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더 글로리’ 속 뭉뚱그려진 피해자들과 해결되지 않은 폭력의 잔재들
2023-03-23
글 : 김소미
고통의 블랙홀

<더 글로리>가 끝난 시점에 되묻고 싶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에 어떤 화두를 던졌나. 동은(송혜교)을 괴롭힌 가해자들은 저마다 저주의 신탁이라도 받은 양 과시적인 형벌을 보여주지만 나는 냉동된 소희(이소이)의 시신이, 재준의 옷가게에서 숙식하다가 간신히 고시원으로 도망친 경란(안소요)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온 생을 걸어 복수를 준비해온 주인공의 치밀한 설계도가 학교 폭력의 방지와 처벌에 어떤 사회적 나비효과를 일으켰는지 조금의 묘사도 보지 못했다. 대신 내가 본 것은 저마다 여러 층위의 고통 속에 놓인 피해자들이 한데 뭉쳐지고, 저마다 양상이 다른 가해자들이 깡그리 지옥에 던져지는 광경이었다. 집단화된 증오와 단죄 속에서 한쪽은 분열했고 한쪽은 지옥에서도 지켜낸 선의와 믿음으로 연대했다. <더 글로리>의 쾌감이자 아름다움이면서, 찝찝함을 지울 수 없는 편의적 이분법이기도 한 이 거대한 피해자-가해자 구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피해자성으로 연대하기

주여정(이도현)은 사이코패스의 무차별 살인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강현남(염혜란)은 알코올과 도박 중독이 극심한 남편으로부터 주기적으로 폭행당한다. 이들은 동은의 조력자로서 한데 묶인다. “나는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라고 말하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드라이버 현남, 언제든 의사라는 직업의 특권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 “칼춤 추는 망나니” 여정은 저마다 사회가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을 비틀어 시청자를 감응시키는 면에서도 비슷하게 다뤄진다. 동은과 여정이 일찌감치 인연을 맺은 배경에도 피해자 정서의 공명이 있다. 동은, 현남, 여정만 동일 선상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동은과 직간접적으로 관계 맺는 거의 모두가 각자의 피해 서사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드라마가 전개된다. 의문에 부쳐진 에덴빌라의 집주인(손숙)마저 음주운전 사고로 아들을 잃고 자살 시도를 하던 중 어린 동은과 만났던 여자로 밝혀진다. 가정 폭력, 자녀 학대, 불법 촬영, 뺑소니, 공권력 부패, 크고 작은 사회적 차별과 갑질에 이르기까지 여러 공적 명명을 가진 폭력들이 거론되고 거기에 얽힌 인물들의 증오심이 연대를 이루는 구조다. 누구나 피해자(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인식, 저마다 팽배한 ‘피해 의식’이 갈등이 아닌 만남의 요소로 활용된다는 사실은 훌륭한 사회적 함의를 갖는다. 사회적 계급보다 피해자성이 중요해지며, 어떤 의미로는 피해자간 고통의 위계를 줄 세우지 않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자랄 것 없는 부유층 자제지만 ‘내면의 상처’를 가진 남자와 남다른 심성과 매력의 소유자지만 ‘가난의 상처’가 있는 여자가 서로를 충족시키는 신데렐라 서사에서 계급적 문제의식과 신분 상승의 욕망을 충돌시켰던 김은숙은 <더 글로리>에서 자본의 자리에 고통의 문제를 집어넣어본다.

이러한 시선의 확장이 김은숙 세계의 유의미한 진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글로리>에 호출된 너무도 다양한 폭력의 양상과 그 피해자들의 등장에 관한 당위를 제공하기엔 역부족이다. 비교해볼 만한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다. 피해자들이 모여 가해자를 응징하는 눈물겨운 집단적 복수라는 측면에서 둘은 약간 닮아 있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는 같은 사안을 둘러싼 부모들의 각기 다른 반응과 대처, 피해자인 자신이 저지른 새로운 가해에 대한 엇갈리는 윤리를 군상화처럼 보여주면서 같은 범인에게 당했을지언정 세상에 똑같은 피해는 없음을 역설한다. 반면 <더 글로리>는 어떤 다양한 고통을 겪었든 동은 곁에서 복수의 성공을 돕거나 남은 삶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피해자라는 동일한 정체성에 여러 인물들을 초대한다.

학교 폭력의 잔혹한 순간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으나 아내가 남편에게 맞는 장면은 마치 누아르의 액션 신처럼 처절하게 연출한 <더 글로리>에서 현남의 몸에 남은 멍과 상처는 사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되물어지지 못한다. 남편이 홍영애(윤다경)의 차에 치여 즉사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윤소희와 손명오를 살인한 죄로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연진이 더이상 동은에게 저지른 폭력에 관해서는 사과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도 비슷한 양상이다. <더 글로리>는 회복을 위한 정확한 처벌과 사과 대신 모든 가해자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응징되는 퍼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사이 오히려 구체화되는 쪽은 남보다 더 많이 징벌당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추하고 비열한 짓을 일삼는 가해자 캐릭터들의 복잡한 욕망이다.

낭만적 고통의 한계

파트2의 엔딩에서 나란히 교도소로 들어가는 동은과 여정은 그곳을 걸어나올 때도 함께일까? 그들은 피해자로서 함께일 수 있으나 가해자로서는 곧 분리될 것이다. 남아 있는 일들의 후과가 사회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해석될지 <더 글로리>는 고민하기를 멈춘다. 여정에게 내려질 처벌과 동은에게 내려질 처벌은 다를 것이고, 그에 앞서 인생의 복수를 위해 여정이 감수한 것과 동은이 감수한 것을 나란히 둘 수도 없다. <더 글로리>가 슬쩍 외면한 것 중에는 동은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이 학교 폭력이 아닌 친족 내 폭력이라는 사실도 있다. 파트1, 2를 도합해 동은이 가장 사무치게 오열하는 순간들은 죽지도 않고 살아 돌아오는 알코올중독자 엄마와 대면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그 절규는 복수의 과정에서 쉽게 증발해버린다. 개별화되지 않은 피해자들의 연대는 이렇게 가장 중요한 고통을 블랙홀 속에 빠트린다. “문동은, 주여정, 강현남 같은 피해자들이 원점에 서는 서사”를 말했던 김은숙 작가에게 복수극이란 어쩌면 액션이 가미된 어두운 멜로드라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장애물을 뛰어넘는 낭만적 사랑의 자리에 낭만적 고통을 대입한 결과물 말이다. 그래서 <더 글로리>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증오에 몰입하는 세계로 상정하고 써내려간 어둡고 영광 없는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 자신의 장기인 인간 선의에의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며 막을 내린다. 개별적 고통에 대한 첨예한 모색 대신 적당한 타협과 모순이 생겨난 자리에서 작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 드라마가 문제 해결에 가장 자주 쓰는 카드인 ‘유학’은 <더 글로리>에서 서사적 클리셰로 다가오지 않는다. 현남의 딸에게 ‘탈조선’만이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믿고 그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동은의 결단,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떠나버릴 수 있는 하도영의 여유야말로 이 이야기가 가장 현실적으로 재현한 어떤 선택이란 사실이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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