산오의 애인(정하담)이 바라보고 있죠. 비금봉과 호미산까지 포함하면 해준은 항상 높은 곳으로 힘들게 올라가서 진실과 마주치는 편입니다.

= 그러게. <현기증>이 연상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지금 드네요. 이지구를 추격하는 첫 추격전에서는 계단이 길고 높아서 젊은 수완이 못 쫓아오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 공포를 다루고 있는 영화니 어울린다고 봤습니다. 홍산오를 추격하는 신도 눈 뜨고 추락한 시체와 서로 마주 보는 기도수 때 상황을 반복할 필요가 있어서 두번 다 옥상이 배경이 됐습니다.

- 후반에 가면 시신의 자세로 해준이 눈을 뜨고 누워 있는 숏도 나오는데요.

= 해준도 결국은 그 남자들처럼 살해되거나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관객이 계속 갖고 가길 원했어요. 해준은 서래가 결혼했던 두 남자에 대해 형사의 입장을 넘어서 관심을 갖기 때문에 약간의 동일시가 이뤄져요. 기도수가 즐겼던 위스키의 맛을 알고 싶어서 똑같은 걸 사서 맛보고 휴대용 플라스크도 사서 다니죠. 서래의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을 만난 이후 손가락 관절을 꺾는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기도 합니다.

- 기도수와 임호신은 둘 다 비싼 시계를 차고 있던데요.

= 임호신의 롤렉스는 기도수의 것을 물려받은 거예요. 서래도 웃기는 사람이지. 전남편의 시계를 깨진 유리만 갈아서 선물했어요.

- 서래 집에 있던 대만산 위스키가 회식 자리에 등장해서 해준이 들고 온 건가, 환상인가 했어요.

= 편집됐는데 부하 형사 미지가 해준의 신용카드를 받아 사오는 장면이 있었어요.

- 기도수가 출입국 관리국에서 일하다 압수한 술일까 상상도 해봤습니다.

= 기도수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요. 오디오, 음반, 암벽등반 그리고 위스키가 그것이죠.

- 영화에 등장하는 오디오 마니아나 고전음악광은 변태인 경우가 많아요.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에도 그런 인물이 나왔죠. 그런데 기도수는 비싼 오디오로 음악을 들을 때는 미닫이문으로 아내가 있는 공간을 차단해요. 조금 무리해서 해석하면 기도수가 아내 서래를 대하는 태도는 식민지를 대하는 점령국의 그것 같았습니다. 소유물로 취급하고 훈장도 주고 학대하고. 말러 교향곡 5번을 사용하셨는데 말러가 자아가 비대한 인물이 사랑할 만한 음악이라서인가요?

= (웃음) 맞아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말러 애호가들이 듣고 화를 내면 어쩐담? 나라면 킥킥 웃겠지만. 다들 ‘말러 애호가들이 그런 면이 있지. 나는 아니지만’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박쥐>에서 시어머니(김해숙)가 남인수, 이난영의 노래를 좋아하는데 태주(김옥빈)는 극혐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을 비호감 캐릭터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쓰면서 변태적 즐거움을 느끼나봐요.

발음보다 중요한 억양

- 탕웨이 배우는 대부분 출연작에서 연애 내러티브를 만드는 동시에 로맨스 속에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마이클 만의 액션 스릴러 <블랙 해트>조차 탕웨이의 얼굴에 감정의 대부분을 걸고 있어요. 덧붙여, 두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작품에서 중국어 대사를 할 때 굉장한 카리스마와 품위를 발한다는 인상을 받아왔습니다.

= 누구나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쓸 때는 취약해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점을 좀 활용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모국어를 말할 때 생기는 자신감으로 인해 관계가 역전될 듯한 아슬아슬함이 발생하죠. 중국어로 말하는 통역 앱 사용 장면을 몇번이나 만든 이유도 그런 탕웨이의 위엄을 관객이 느끼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 한국어 대사를 감독님이 직접 녹음해주셨다고 탕웨이 배우가 인터뷰했는데 대안은 없었나요? (웃음)

= 원래는 여성 연극배우가 한국어 대사를 내 디렉션으로 녹음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나더러 해달라고 탕탕(탕웨이의 현장 닉네임)이 부탁하더라고요. 나는 배우도 아니고 남자인데.

- 원래 연기 시범은 안 하시는 걸로 알아요.

