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이야기가 좋다, ‘무빙’ 강풀 작가
2023-10-12
글 : 임수연
사진 : 백종헌

- <무빙> 마지막 회가 공개됐을 때는 태국으로 가족 휴가를 갔다고 들었다.

= 머리를 비우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태국에서는 디즈니+가 나오지 않아 드라마를 바로 보지는 못했는데, 대신 피날레 시사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인터넷 반응을 계속 검색했다. 내가 본 것은 몇달 전 CG나 색보정이 완성되지 않은 버전이라 완성본이 궁금했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요즘 만나는 사람들마다 <무빙> 얘기를 하지 않나.

= 추석 연휴에 집에 놀러온 친구들도 자꾸 <무빙> 이야기를 해서 “이제 쉬고 싶은데 그만하면 안되냐”고 했다. (웃음) 내가 웹툰 작가였지만 정작 인터넷과는 친하지 않다. 그런데 최근 몇달 동안 핸드폰을 본 횟수가 1년 동안 본 것보다 더 많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기사를 검색한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무엇인지도 처음 알게 됐다. 나한테는 <무빙> 영상만 잔뜩 뜨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도 그런 줄 알았던 거지. (웃음)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내가 배우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 원작 웹툰 <무빙>은 2015년 연재됐다. 작품을 구상하는 데 1~2년 정도 걸리니까 딱 10년 된 작품이다.

= 시간능력자가 나오는 <타이밍>(2005년 연재) 이후에 막연하게 신체능력자의 이야기를 다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생 주인공으로, 한국사와 엮여 있는 스토리로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 2013~14년쯤이다. 한국에서 초능력물을 만들면 어떤 작품이 나오는지 보여주고 싶다는 나름의 야망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 지형에 국한된 데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가 나오지도 않는 드라마를 외국인들이 어떻게 감상할지 무척 궁금하다. 한국에서 본게임은 끝났으니 앞으로 해외 반응이 어떨지 기다리고 있다.

- <무빙> 이전까지 강풀 웹툰의 영상화는 모두 극장 영화 형태로 진행됐다. <무빙>은 드라마 포맷으로 만들어진 이유가 있나.

= 극장 애니메이션까지 합치면 총 7편의 영화가 나왔다. 생각보다 양이 반대하다 보니 한정된 러닝타임 내에 풀다 보면 축약과 변형,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에 늘 직면하게 된다. 내용을 빼면 이야기가 무너지고, 그렇다고 변형하면 원작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영화화 작업에는 제작사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인가를 우선시해서 결정한 뒤 이후 작업에 대해서는 아예 관여하지 않았다. <무빙>은 앞선 작품들에 비해 회차가 길었고 <타이밍> <브릿지> 등 세계관을 공유한 작품들도 있어 드라마가 더 맞다고 판단했다.

- 원래 대본은 다른 작가가 쓰기 시작했는데, 트리트먼트에 이런저런 의견을 내다가 원작자가 직접 각본을 쓰게 됐다.

= 초고에 가까운 러프한 극본을 4회까지 받았다. 만화와 비슷한 구조로 쓱쓱 진행됐는데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조금 다르더라. 그래서 내가 느낀 아쉬운 지점에 대해 의견을 내다 보니 제작사에서 그냥 직접 대본을 써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호러 만화 연재를 두달 앞둔 시점이었는데 덜컥 써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NEW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하고 후회했다. (웃음) 카카오에 연재를 잠깐 늦추자고 말하고 미스터로맨스에 드라마 각본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뒤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포기하고 원래 쓰던 대로 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무빙>은 다른 작가들이 쓴 대본과 많이 다르다. 모든 장면을 그리듯이 썼다. 이를테면 내가 생각하는 정원고등학교는 건물 두개가 마주 보거나 디귿자 구조이며, 주변에 아파트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 결과적으로 무산됐지만 <26년>은 웹툰 이전에 드라마로 논의됐었다. <괴물2> 시나리오를 쓴 적도 있다. 과거의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이번 <무빙>을 쓰는 데 영향을 줬나.

