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더 글로리’, 그 복수는 진짜 통쾌한가
2023-03-23
글 : 송경원
원하고 원망하죠

적절한 복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측정 불가능한 광기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복수를 할 땐 두개의 무덤을 파라’는 말처럼 복수는 근본적으로 자기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다. 그만큼 제대로 된 복수를 달성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상 복수를 통해 보상되거나 회복되는 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효용에 눈이 멀어 복수를 갈망한다. 하나는 감정의 분출이다. 사적 영역에서 복수는 회복과 치유라기보다는 증오의 발산과 분노의 해소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복수는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랄 뿐 정확히 계산될 수 없다. 그나마 근사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원시적인 형태의 정의,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일대일 대응이다. 이 순간 복수는 사적 감정에서 공적인 기능으로 치환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최소한의 정의. 언젠가는 대가를 치른다는 사회적 안전장치(혹은 경고)라 해도 좋겠다.

<더 글로리>의 복수는 나름 합리적으로 보인다. 들끓는 감정에 매몰되었다면 <악마를 보았다>식의 끔찍한 폭력과 파괴도 가능했겠지만 그 끝에 남는 건 폐허뿐이다. 대다수 복수물은 폭력을 향한 공허한 페티시에 가까운데 <더 글로리>는 이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간다. 대신 <더 글로리>가 원한 건 납득되는 복수와 그로 인한 최소한의 정의, 받아들일 수 있는 해피 엔딩이었던 것 같다. 동의한 적 없는 어설픈 용서로 적당히 마무리하지도, 넘치는 증오와 폭력에 몸을 맡기지도 않는 동은(송혜교)의 복수는 납득 가능한 선에서 영리한 결말을 내놓는다. 장대하고 합리적이며 치밀한 복수극에 나름 만족하며 박수를 보내다 문득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영리하고 합리적인 복수라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애초에 통쾌한 복수라는 게 성립하는가. 이 복수가 통쾌함을 제공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사회적 공분을 향한 초월적인 제의(祭義)와 선택적 분노

동은은 가해자들에게 손쉬운 물리적 징벌이 아닌 각자의 죄에 맞춘 복수를 설계한다. 연진(임지연)의 곁에서 모두를 떠나게 만들어 영혼을 파괴하고, 재준(박성훈)의 두눈을 멀게 하고, 사라(김히어라)의 조롱하고 망가뜨리던 손을 부수고, 남의 불행에 크게 웃던 혜정(차주영)에게서 목소리를 앗아가고, 남의 고통에 앞장서던 명오(김건우)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얼마나 적절하고 합리적인 징계인가. 그 속 시원한 전개에 눈이 멀어 간과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동은의 복수는 그다지 치밀하지 않다. 이 복수극의 작동 원리와 결정적인 고리들은 가해자들을 향한 믿음에 근거한다. 그들이 여전히 악인이고 반성하지 않으며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을, 개선과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종자들이라는 사실. 동은이 판을 깔면 가해자들은 서로를 물고 뜯으며 알아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순간 동은의 행위는 단순한 죄의 징계 이상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동은의 복수는 감정의 발산과 해소라기보다는 개선되지 않는 현실의 어둠을 향한 증명이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나쁜 놈들이 더 잘사는 비틀린 현실을 향한 수정이라고 해도 좋겠다. 잘못을 바로잡고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선 감정보다 이성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만큼 동은의 복수는 관조적이다. 동은은 감정의 열기를 누르고 기계처럼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동은의 통쾌함, 감정적 해소를 위해 설계된 판이 아니다. 차라리 죄의 형태에 의미를 맞춘 일종의 제의(祭儀)에 가깝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이라는 침묵과 악의, 부조리를 향한 사회적 살풀이판이다. 여기서 진정 통쾌한 건 동은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우리다. 동은의 행위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해자들이 스스로 증명해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적 단죄는 기꺼이 허용된다. 동은에게 사주받은 무당이 또 다른 희생자인 소희의 벌전을 받고 쓰러지는 순간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장면은 마치 치밀한 복수극인 듯 보이는 이 작품이 실은 어떤 믿음과 에너지에 기대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동은의 복수극은 초월적인 영역, 초현실적인 힘, 적어도 그에 준하는 한 개인의 집념의 산물이다. 이는 언뜻 모든 희생자들을 위한 위로처럼 다가오지만 한편으론 현실에서의 복수가 얼마나 초현실적인 일인지를 역설하는 순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글로리>는 현실의 모든 희생자들을 향한 위로의 굿판이자 잠재적 가해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다. 이야기를 통해 공적 정의의 구현이라 해도 좋겠다.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던 <도가니>처럼 순기능도 있을 것이다. 분노는 빠르게 퍼지고 정의가 세워지는 순간은 더없이 달콤하다. <도가니>가 (설사 그것이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분노의 확산에 기대 사회의 변화를 유도했다면 <더 글로리>는 함무라비법전에 근거한 최소한의 (그리고 원시적인) 정의 구현을 통해 통쾌함을 제공한다.