= 대사는 억양이 중요해서 정확히 알고 싶었는지…. 나 역시 발음은 알아듣기만 하는 수준이면 되지만 억양은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딜 강조하고 말끝을 올릴지 말지는 의미의 이해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니 억양만큼은 어느 한국인보다 더 정확해야 했어요. 어눌한 발음과 정확한 억양이 결합할 때 생기는 재미가 있죠.

- 시사회에서 어떤 한국영화보다 대사가 잘 들려서 놀랐습니다. 특별히 녹음과 믹싱에서 신경 쓴 부분이 있나요?

= 현장 동시녹음도 완벽을 추구했지만 끝없이 테이크를 갈 수는 없으니 소리의 길이와 입모양만 정확하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후시녹음에서 처절한 노력을 했어요. 창도 없는 밀폐된 녹음 부스는 30, 40분만 서 있어도 멀미가 나는데 탕웨이가 어떤 대사는 수십번 이상을 반복하고 나는 형사처럼 유리창 밖에서 지켜보며 서로 기계가 되어갈 때까지 녹음했어요. 그렇게 후시녹음을 마치고도 대사를 숙지하고 있는 우리 귀에 들어온다고 처음 보는 관객에게도 그럴까 염려돼 블루캡(녹음실) 직원 중 우리 영화를 담당하지 않는 직원들에게 테스트를 했고 그래도 귀 밝은 사운드 전문가들 아닌가 싶어 스탭들의 비영화인 친인척을 초대해 다시 체크했죠. 마지막에는 베이징 녹음 스튜디오를 빌려 생중계하면서까지 보완했어요.

- 여연수 경사(김신영)는 왜 동료들 사이에 따돌림을 받나요?

= 칸에서 영화를 본 한국 기자들이 성 정체성을 질문했어요. 소수자라서 왕따냐고. 뜻밖이었어요. 부산에서 우울증에 걸려서 전근 온 거냐고 해준에게 묻는 모습에서 보듯, 궁금하면 바로 물어보고 사회적 스킬이 별로 없는 인물이라 사람들이 멀리한다고 생각했어요.

- 대칭을 이루는 고경표 배우의 수완이 (코미디언 출신) 김신영 배우의 연수보다 더 장르적인 캐릭터라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김신영씨 소속사 대표님은 처음 제안을 듣고 농담인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웃음) 철성의 취조 장면에서 욕한 것도 애드리브였다고 들었습니다.

= 우정 없는 우정출연인 줄 알았다고 그러더라고요. (웃음) 원래 욕은 각본에도 있었지만 김신영씨가 연배 있는 경상도 분들이나 아는 “돌 빨았나?” 같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독창적인 표현을 조사해왔어요. 작업 과정은 다른 배우와 똑같았어요. 연극 10년쯤 하던 배우를 발견해 캐스팅한 기분이었어요. 봉준호 감독이 송새벽 배우를 <마더>에 데려온 것처럼.

스마트한 클래식 멜로드라마

- 산보다 바다를 선호하는 서래와 해준은 극중에 인용된 공자의 정의에 의하면 인자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감상(感傷)을 덜어내려는 선택이었을까요?

=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긴다기보다 적어도 인자한 사람은 확실히 아니다 정도일 겁니다. 서래는 필요하다면 무자비한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을 테고 해준은 ‘인자’에 대한 기준이 높아서 나 정도로는 어질다고 보기 어렵다는 쪽이 아닐까요.

- <헤어질 결심>의 부제를 ‘스마트폰 시대의 사랑’으로 지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번역 앱, 운동 앱, 추적 앱 그리고 아이폰의 문자 입력 중 말줄임표까지 서사에서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아이폰으로 촬영한 단편 <일장춘몽>이 있었지만 <헤어질 결심> 역시 일종의 애플 영화가 아닌가 싶기까지 했어요.

= 서래와 해준이 같은 종족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똑같이 소나타를 몰고 폰도 같은 회사 것을 썼어요. 갤럭시였어도 무관한데 애플쪽에서 협찬을 했어요.

- 가정용 전화가 보급됐을 때, 그리고 핸드폰을 누구나 사용하게 됐을 때도 스크루볼 코미디나 스릴러의 각본 쓰는 방식이 영향을 받은 역사가 있습니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인데 <헤어질 결심>처럼 스마트폰의 기능을 결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쓴 영화는 처음 본 것 같습니다.

