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배우 본체와 캐릭터의 간극은 작품의 재미를 더한다. <더 글로리> 빌런스의 리더 격인 전재준과 배우 박성훈은 접점이라곤 하나도 없을 만큼 멀어 보이지만 문득 겹쳐 보이는 순간도 있다. 다혈질에 제멋대로인 전재준이 그저 악마가 아니라 문득 인간적으로 보이는 지점이 있다면 그 친근함의 상당 부분은 배우 박성훈의 매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입에 욕을 달고 살면서도 곳곳에 지뢰 같은 웃음 포인트를 던져주는 묘한 남자. “새로운 역할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배우 박성훈의 캐릭터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근면한 연기의 결과다.
- 전재준 역할은 김은숙 작가님이 직접 추천했다고 들었다.
= 처음 대본을 읽을 때는 어떤 역인지 모르고 봤다. 읽으면서도 전재준이란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악역인데, 조금 날티 나고 상스러운 부분이 재밌게 다가왔다. 신기하게 작가님도 재준 역할에 나를 염두에 두셨다고 해서 잘해내고 싶었다. 욕이나 비속어가 많아서 쉽지 않았지만 낯선 부분에 도전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 전재준은 학교 폭력의 중심에 선 엄연한 악역이지만 그저 악마처럼 단순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 일단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악역은 맞다. 그 방향성을 전제로 인물에 부피를 더해 입체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성인이 된 재준은 전체적으로 상황을 관조하는 포지션에 가깝다. 대본이 워낙 탄탄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따로 더할 건 없었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개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의상이나 헤어 컨셉 등 겉으로 보이는 부분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대본을 읽었을 때 문득 떠오른 이미지가 있어 긴 헤어스타일을 먼저 제안했다. 재준의 머리가 길어지면서 친구이자 부하직원이며 그를 선망하는 손명오의 헤어 컨셉도 따라 정해졌다.
- 팬들에 의해 ‘전재준의 유머’ 같은 주제로 짧은 영상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도 재미있다.
= 유머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재준이 한없이 악하기만 한 인물이라면 그에게 가해지는 징벌도 밋밋할 것 같았다. 현실에 가까울수록 그의 악행이 더 섬뜩해지고 단죄가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전재준은 기본적으로 자존감이 높은 인물이고, 그만큼 콤플렉스에도 민감하다. 어떻게 보면 가해자 그룹 중에 가장 순정파에 가까운 면모가 있다. 적어도 연진이(임지연)와 딸 예솔이를 향한 마음은 진심이다. 물론 표현방식이 늘 비틀려져 있지만.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 인물이 조금씩 무너질 때 의외의 일면이 드러난다. 그런 부분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 가해자 집단은 각자의 죄에 걸맞은 맞춤형 징벌을 받는다. ‘비릿하던 그 눈’으로 표현되는 전재준의 결말은 특히 끔찍한데.
= 눈이 멀게 된다는 결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철저하게 재준 입장에서 말한다면 조금 가혹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복수가 원래 그렇지 않나. 적절하고 적당한 복수라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어떨 땐 성에 안 차고, 어떨 땐 넘치는 것 같기도 하면서 부서지는 게 복수가 아닐까 싶다. 이 부분에서 대해서는 철저히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 ‘그냥 개새끼’인 전재준과 ‘나이스한 개새끼’ 하도영의 대립도 흥미롭다.
= 재준은 자존감이 높은 만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도 심하다. 하도영은 재준보다 모든 측면에서 나은, 한 단계 위의 인물이니 위축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 걸 티내지 않으려고 더 거칠게 나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 싸울 때 얻어맞고는 아무도 붙잡지 않는데 말리지 말라고 하는 것 같은?
= 맞다. 딱 그런 장면. (웃음)
- <더 글로리>가 무겁고 민감한 내용인 데 반해 현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하다. 캐릭터와 배우들의 온도 차가 보는 재미를 더한 것 같다.
= 유독 호흡이 잘 맞고 분위기가 즐거운 현장이 있는데 <더 글로리>도 그중 하나였다. 원래 먼저 나서는 편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버렸다. 즉흥적으로 MT를 가기도 했고. 단기간에 많이 친해졌고 소중한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 <하나뿐인 내편>이 대중적으로 얼굴을 알린 작품이라면 <더 글로리>는 도약이라고 볼 수 있을까.
= 성실하게 찍었던 작품 중 하나? 그저 매 작품 최선을 다해서, 꾸준히 찍고 있다. 언젠가 뿌리가 깊어 쉽게 흔들리지 않는 큰 나무 같은, 실망시키지 않는 배우로 기억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지금껏 찍은 작품 중에 영화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 기회가 된다면 영화가 제일 욕심이 난다. <폰 부스>(2003)나 <더 테러 라이브>(2013) 같은 영화들을 좋아한다. 혼자 극을 끌고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배우로서 언젠가는 도전해보고 싶다.
- 진행 중인 작품만 봐도 쉴 틈이 없는데 재충전이 필요하진 않나.
= 사실 쉬는 걸 불안해하는 스타일이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여행을 가서 자연과 어우러져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해보니 혼자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선지 주변에서 여행 예능 추천도 하는데, 예능은 좋으면서도 뭔가 부담감이 있다. <아는 형님>에서 송강호 선배님 성대모사를 한 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부담도 커졌다. (웃음)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게 좋다. 여러 번 말했다시피 유머를 사랑한다. 언제가 될진 몰라도 예능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다."
전재준의 험난한 순간
(※스포일러 있음)
“전재준이 최후를 맞이할 때 공사장 시멘트 한가운데 빠지는 장면이 유난히 힘들었다. 서해 바다에서 공수해온 갯벌을 부어서 만들었는데 와이어를 달아 빠지는 장면을 직접 찍었다. 날씨가 무덥기도 했고 여러 테이크를 가다보니 구멍이란 구멍은 다 갯벌로 메워진 것 같았다. 약간 과장을 보태 촬영 후 두달 정도는 샤워를 해도 갯벌이 나오는 기분이었다. 두번은 못 찍을 것 같아서 농담 삼아 혹시라도 파트3가 나올 수 있으니 재준이 갯벌에서 살아서 기어나오는 장면을 지금 미리 찍어놓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