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TV에서 보았던 송혜교의 모습 가운데 유독 잔상이 남는 이미지들이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기억할 <순풍산부인과>의 오혜교, 핑클 멤버들과의 친분, 여배우들의 외모를 분석하던 어떤 방송에서 그의 얼굴형과 이목구비 위치가 완벽한 황금 비율을 자랑한다며 최고의 미녀 1위로 꼽았던 풍경, 그리고 <이홍렬쇼> ‘쿠킹 토크 참참참’에 출연했을 때다. 사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는데 “바이킹은 줄을 서서 기다려서라도 무조건 맨 뒷좌석에 타야 한다”, “올라갔다 내려올 때 그냥 앉아 있지 말고 엉덩이를 한번 들어줘야 더 스릴 있다”고 당차게 말하는 모습이 너무 공감 가 집에서 박수까지 치면서 봤다. 과학적(?)으로 따져도 한국에서 가장 예쁘다는 배우가 의외로 소탈한 매력이 있었다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무살 송혜교는 <가을동화>의 주연으로 발탁됐고, 출연작이 연달아 성공한 후 <올인> 같은 대작에 꼭 필요한 배우로 성장했다. TV는 톱스타 송혜교의 일거수일투족을 이슈화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이제 송혜교는 바이킹을 타지 않겠지?
‘옆집 소녀’에서 ‘톱스타’로
송혜교의 필모그래피에는 <가을동화> <호텔리어> <올인> <풀하우스> <태양의 후예> 등 흥행에 성공한 작품과 <그들이 사는 세상>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이 공존한다. 영화 출연작이 크게 성공한 적은 없지만 그는 <일대종사>에 출연한 이후 왕가위와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왕가위 감독 제작사 ‘쩌둥영화’와 계약까지 맺었다. 이미 흥행 스코어만으로는 얻지 못할 입지를 다진 배우에게 성적을 논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진다. 하지만 송혜교는 그가 이룬 성과에 비해 유독 저평가된 배우이기도 하다. 그가 보여준 흥행력만큼 연기력을 대중에게 인정받은 적은 거의 없었고, 똑같이 공개 연애를 한 다른 배우에 비해 유독 그를 향한 시선은 날카로웠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과거에는 더욱 극심했던) 여성 연예인을 헐뜯는 것을 일종의 오락으로 여기는 부류에게 송혜교는 유독 자주 소환되는 이름 중 하나였고, 연기력이 도마에 오르는 이유는 창조적이기까지 하다. 이를테면 대사가 빨라지면 발음이 완벽하지 않다거나, 너무 밝은 척한다거나, 특유의 ‘쪼’가 거슬린다거나.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에 먼저 자리 잡은 1970년대생 배우들, 사회 곳곳에서 여성 혐오에 대한 자성이 시작됐던 시기에 스타가 된 1990년대생 배우들에 반해 1980년대생 배우들은 그들의 저력을 가장 인정받았어야 할 때 가장 손해 본 세대다. 더군다나 ‘옆집 소녀’와 ‘톱스타’ 사이의 시차가 짧았던 송혜교의 기세는 종종 시청자에게 혼란을 줬는데, 그게 내게는 “이제 송혜교는 바이킹을 타지 않겠지?”였고, 여기서 더 비뚤어진 사람들은 스타가 된 젊고 예쁜 여자를 열성적으로 시기했다. 여전히 송혜교는 <풀하우스>에서 친구들에게 사기를 당해 가정부가 된 평범한 여성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이면서 해외에서 국빈 대접을 받는 한류 1세대 톱스타로 매체에 등장했다. 원래 쇼 비즈니스는 스타를 향한 동경과 친근함을 적절히 배합하며, 누군가를 빠르게 띄우다가도 금세 추락시키고, 종종 부정적인 감정까지 연료 삼아 굴러가기 마련이다. 여기에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은 집단적 안티 문화를 만들었다. 언제나 스타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송혜교는 산업의 명암을 모두 흡수한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송혜교의 행보는 흥행 성적 내지는 작품 밖 이슈로 소비되어온 까닭에 충분히 그 의미가 조명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풀하우스>와 <태양의 후예> 사이 필모그래피를 한데 모아서 복기할 때 그 의미가 보다 선명해진다. <풀하우스>의 성공 이후 안전한 길보다는 영화 <파랑주의보>를 선택해 TV와는 다른 영화 연기의 기술을 처음 배웠고, <황진이>는 계급과 윤리의식을 거부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했던 기생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고전 텍스트를 민중의 이야기로 다시 읽어낸 작품이었다. 아직 마니아층에만 주로 소구됐던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선택해 노희경 드라마와 대중과의 접점을 넓힌 것도 그가 한 일이었다. 실험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양식화된 연기를 일부러 감행한 장준환 감독의 SF 로맨스 영화 <러브 포 세일>,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유학생 출신 감독이 인디 영화산업에서 만든 오컬트영화 <패티쉬> 등 송혜교의 리스트에는 의외의 즐거움이 있다. 로맨틱 코미디는 분명 송혜교가 가진 가장 중요한 재능 중 하나지만, 그는 검증된 영역 너머 자신의 저변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이어왔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확장과 발전, 그리고 송혜교
공교롭게도 <더 글로리>로 ‘재발견’됐다고들 하는 송혜교의 재능은 엔터 산업과 사회상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여성배우들이 로맨스 장르를 넘어 다양한 장르물을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고, 카메라도 배우의 아름다움을 고집스럽게 취하지 않는다. 스타 산업과 소비 문화에서 유독 여성 연예인에게 엄격했던 잣대가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과거보다 그들의 성취를 먼저 주목하는 움직임이 생긴 것도 중요한 변화 중 하나다. 송혜교는 <더 글로리> 이전에도 <오늘>에서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고,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자식을 잃은 젊은 엄마의 고통을 연기했다.
<더 글로리>는 기술적으로 노련한 데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갈망까지 있는 배우가 적시에 만난 작품일 뿐, 원래 송혜교에게 내재돼 있던 가능성이다. 더군다나 송혜교가 하이틴 스타였던 시절 보여줬던 일상적인 매력은 작품 외 노출이 줄어든 이후에도 종종 힘을 발휘한다. 아마 그와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의 ‘털털함’을 언급할 만큼 원래 그에게도 내재된 특성이기 때문이리라. <태양의 후예>의 성공적인 코미디는 대부분 그가 연기한 강모연에게서 나왔고, 복수를 위해 의식적으로 웃음을 지운 문동은에게서 종종 터져나오는 일상성은 고통 외에도 감정이입할 만한 요소를 만든다. 지금의 송혜교는 30년 가까이 화제성을 유지한 독보적인 스타이면서 그렇기에 평가절하됐던 면면이 발견되는 시점에 서 있다.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스타와 배우의 속성이 그의 안에서 충돌하고 융합되고 진화하고 있다. 산업의 곡절을 고스란히 체화하며 버텨온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