= 옛날 영화나 소설을 21세기 배경의 영화로 각색할 때 어려운 점이죠. 그냥 원작의 시대를 가져오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요. 처음에는 우리도 앱이 너무 많이 나오지 않나, 줄여야 하나 고민했는데 관객 입장에서 쉬운 해결책이 있는데 왜 어렵게 돌아가나 의문이 들 것 같았어요. 억지스럽게 플롯을 전개하느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고 기왕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예를 들어 문자를 보낼 때 보는 것은 폰 액정이지만 마음으로는 문자를 받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있는 거죠. 그러니 시점숏의 주인은 핸드폰이 아니라 서래인 겁니다.

- 그외에도 사물 시점의 숏이 많습니다. 손목시계의 무브먼트 시점도 있고 죽은 자의 안구 속 시점도 있고요. 사물의 시점이 영화에 더해지며 생기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 처음엔 해준이 살인 현장에서 눈 뜨고 죽은 사람의 망막에 마지막으로 새겨진 범인을 꼭 잡아주겠다고 약속하는 심정으로 피해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러다가 다양한 경우로 확장됐어요.

- 해준의 별명을 ‘폰 모으는 남자’로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웃음) 세어보니 월요일 할머니의 폰, 호신의 대포폰, 철성의 폰, 서래가 차에 두고 간 폰까지 모조리 해준의 손에 들어와요.

= 스마트폰 활용을 회피하기를 포기하고 나니까 자꾸 빠져들더라고요? 이왕 그렇게 된 거 몰아주기로 했어요. (좌중 폭소)

- 스마트폰을 적극 사용하지만 동시에 매우 고전적인 멜로드라마 장면들이 있습니다. 자동차 뒷자리에 해준과 서래가 나란히 앉은 장면은 교향악까지 합세해 데이비드 린의 <밀회>를 연상시키고, 절에서 데이트하는 시퀀스는 꼭 한국이나 일본의 옛날 영화 속 장면 같아요. 박해일 배우가 신성일처럼 보이고요.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도 그렇고.

= 해준이 나름 데이트를 위해 차려입은 거예요. (웃음) <헤어질 결심>의 영감이 된 정훈희의 <안개>가 김수용 감독의 <안개> 주제가이기도 해서 과거 한국영화에 대한 존경심도 표현하고 싶었어요. 아무리 한국에서 오래 살았대도 서래는 외국인이니 해준이 관광객을 안내하듯이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사찰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해준의 성격이 절을 선호할 것도 같고 박해일의 <나랏말싸미> 영화도 떠올랐고요. 촬영지는 순천 송광사입니다.

- <올드보이>의 대표색이 보라라면 <헤어질 결심>은 청록인 것 같습니다.

= 파랑으로도 녹색으로도 보이는 색이고 바다와 산의 색이기도 해요. 바다는 빛에 따라 파랑으로도 녹색으로도 보이고, 산도 보는 거리에 따라 그렇죠. 사실 서래가 입는 청록색 원피스도 파랑 한벌, 녹색 한벌을 만들었어요.

- 그리고 관객한테 당신들 눈이 문제라고 덮어씌우려고요? (웃음)

= 안개가 이 영화의 중요한 기후 현상인데 그 속에서 뭔가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을 보고 싶었어요. 서래는 이렇게 보면 살인자고 저렇게 보면 피해자니까요.

- 서래의 가발에 대해서는 편집 전에도 설명이 없었나요?

= 가발을 설명하는 ‘대사’는 없었고 그저 벗는 동작이 보이고, 여러 가발이 거치대에 씌워져 있는 모습이 화면에 나오면 관객이 2부의 서래는 자주 변신하는 존재구나, 충분히 짐작하리라 생각했어요. 어시장에서 해준 부부를 만날 때 서래는 가발은 아니어도 웨이브를 많이 넣고 브리지까지 한 머리를 하고 있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중국에서 엄마를 돌볼 당시의 헤어스타일을 호미산 갈 때 재현했다는 사실입니다.

- 호미산에서 서래가 머리에 쓰는 랜턴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정념이 본격적으로 폭발하는 장면인데 우스꽝스러운 소품을 선택했어요. 프레임 내부에서 조명 구실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서래가 이 조명으로 인해 얼굴 없는 존재로 화합니다.

= 일단 다른 광원이 없고 눈이 내려 달도 없는 산인데 그 장면을 컴컴하게 찍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헤드랜턴을 쓴 현실적 이유였어요. 빛의 방향도 바꾸기 용이하죠. 랜턴을 쓰면 상대방 얼굴에는 강렬한 빛이 떨어지고 빛을 쏘는 쪽은 역광 때문에 얼굴이 흐릿해져요.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서래의 얼굴이 랜턴의 빛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진 풀숏입니다. 리허설하다 우연히 발견하고 너무 좋았는데 막상 슛 들어가니 잘되지 않아 배우가 어색하지 않은 한도에서 길게 찍었어요. 서래가 무슨 외눈박이 거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외경스럽고 공포스러운 이상한 이미지입니다.

