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탑친자’(탑건에 미친 자)를 만들며 817만 관객을 모은 <탑건: 매버릭>(수입·배급)부터 누적 관객 726만명을 달성해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여름 극장가의 승자가 된 <한산: 용의 출현>(제공·배급)까지, 영화시장이 아직 어려운 가운데 롯데엔터테인먼트는 눈에 띄는 성적을 거뒀다. 정경재 롯데컬처웍스 콘텐츠사업본부장은 올해의 경험을 교훈 삼아 내년에는 더욱 전략적으로 자사 영화와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 올해의 배급 전략과 성과를 돌아보면 어떤가.
=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고객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배급 전략은 두 가지였다. 우선 장르영화에 주력했다. 장르물에 관여도가 높은 관객과 바이럴이 빠른 10대, 20대 관객을 대상으로 <해적: 도깨비 깃발> <한산: 용의 출현> <탑건: 매버릭> <자백>을 선보였다. 두 번째로 영화의 만듦새가 관객에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판단해 상영 전에 모니터링 시사를 여러 번 했다. 예측에 부합한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결과도 있었다. 고객의 콘텐츠 소비 트렌드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꼈다.
- 어떻게 달라졌나.
= 케이블 채널조차 유료였던 미국과 달리 국내 관객은 콘텐츠를 서비스처럼 느껴왔다. 관객이 합리적인 가격을 지불한 콘텐츠는 유일하게 영화였다고 할 수 있는데, 영화의 선택권은 이제까지 제작사와 배급사에 있었다. OTT가 생기면서 관객에게도 선택권이 주어졌다. 더불어 관객은 시간 대비 효율성을 따지기 시작했다. 내가 영화 관람에 1만5천원을 내는 것에 더해 극장까지 가는 시간, 오는 시간, 밥값까지 계산하는 거다. 그러니 극장에서 영화 보는 일은 작품을 고른다는 의미를 넘어 영화 관람 시간 자체를 선택하는 행위다. 내가 쉬는 시간에 맞춰 영화를 보고 싶은데 극장은 사정이 여의찮다. 이렇게 선택의 폭이 좁다보니 영화 한편을 선택할 때 굉장히 유니크한 이야기이거나 평이 검증된 영화를 찾게 된다.
- 여름 시장의 치열한 대작 경쟁 사이에서 <한산: 용의 출현>이 승자가 됐다. 어떤 시그널을 얻었나.
= 서사적인 변화를 실감하기도 했다. 앞단에 임팩트를 주고 서사를 뒤에 푸는 식의 넷플릭스의 전략이나 숏폼에 익숙해진 관객은 캐릭터 빌딩이나 세계관 소개에 시간을 들이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기승전결에서 기승의 단계를 짧게 가져가야 한다. 우리가 이미 마석도 형사(마동석)를 알고 있어서 <범죄도시2>의 서사에 곧바로 몰입할 수 있었다. <한산: 용의 출현> 역시 누구나 아는 이순신이 나온다. 캐릭터를 설명하는 것보다 빠른 서사로 감정을 몰입시킨 게 성공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 올해의 배급 전략은 2023년에도 유효한가.
= 근간을 바꿀 수는 없다. 개봉해야 할 작품이 14편 정도 있다. 궁색한 답변일 수 있지만 2023년의 전략은 효율을 낼 수 있는 시기에 영화를 잘 개봉시켜서 영화시장을 활성화하는 거다. 텐트폴 작품이 세 작품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 출연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는 세계관을 처음 여는 작품이라 중요하게 보고 있다. <1947 보스톤>(감독 강제규, 출연 하정우, 배성우, 임시완)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라 개봉을 잘해야 한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와 함께한 <노량: 죽음의 바다>(감독 김한민, 출연 김윤석)도 의미가 크다. <탑건: 매버릭>을 통해 파라마운트와의 파트너십이 공고해졌는데 내년에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도 잘 안착시켜야 한다.
- 배급 시기를 정하는 데에 무엇을 가장 고려하나.
= 어느 때가 성수기 혹은 비수기라고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10월 추석 연휴를 성수기로 보고 <인생은 아름다워>를 선보였고 <정직한 후보2>도 극장에 걸렸다. 어느 쪽도 성수기다운 성적을 얻지 못했다. 영화관만 볼 게 아니라 시장 전체를 봐야 한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이슈였던 지난 추석 때 롯데의 <기적>과 크고 작은 영화가 극장에 있었지만 모든 이슈를 <오징어 게임>이 가져갔다. 고객은 이슈가 되는 콘텐츠에 집중한다. 지금은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가장 큰 이슈고 <아바타: 물의 길>과 경쟁하면서 소비된다. 스크린 수에 대한 전략을 넘어 OTT 라인업이나 지상파 라인업 등 주변 환경도 살피면서 배급 시기를 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 신규 프로젝트의 투자 진행 상황은 어떤가.
= 2019년과 비교하면 수가 줄었지만 코로나 기간에도 꾸준히 영화를 찍었다. 올해 양우석 감독의 <대가족>, 유재선 감독의 <잠>, 김한결 감독의 <파일럿>을 촬영했고 시네마틱 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 <머니게임> <유쾌한 왕따> 등의 작품도 진행했다. 밀려 있는 영화가 많고 제작비로 들어간 돈이 순환되지 않아 투자배급사가 위축된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큰 영화에만 투자할 순 없다. 롯데는 영화관을 가진 회사라 성수기, 비수기에 선보일 다양한 영화가 필요하다.
- 현시점의 고민은.
= 다양한 영화가 많을수록 그에 비례해서 히트작이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관객의 선택이 올해처럼 계속된다면 영화시장이 줄어들 뿐 아니라 시리즈 시장도 한계에 다다르지 않을까.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을 구분하고, 일하지 않는 시간도 다른 활동으로 배분할 거다. 영화는 콘텐츠 시장을 넘어 아웃도어와도 경쟁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확장성 있는 IP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방향성은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 영화와 드라마의 포맷에 관한 고민은 계속하고 있다.
- 확장성 있는 IP에 우선 투자한다고 했던 기조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 확장성 있는 IP의 기준은 이렇게 세웠다. 첫 번째는 누구나 얘기하듯 시퀄과 프리퀄 혹은 스핀오프를 만들 수 있는 IP인가, 두 번째로 그 IP가 브랜드가 될 수 있는가. 즉 <슬기로운 의사생활>처럼 같은 포맷으로 시리즈화될 수 있는가. 세 번째로 캐릭터 자체도 IP로 본다. <범죄도시>의 마석도 캐릭터도 일종의 IP다. 이 세 가지 기준에 하나를 더하자면 사회적으로 따뜻한 이야기인가도 고려한다.
- 내년 극장가는 어떻게 전망하나.
= 내년 시장은 2019년 대비 60~70% 정도 회복될 거라고 본다. 2019년으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더 걸리거나 아예 안 돌아갈 수도 있다. 고객의 트렌드를 어떻게 빨리 캐치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생각이 들고 플랫폼 구분 없이 산업적으로 콘텐츠가 융합돼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는 ‘영화 보러 간다’라기보다 ‘영화관에 간다’는 말을 많이 했다. 관객이 느끼는 공간의 힘이 여전한가, 라는 차원에서 영화관도 많이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배급도 마케팅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제작사 분들과의 파트너십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 내년의 목표가 있다면.
= 정량적으로는 대작들이 잘돼서 관객수가 느는 것. 실질적으로는 대작이 아닌 작은 영화의 성공모델을 만들어보고 싶다. 다양한 영화의 성공이야말로 영화관이 회복했다는 시그널이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의 공유를 통해 작은 작품이 흥행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