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막만 한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수첩을 들고 왔다. 영화관에서도 그렇게 메모하나.
= 영화를 볼 때는 일부러 메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 놓치는 장면들이 생기기도 하고 영화를 보는 도중에 드는 생각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 많기 때문이다. 짧으면 30분, 보통은 하루 정도 지나서 드는 생각들을 글로 가져온다. 시간을 거쳐 얼마간 여과된, 내 안에서 정리된 말들이 글 쓰는 과정에서 경합을 벌인다.
- 지난해 출간한 민음사 탐구 시리즈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에서 영화뿐 아니라 만화, 문학, 음악, SNS 인플루언서로서의 자기 분석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K문화 전반을 비평의 주제로 삼았다.
= 포스트 시네마 시대를 살면서 매체, 플랫폼, 그것에 접속하는 다양한 디지털 기기 등에 의해 매우 다양한 선택지에 놓이지 않나. 그건 부정할 수 없이 내가 자라면서 경험한 어떤 객관적인 환경이고, 그로부터 체화한 현실 감각을 따랐다.
- 만화 장르에 대한 애호와 관심이 영화비평에 끼치는 영향도 있나.
= 어쩌면 영화, 소설, 시보다도 만화가 내게는 중요하고 그것을 논하는 것이 큰 과제처럼 다가온다.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이 “사진과 영화가우리가 시간에서 겪는 소외를 어느 정도 해방시켜준다”고 이야기했는데, 만화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영화, 사진과는 완전히 다른 관습과 방식으로 수행된다. 만화와 영화는 비슷하지만 서로 무언가를 주거나 뺏기도 하면서 별개의 루트로 발전했고, 바로 그 점이 좁은 의미의 영화비평을 넘어서 영화와 만화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하나의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을 이루었는지가 문화비평 영역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 2020년에 민음사 인문잡지 <한편> 2호에 실었던 ‘네임드 유저의 수기’를 보완해 ‘자신을 자신하지 않으면서 자신하기’라는 챕터를 마련했다. 왓챠에서 별점을 매기면서 유명세를 탔다가 계정을 폭파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할 때 허영, 야심, 관종적 특성 등 비평가로서의 자신을 메타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솔직하게 노출하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 왓챠 유저일 때의 나는 사람들에게 캐치프레이즈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을 쓰고 싶었다. ‘관종’과 전혀 다르지 않다. 왓챠를 하면서 인정욕구가 많이 채워졌다. 비평집에 이런 주제를 다룬 것은 어느 정도 의도적이고, 의식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이었던 동시에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사람이지’ 하면서 자꾸만 반복하게 되는 자기혐오와 메타적 시선이 오랜 시간 내 안에서 축적되어 글쓰기와 자연스럽게 결부된 결과일 것이다. 언제나 가능한 한 글을 많이 쓰고 싶은 동시에 이 글들을 내 이름으로 발표하고 싶지 않다는 이중적인 마음 사이에서 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까지 어리숙한 인간이라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떠들고 말하고 싶다는 욕심 사이의 대결이 내가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이유다.
- 지금은 별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나.
= 정성일 선생처럼 평론가로서 별점을 매기는 순간 할복 자살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일이라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불가능에 가까운 것은 맞다. 내 경우에 만약 오슨 웰스 영화가 별 다섯개라면, 지난해와 올해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거의 반개 혹은 한개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별점이 꼭 상대적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제가된다. 또 어떤 기준을 내세운다면 그 기준이 항상 모든 영화에 완전히 적용될 수 있는지 그것부터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별점은 이제 내 관심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 영화제에서 평자들의 판단을 즉각적으로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임시적으로 동원하는 별점은 조금 다른 문제이고.
- 202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이전) 같지 않으리-데이비드 린치론’으로 등단했다. 적극적으로 제도 밖에 머무는 비평가이면서 제도적 승인 역시 받은 입장에서, 젊은 평론가들이 각자의 글을 발표하고 소통할 장소가 충분하다고 보나. 비평의 위기는 기회의 문제와 얼마나 연결되어 있을까.
= 그건 좀더 확장해서 생각해볼 문제다. 궁극적으로 시민사회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고 싶다. 공적인 도서관에서 비평의 장을 뒷받침해줄 상황도 못 되고, ‘마을공동체’와 같이 시민적인 공동체들이 자주적으로 영화 상영이나 커뮤니티 같은 것을 지속하기도 어렵다. 그런 문제들이 비평의 불안을 넘어서고 있다. 비평의 위기 혹은 비평가의 위기를 논할 때 사실 우리가 비평해야 하는 건 임금이 낮다거나 주어지는 일자리 혹은 작업이 너무 적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그런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는지를 파헤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홍은화, 조일남, 이보라, 박동수 평론가가 함께하는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 팟캐스트의 멤버이고 최근 동명의 단행본을 발간하기도 했다. 팟캐스트 외에 또 다른 형태로 비평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경험이 있었다면 소개해달라.
= 올해 2월에 열렸던 만화 <지영>의 출간기념회를 예로 들고 싶다. 전체 녹취록이 온라인에 공개돼 있다. 이날 오프닝 공연부터 갑자기 악기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나는가 하면, 참여한 토크(한윤아, 윤아랑, 이연숙 평론가 진행) 중엔 객석에서 한윤아 평론가에게 “당신은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발언하는 등 전반적으로 어색하고 난삽한 ‘우당탕탕’의 현장이었다. 그런데 내가 하려는 말은 그런 분위기가 되게 좋았다는 점이다. 마이크를 쥐고 진행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단상과 청중의 경계가 있었지만 어쨌든 격의 없고 편한 소통이 이뤄지고 있었다. 위계가 없지는 않은데 위계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자리여서 좋았다고 할까?
- 한국영화, 영화인들의 위상을 재조명 혹은 발굴하는 현장 비평가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최근 가진 주제의식과 맞닿은 부분도 있을까.
= 연구자나 이론가라면 모르겠지만 비평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의무라고 말하긴 조심스럽지만. 김홍준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이제는 묻혀진 옛날 한국영화들을 다시 발굴하고 논의하는 것이 더 동시대적으로 유효한 비평 활동일 수 있는 것이다. 문화연구의 영역에서만 다뤄졌던 한국영화들을 끄집어내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가령 <미몽>(1936)을 논할 때 일제강점기하의 영화로서 논하는 것 말고, 1930년대 조선의 영화가 어째서 그렇게 기괴한 양태를 띠고 있고 소비에트 몽타주에 가까운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런 이상한 광경들을 제대로 따져보고 싶다. 어쩌면 연구에 더 가까운 작업일 수 있고 동시대 관객에게 호응을 얻기도 어려울 텐데 그럼에도 이제는 개별 작품을 당대의 좁은 의미에서, 역사나 사회에서 좀 떨어뜨려놓고 봐야 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