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오키쿠와 세계' 사카모토 준지 감독,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희망'
2023-05-12
글 : 이우빈
사진 : 백종헌

<오키쿠와 세계>는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예외적인 작품이다. 지금껏 그의 스타일로 명명되던 강렬함, 거침 대신 섬세함, 따스함의 감성이 가득하다. 시대 배경은 19세기 중반 일본의 에도 시대다. 주인공 셋은 인분을 수거하여 농사꾼들에게 되파는 분뇨업자 청년 야스케와 추지, 그리고 쇠퇴한 사무라이 가문의 외동딸 오키쿠다. 당대 사회에서 하층 계급에 속하던 이들은 경제적 빈곤, 구조적 차별, 가족의 상실을 겪으며 고된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오키쿠와 세계>는 절망보다 희망을 택한다. 이러한 곤궁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과 희망의 가능성이 작품을 뒤덮는다. 90년대 이후 일본의 주요 감독으로 손꼽히며 한국과도 각별한 연을 이어오던 사카모토 준지 감독이 공식 일정으로는 처음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다.

- 19세기 중반의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다. 시대극을 기획한 계기는 무엇인가.

= 시대극에선 인물들이 서로 쉽게 연락할 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연락을 항상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절절한 감정을 더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 아무래도 현대극에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같은 통신 기계가 많지 않나. 또 이런 기기들을 근접 촬영할 때의 까다로움도 잦다. 시대극의 이런 자유도를 늘 바라왔는데 오랜 꿈이 이루어져서 다행이다.

- 시대극인 만큼 영화의 톤 앤드 매너가 무척 고전적이다. 흑백의 좁은 화면 비율부터 해서 크레딧이 작품 처음에 나오는 방식도 그렇다. 특히 오키쿠가 다다미방에서 붓글씨 쓰는 장면은 미조구치 겐지의 구도가 바로 떠오르더라.

= 실제로 영화 촬영 전에 미조구치 겐지의 작품들을 다시 살펴봤다. 평소에 좋아하던 일본의 고전 서민 시대극들을 많이 떠올리기도 했다. 사무라이가 아니라 당대 사회의 서민들이 주인공인 작품들 말이다. 예를 들면 야마나카 사다오의 <인정 종이풍선>을 무척 좋아한다. 에도 시대 도쿄 빈민가의 한 건물 내외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리면서 당시 서민들의 처지를 생생하게 그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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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주요 소재가 인분이다. 자주 등장하니만큼 어떤 영화제의 관객은 4D처럼 후각적 자극까지 받는 것 같다고 하더라. (웃음) 이렇게 과감한 소재 선택의 이유는 무엇인가.

= 프로듀서를 맡은 하라다 미츠오 감독의 제안으로부터 시작했다. 4년 전, 큰 병에 걸렸던 하라다 감독이 사회성 짙은 작품을 찍어 보고 싶단 말을 하더라. 그래서 나에게 세계의 지속 가능성, 순환 경제에 관한 영화를 부탁했다. 다만 나는 사회정치적인 올바름을 영화적 주제의 전면에 내놓는 작법을 즐기지 않기에 고민 중이었다. 이런 찰나에 에도 시대의 분뇨업자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이들이 음식과 분뇨의 순환 과정에 얼마나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됐다. 이런 독특한 방식의 순환 경제라면 충분히 다룰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그간 공개된 수많은 시대극 중에서 이런 주제를 택한 작품은 없었기에 제작을 결심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분명 인분 소재를 다루고 있긴 하나 세 남녀의 청춘 이야기란 점도 잊지 말아 달라. 분뇨 얘기만 나오는 건 다소 곤란하다. (웃음)

- 서사가 총 9개의 단락으로 구분된다. 서사가 자유롭고 물 흐르듯 펼쳐지던 기존의 스타일과는 무척 다른 방식이다.

= 현실적인 이유가 크다. 애초 장편 시대극을 기획했으나 투자 유치에 실패했다. 그래서 우선 프로듀서의 자비로 단편부터 만들었다. 3년 전이었는데 하루 촬영으로 15분짜리 영화가 나왔다. 그런데 또 투자를 못 받아서 2년 전에 15분 분량의 단편을 다시 찍었다. 그제야 장편 투자를 받게 됐고 어쩔 수 없이 여러 단편을 묶는 지금의 형식을 취하게 됐다. 제작사 없이 작업했다 보니 제작 환경이 무척 어려웠다. 12회차 만에 촬영을 마쳤고 직접 가편집본을 만들어 배급사들과 접촉했다.

- 또 특징적인 형식은 각 단락의 마지막마다 짧은 컬러 화면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 과거 사회의 모습이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단 뉘앙스를 표출하고 싶었다. 앞서 말한 재사용, 지속 가능성이나 순환 경제의 필요성을 말이다. 그래서 옛날의 향취가 나는 흑백과 요즘 영화 같은 방식의 컬러를 혼합한 거다. 관객들이 컬러 화면에서 무언가 흠칫하며 이런 의미를 느껴 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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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컬러 화면은 오키쿠의 정말 깨끗하고 하얀 얼굴이다. <얼굴>이란 전작의 제목이나 <어둠의 아이들>에서 아이의 얼굴을 집요하게 확대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항상 인물의 얼굴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감독의 일은 배우의 얼굴을 찍는 거다. 영화의 가장 소중한 것은 이야기다. 구체적으로는 사람의 이야기다. 영화의 구조적인 서사가 아니라 스크린 속 사람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사람의 얼굴과 표정을 클로즈업한다는 건 감독의 연출 기술과 배우의 연기 기술이 가장 밀접하게 겹치는 기법이다. 특히 TV에선 클로즈업을 많이 사용하지만, 영화처럼 긴 이야기에서 클로즈업을 계속 쓰는 건 무리가 있다. 이렇게 자주 쓸 수 없는 만큼 클로즈업의 확실하고 중요한 순간을 잘 택해야 한다.

- 엔딩 크레딧 장면에선 주인공 셋의 산책 장면을 무척 기묘한 화각의 롱숏으로 촬영했다.

= 그 전 장면에서 한 승려가 ‘세계’라는 단어를 저쪽으로 가다 보면 이쪽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세상의 순환이라는 작품의 주제와 정확히 부합하는 대사다. 그래서 화면을 원, 구체의 이미지로 구현했다. 인물들이 저쪽으로 걸어가도 다시 이쪽으로 돌아올 것 같다는 뉘앙스를 주고 싶었다. 영화 렌즈도 아닌 어안 렌즈를 테이프로 어떻게든 카메라에 붙여서 힘들게 촬영했다. (웃음)

- 전체적인 촬영 방식도 평소의 스타일과 달리 무척 정돈되고 차분한 인상을 준다.

=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순수하고 섬세하게 찍고 싶었다. 그들의 일상에 그저 카메라를 들이밀어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어떤 조작이나 꾸밈을 취하고 싶진 않았다. 이전에는 절망적이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그런 영화를 많이 찍었다. (웃음) 그런데 3년의 팬데믹을 거치며 나도 무척 힘들었고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최하층의 사람들이 차별받으면서도 지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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