= 그 영향은 별로 없었다. 다만 만화를 그릴 때도 결말까지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절대 연재에 들어가지 않는 성향은 도움이 됐다. 나를 기준으로, 내가 재밌어야 남들도 재밌다는 생각으로 마음에 들 때까지 이야기를 쓴다. 1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대사와 지문이 모두 나와야 비로소 연재에 들어간다. 내가 그림에 대한 재능이 없어서다. 도제 방식으로 일을 배우는 시스템을 건너뛰고 처음 온라인 만화를 시작했을 때 너무 많은 만화가들이 업계에 들어왔는데 누굴 봐도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더라. 가수가 음색을 타고나고 농구 선수가 피지컬을 타고나야 하는 것처럼 그림도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스토리에 집착했다. 댓글에 어떤 반응이 올라와도 조급해지지 말고 내가 처음에 짜둔 스토리를 뚝심 있게 이어간 경험이 <무빙> 극본 작업에 도움이 많이 됐다.

- 바로 다음 편을 보고 싶어지는 지점에서 끝나는, 이른바 클리프행어를 만드는 기술을 공부하기도 했나.

= 오히려 K드라마 특유의 문법을 다르지 않으려고 했다. 초반 7회, 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 한 세트, 이후에는 두 에피소드를 한 세트로 보고 썼다.

- 매주 공개되는 두편의 에피소드가 한편의 영화처럼 보였다. 처음 7회가 먼저 공개된 후 두식(조인성)과 미현(한효주)의 이야기, 주원(류승룡)과 지희(곽선영)의 이야기를 묶어 매주 2회씩 공개되는 방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나.

= 결과물을 보고 나중에 디즈니+와 제작사가 판단한 것이다. 사실 나는 원래 7회, 7회, 6회씩 묶어 세개의 시즌으로 공개되기를 바랐다.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노출 포맷이 훨씬 마음에 든다.

- 웹툰에는 없지만 드라마에 새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원래 <히든>에 나올 예정이었던 프랭크(류승범)의 등장은 향후 세계관에서 한미 관계까지 다루려는 초석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 <히든>은 미국뿐만 아니라 외국과 얽히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 <브릿지>에도 등장하는 신혜원(심달기) 역시 해외 공작원 출신이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무빙>의 앞부분이 워낙 하이틴 멜로에 가깝다 보니 극의 긴장감을 위해 미국에서 온 7명의 캐릭터 중 6번째로 강한 프랭크(A, B, C, D, E, F, G 중 다섯(여섯??) 번째인 F에서 유래)를 데리고 왔다.

- 원작 웹툰에서 봉석(이정하)의 히어로는 슈퍼맨이지만 드라마에서는 번개맨, 즉 전계도(차태현)로 각색된다. 향후 세계관에서 계도의 활약도 기대된다.

= 앞으로도 번개맨은 계속 등장시키고 싶다. 사실 극장 단체관람이 끝난 시간에 맞춰 태국에서 유일하게 전화를 건 사람도 차태현 배우였다. 아무리 버스를 부숴 먹어도 회사에서 안 잘리는 사람으로 만들고, 무리하게 교복을 입게 만들어서 너무 미안하다. (웃음) 싫어할 법도 한데 드라마에 필요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배우라서 정말 고맙다. 사실 난 전계도 캐릭터에 애착이 강하다. 이야기 전체로 봤을 때 가장 소시민적이고 영웅적인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부모를 지키기 위해, 자식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면 전계도는 혈연 관계가 아닌데도 그냥 자주 만나는 학생일 뿐인 봉석과 희수(고윤정)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영광의 순간은 짧게 지나가고 오히려 자신의 능력이 불이익으로 다가왔던 사람인데도 말이다. 전계도야말로 어렸을 때 자신이 연기했던 번개맨 같은 히어로가 됐다.

- 봉석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에필로그는 결국 번개맨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가족애가 인류애, 휴머니즘으로 확장된 것이니까.