하지만 호러영화의 클리셰를 빌려 상황을 단순화했던 <도가니>처럼 그로 인해 가려지고 지워지는 것도 적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노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권력형 폭력은 추상적이어서 잘 포착이 안된다”는 김갑수 평론가의 발언이 또 다른 공분을 사고 있는 것처럼 현재 우리 사회는 분명 노출이 많은 연예인들이 저지른 직접적 폭력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중이다. <더 글로리>가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해소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직접적인 가해와 폭력에 비해 잘 보이지 않는 구조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건 어쩌면 당연하다. 직관적인 폭력은 훨씬 자극적이고, 다른 곳에 분노를 나눠주기엔 이를 통렬하게 징벌하는 복수극이 너무 통쾌하고 재미있다.

나이스한 개새끼들의 은밀한 매력

또 하나 시야를 교란하는 요소는 <더 글로리>의 매력적인 가해자들이다. 혜정의 몸, 사라의 패션, 재준의 유머, 연진의 뻔뻔함 등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들의 태도가 불편하기는커녕 일종의 ‘밈’화 되어 거꾸로 재미있게 소비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의 화려한 외양과 허영 넘치는 삶이야말로 실상 김은숙 드라마가 반복해서 소비하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끔찍한 복수물이 폭력을 페티시한다면 <더 글로리>는 자본의 힘과 사회적 신분의 격차를 매력적으로 포장한다. 가해자들의 연대가 붕괴하는 것도 그들 사이에 경제적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은을 둘러싼 모든 남성, 조력자인 여정(이도현)과 복수의 도구인 하도영(정성일), 심지어 가해자 집단의 경제적 중심인 재준까지 모두 부유하다. 그들이 이 복수극에 얽히고설킬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부유함 덕분, 아니 부유함 탓이다. 기자회견에서 “가해자들을 지옥 끝까지 끌고 갈 돈이 있는 거다. 저한테는.”라는 김은숙 작가의 말은 섬뜩한 구석이 있다. 복수에는 돈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인생을 통째로 바쳐야 한다. 대다수의 희생자들에게 복수는 꿈처럼 멀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꿈이 유난히 달콤한 이유다.

‘개새끼’와 ‘나이스한 개새끼’의 차이는 무엇인가. 천박한 졸부에 가까운 재준에 비해 하도영은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 재준이 직접 폭력을 행사한다면 하도영은 신사적으로 ‘나이스’하게 계급의 벽을 친다. 와인 맛도 모르는 비서가 눈치 없이 자신에게 우산을 좀 들어달라고 했을 때 비싼 와인을 가져가서 먹으라고 주면서 손절해버리는 그는 좋은 사람인가.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더 글로리>가 따지고 들어가는 건 죄의 여부니까. 하지만 개새끼라는 본질보다 ‘나이스함’이라는 수식어에 시선을 빼앗길 때 우리 역시 길들여진다. 재준이 끔찍하게 죽는 이유는 동은을 괴롭혀서가 아니라 감히 주제도 모르고 예솔을 탐했기 때문이다. 딸 예솔을 위해(정확히는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전재준을 제거하는 하도영의 죄는 <더 글로리> 속 공분의 대상이 아니다. 그게 무섭다. 직원들을 머슴이라 칭하며 노조를 불신하는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회장의 위험한 가치관이 쉽게 용인되고 손주를 사랑하는 뚝심 있고 매력적인 경영자로 소비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편중된 부에 대한 원망과 부자들에 대한 선망이 뒤엉킨 사회에서 미디어는 ‘나이스한 개새끼’들에 중독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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