- 극중 드라마가 두편 있고 모두 새로 찍었습니다. 하나는 무녀가 나오는 시대극이고 다른 한편은 <적색경보>라는 한류 드라마입니다. 후자는 그럴 법한 설정인데 전자는 어떤 스토리가 있나요?

= 전자는 <태백산맥>의 소화라는 어린 무당의 러브 스토리를 떠올리면서 만들었어요. 극중 드라마의 제목도 그래서 <흰 꽃>입니다.

- 영화를 보면서 끝까지 맞추지 못했던 조각들이 있습니다. 먼저, 마지막 서래의 해변 신에 나오는 장대는 어떤 용도인가요?

= 어디까지 언제 물이 잠기는지 예전에 답사 와서 구덩이를 파야 할 장소를 표시해둔 겁니다.

- 호신의 죽음을 회상하는 플래시백에서 서래가 현장을 치우는 도중 호신이 눈을 뜨는 숏이 있어요. 서래가 절명시킨 건가요?

= 이미 죽은 상태의 경련 같은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런 오해를 낳을 수 있겠군요.

- 이포 바닷가의 목격자 중 한명이 심하게 기침을 하는데 요양 온 환자라는 설정인가요?

= 그냥 감기 걸렸거나 그때 사레가 들렸거나… 뭔가 관객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었어요.

마침내 미결되다

- ‘마침내’라는 부사가 영화에서 여러 차례 되새겨집니다. 영문 자막은 어떤 단어로 번역됐나요?

= 달시 파켓과 함께 고민한 결과 ‘at last’로 했어요. ‘오로지’도 두번 쓰고 ‘도무지’ 같은 단어도 생각해봤지만 운명적인 느낌을 주고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마침내’를 썼어요.

- 영화에서 ‘마침내’는 ‘그러다가 결국’이라는 뜻으로 처음 쓰이고 서래가 잠결에 우는 장면에서 ‘이제야’처럼 쓰이다가 결말에 이르러 ‘기어이’의 뜻을 품게 됩니다. 마지막 시퀀스는 ‘마침내’가 쌓여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그림 속으로 표표히 건너가버리는 동양 설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바위와 나무가 어우러진 해안 풍경도 어찌 보면 수석이나 산수화를 실물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라 <산해경>의 삽도를 실물화하면 이럴까 싶기도 하고요.

= 서래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산해경>의 글만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림까지 베껴 그렸는데 제일 잘 그려진, 펼친 페이지 하나만 영화에 보여준 것이 아쉬워요. 마지막 장소는 해가 져야 하니 서해안에서 찍어야 했지만 1부에 나오는 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바위 또한 있어야 해서 동해안에서도 헌팅을 많이 했어요. 산 모양 바위가 있는 해안은, 사람들이 세트 아니냐고 해서 억울한데 동해 삼척의 부남해변입니다. 생김새 덕분인지 무당이 세운 신당도 있고 계단도 있었어요. 해준이 파도를 맞으며 멀어지는 해지는 바다는 서해의 학암포입니다. 서래와 해준이 주차하는 부감 롱숏은 마검포고, 해준이 서래를 찾아 헤맬 때 부는 누런 바람도 실제로 불었던 모래바람입니다.

- 마지막 해변 시퀀스 처음에 나오는 해안도로 직부감 롱숏은 극히 회화적이라 그 순간부터 영화가 추상적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해안도로 부감숏이 두번 나오는데 해준이 해안에 도착할 때 나오는 두 번째 부감숏의 오른편을 보면 파도의 포말이 모래사장에 남기는 궤적이 서래의 옆모습 윤곽이에요. 만든 우리끼리만 아는 표시죠.

- <헤어질 결심>의 결말을 그저 사실적으로, 서래의 끝은 자살로, 해준의 끝은 서래를 찾아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서래의 퇴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내가 정해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서래가 숨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이유도 같습니다. 하지만 해준의 경우는 서래를 찾아 먼바다로 나아가 죽는다고 보는 관객이 없기 바라요. 서래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해준의 미결사건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라고 작별인사를 하잖아요. 서래가 살았건 죽었건 해준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건 분명하고, 시체조차 못 찾은 해준은 서래가 살아 있다고 믿고 죽는 날까지 찾아 헤매거나 제 발로 나타나기를 기다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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