= 제작 초반부터 “슈퍼히어로물이 아니다. 심지어 히어로물보다는 액션물에 가깝다”고 말했던 이유는 <무빙>이 가족을 지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히어로는 불특정 다수를 구한다. <무빙>이 히어로의 태동기 같은 이야기라면, 앞으로 가족애는 더 큰 개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 주원과 지희의 멜로를 포함해 전반적으로 캐릭터들의 전사가 구체화됐다. 북한에서 내려온 덕윤(박희순)도 좀더 인간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 사건을 만드는 것은 쉽다. 기발한 소재는 그냥 소재일 뿐이다.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들의 관계가 무엇인지가 충분히 묘사되어야 한다. 만화를 그릴 때는 물리적 시간의 한계로 모든 캐릭터의 서사를 충분히 다루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드라마는 내가 쓴 극본을 표현해줄 조력자들이 있기 때문에 원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다. 캐릭터 한명 한명에 힘을 주며 대본을 썼다. <무빙>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웃음)

- 청계천에서 실종된 소년을 찾기 위해 주원과 재만(김성균)이 힘을 합치는 장면이 드라마에서 추가됐다. 청계천 복원 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진압하는 경찰들도 그 순간만큼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국정원의 지시를 무시한다. 가족애를 넘어선 휴머니즘은 이런 대목에서도 묻어난다.

= 기능적으로 쓰이고 의미 없이 버려지는 캐릭터가 없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는 그게 종종 과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만화를 그릴 때도 가장 비판받았던 지점이 ‘나쁜 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면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는 식이다. 내가 그린 장편 만화 13편 중 <26년>의 그 사람과 <이웃사람>의 살인마를 제외하면 악역이 없다. 그런데 난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이야기가 좋다. 경찰들도 아이가 없어졌다는데 당연히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까. 사실 극본에는 경찰서장의 비하인드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집에 갔는데 그 사람에게도 자식이 있었던 거지. 감독님이 잘 커트했다. (웃음)

- 성선설에 기반한 시선으로 따뜻한 이야기를 고수하는데도 요즘 관객에게 과도한 신파라며 외면받지 않는 것은 역시 노련한 작가의 힘이다.

= 이번에 ‘노란 장판’이라는 표현을 처음 배웠다. 구닥다리 신파를 그렇게 표현한다더라. “주원이 너무 많이 우는 ‘노란 장판’인데도 너무 좋다”고 하더라. 그 사람이 누군지 알게 하면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다. 주원의 전사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사람들은 잘 와닿지 않은 신파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 또 멜로드라마의 힘이 아닐까. 잘 쓴 멜로는 시대와 장르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 회의를 할 때마다 “<무빙>은 히어로물의 껍데기를 쓴 멜로”라고 얘기했다. 미현과 두식, 주원과 지희, 봉석과 희수 모두 멜로의 관계로 갔으면 하는 자세로 대본을 썼다. 마블 영화처럼 다 때려부수는 액션보다는 개개인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 원작 웹툰의 ‘봉석이네 추어탕’이 ‘남산 돈가스’가 됐다. 음식이 바뀐 것만큼이나 안기부가 있던 남산이 전면에 부각된 변화가 눈에 띈다. 미현이 작전 중 북한 간첩을 차마 쏘지 못하고 풀어준다거나 1994년 두식이 맡은 임무가 김일성 암살이었다는 설정이 원작에 비해 훨씬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26년> 영화화가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역시 시대가 바뀌어서일까.

= <헌트>는 아웅산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다. 어느 순간부터, 특히 역사를 기반으로 만든 팩션을 받아들이는 관객, 시청자, 독자들의 저변이 넓어진 것 같다. 창작은 창작으로, 별개의 영역으로 받아들이면서 다룰 수 있는 이야기도 다양해졌다. 시대가 달라졌다.

- <무빙>에는 KAL기 폭파 사건,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심어져 있다. 이들을 선별한 기준이 있었나.

= <포레스트 검프>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에 휘말린 사람들을 다루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초능력자처럼 남들과 조금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분단국가라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다. <무빙>의 결말 역시 남북 관계를 끝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사건들을 조사하며 전개에 맞춰나갔다.

- 연식 있는 사람들은 원작 웹툰에서 김두식이 북한으로 넘어간 시기가 ‘1994년 여름’이라는 묘사만으로도 이 에피소드가 어느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2003년 또 한번 김두식이 북한으로 임무를 수행하러 간 배경은 무엇인가.

= 그 이전에 극 중 배경이 2018년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1호가 판문점에서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거의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됐다. 그래서 과거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에서 프랭크가 온 것이다. 2003년과 1994년 역시 남북의 화해 무드가 존재했다. 통일원에 있는 연보를 보면서 일부러 그 시점에 맞춰 이야기를 구성했다. 또 김두식이 과수원에서 잡힐 때 이 사실을 장주원이 모르게 하길 바랐다. 그래서 청계천 복원사업 시위가 있던 2003년으로 시기를 잡았다.

- <타이밍> <이웃사람>에 이어 이번에도 아이들을 지켜주는 어른들이 등장한다. 이런 모티브가 반복되는 이유가 있나.

= 사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쓰다 보니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약한 사람들을 돕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무빙>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부모에게 양육을 받았던 아이들이 성장해서 세상에 나갈 수 있게끔 한다. 희수는 어떤 어른보다 어른스럽게 남을 보듬어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봉석은 오히려 자기 엄마를 업어주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그래서 마지막 회 부제가 ‘졸업식’이다. 이전에는 별 생각 없이 약자를 보호하는 이야기를 썼다면, 자식이 생기고 난 뒤 자연스럽게 나도 변하게 됐다.

- 분단국가라는 현실, 국가 시스템의 억압이 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어냈고 자식 세대도 그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빙>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시스템으로부터 감시당하고 ‘쓸모’를 평가받는다. <무빙>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에 연재된 작품이기도 하다. 혹시 선배 세대로서 젊은 세대에게 갖는 죄의식이 <무빙>에 반영됐나.

= 2017년 연재한 <브릿지>에서는 세월호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무빙>은 아주 큰 부채감을 안고 만든 작품은 아니었다. 아직 나에겐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안목 같은 건 없는 듯하다. 다만 내가 부모가 된 후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던 감정이 많이 녹아든 건 맞다. 나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생긴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 미현은 괴물이 되기를 택하고 북한 기력자들을 죽임으로써 아이들을 지켜낸다. 어른들의 잘못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극단적인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 원작에서도 북한 기력자는 이미현이 다 죽였다. (웃음) 사실 이미현의 사살은 과거의 방식이다. 그래서 희수가 학교에 도착하기 전 용득을 만나는 신이 중요했다. 모두가 싸우는 가운데 희수는 길바닥에서 마주친 아픈 아저씨를 보듬어준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모습이 화해의 상징이 되길 바랐다. <무빙>을 21부작으로 준비했다가 20부작으로 정리한 이유와도 연결된다. 초고에서는 끝판왕과 같은 두식도 돌아오고 좀더 규모 있는 액션들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뒤에 통쾌한 복수극이 나왔다면 어른들의 과오가 반복되고 희수 장면의 의미가 퇴색되겠더라. 끝부분이 가라앉는 것처럼 보여도 <무빙>의 색깔을 지키고 싶었다.

- 김두식이 남한의 민 차장을, 덕윤이 북한의 보위부장(손병호)을 죽이는 엔딩은 원작과 가장 달라진 지점이다.

= 북한은 김신조를 보내고 남한은 김두식을 보냈다. 체제는 학생들을 국가 재능 육성 사업을 통해 길러내야 할 존재로 보지만, 가족은 결국 자식이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도록 한다. 덕윤은 죄 없는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사람이지만 그 역시 계속 반복되는 악순환을 끊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가 목숨 걸고 자식을 지키는 모습을 보며 그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보위부장을 죽이게 된다.

- 웹툰 <무빙>은 원래 어두운 결말을 생각했다가 휴재 이후 바뀌었다고 들었다.

= 초기에는 봉석이 다크 히어로가 되는 전개를 생각했는데 취지에 맞지 않더라. 남북의 반복되는 반복에 대한 이야기를 <무빙>에서 끝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다음 이야기를 <히든>에서 풀고 싶었다. 전쟁을 쉬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른들이 잘못한 결과를 아이들까지 감당하게 만들어선 안된다.

- <무빙> 곳곳에 숨겨진 이스터에그들이 있다. 투시력을 가진 나주(김국희)의 딸은 사실 죽지 않고 장례식장에 나타난다. <타이밍>의 영탁 역시 정원고등학교를 다니다 전학 수속을 밟는 학생으로 잠깐 등장한다.

= 후속작을 염두에 두고 넣은 것은 아니다. <무빙>의 반응이 시원찮았다면 그냥 열린 결말이 됐지만 지금 분위기가 좋아서 이스터에그가 된 것이다. 원작 팬들에게 약간의 재미도 주고 싶었다. 나주 딸 양세은(이호정)은 사실 성비를 맞추고 싶다는 계산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대부분의 초능력자들이 남자인 경우가 많다. 드라마판에서 추가된 전계도와 프랭크가 남자니까 여성 초능력자가 더 필요했다. 그리고 굳이 나누자면 남자보다 여자가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실생활에서도 결국 아내 말이 다 맞더라. <타이밍>에서 리더라고 볼 수 있는 캐릭터는 박자기였고, <무빙>에서는 그런 역할을 하는 건 이미현이다. 어쩌다보니 대부분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결정은 여성 캐릭터들이 하게 된다.

- <타이밍> <무빙>에 이어 ‘~ing’로 끝나는 초능력자물을 또 기대해도 되나.

= 계획은 있지만 제목은 말하지 않겠다. (웃음) 기존에 나왔던 캐릭터들로만 만들고 싶다. 올해로 만 48살이다. 내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효용기간은 앞으로 10년 정도가 아닐까. 60대가 되어서까지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들을 <무빙> <타이밍> 시리즈에 올인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배우들에게 늘 “우리 길게 가자. 건강 관리 해라”라고 말한다.

- 사실 강풀의 팬들이 가장 목 빠지게 기다리는 작품은 2019년 연재가 예고됐었던 웹툰 <히든>이다.

=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바로 그거다. 내 입장에서는 <무빙> 마지막 회가 나온 지 열흘 정도밖에 안 지났다. 그런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주민 분께서도 “시즌2 언제 나오냐”고 묻더라. (웃음) 내 입장에서는 이런 관심이 너무 감사하지만 머리는 복잡해진다. 내가 <무빙> 시즌2 극본을 쓰게 되면 <브릿지>의 형태가 될 텐데, <브릿지>를 하려면 그에 앞서 <타이밍>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타이밍>은 나중에 프리퀄 형태로 풀어야 하나? <히든>은 드라마로 써야 하나? 이 작업을 모두 하다 보면 앞으로 나는 만화를 그리지 못하게 되는 걸까? 그렇다고 웹툰 <히든> 준비에 들어가면 <무빙> 시즌2는 2년 후에나 시작해야 한다. (이)정하와 (김)도훈이의 군대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인생의 행보가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기로에 서니 50대를 앞두고 다시 사춘기를 겪는 것 같다. 요즘 밤에 잠도 안 온다. 내 몸이 두개 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고민은 깊게 하되 길게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제작진에도 두달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 각본가냐 만화가냐, 그사이에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있겠다.

= 내 본령을 ‘창작자’라고 생각한다면, 만화든 영상이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칠 수 있으면 어느 쪽이든 좋다. 그런데 극본의 재미를 너무 알아버렸다. 예전에는 오히려 만화라서 가능했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만화보다 드라마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졌다. 극본을 쓸 때는 리미트가 풀려버려서 이를테면 100:1로 싸운다거나 학교를 다 부숴버리는 신을 과감하게 넣는데, 마감이 있는 만화를 그릴 땐 이것을 하나하나 그릴 시간이 없어서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만화가인데…”라는 정체성이 남아 있다. 요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 혹시 본인의 웹툰 스튜디오를 세울 생각은 없나.

= 나는 헤드 크리에이터로서 창작 집단을 이끈다거나 회사를 운영할 만한 성격이 안된다. 어쨌든 이야기를 쓰는 일인데 혼자 다 해야 직성이 풀려서 <무빙>도 보조 작가 없이 혼자 썼다. 최종 결정만 같이하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 다 일임한다. 웹툰 작업은 카카오와 의논하고 계약, 판권 관련은 미스터로맨스에 일임했다.

- 류승완 감독, 김제동, 주진우, 가수 이승환 등과 각별한 사이로 유명하다. 언젠가 류승완 감독이 강풀 작가의 웹툰을 연출하는 그림도 상상할 수 있을까.

=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라고 본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친한 사람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면서 재미있게 일하고 싶다. 그런 데서 일의 재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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