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311개의 퀴즈를 풀었다, ‘무빙’ 박인제 감독
2023-10-12
글 : 김소미
사진 : 오계옥

- 액션, 가족 멜로드라마, 하이틴, 냉전물 등이 골고루 뒤섞인 장르로 완성됐다. 작품 방향과 리듬을 잡아가는 초반에 특히 돋보이는 건 고어한 연출이었다.

=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스파이 키드> 같은 느낌은 피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고어함이 내 취향이니까. 작업량이 훨씬 늘어나는 괴로운 선택이었지만 셀 특수분장팀은 물론 제작진이 다 재밌어했다. 그래서 할 수 있었다. 10대들이 나오는 학교 신이 품은 하이틴스러움이나 멜로드라마쪽은 평소에 취향이 닿는 곳이 아니라 깨끗하게 공부하려고 했다. 콘티 그리기 전에 <러브레터>를 다시 봤을 정도다. 시노다 노보루의 촬영을 좋아해서인데 특히 역광을 쓰는 방식을 참고했다. 10대들이 끌고 가는 부드러운 빛감의 장면을 지나 갑자기 프랭크(류승범)가 나타날 때 충돌의 감각이 느껴졌으면 했다. 색으로 치면 갑자기 붉은 원색이 끼얹어지는 것 같은.

- <특별시민>에서 변종구(최민식)의 선거캠프를 구현할 때 ‘독일 파랑색’을 강조했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장면을 완성해나갈 때 색채가 구심점이 되는 걸까.

= 그런 것 같다. 사실 20부작 드라마를 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만드는 입장에서도 보는 입장에서도 20부작은 힘이 드는데, 어떻게든 중도 이탈하지 않고 20편을 따라가게 하는 여러 방편 중 하나로 조화로운 색의 팔레트는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다. 볼거리적인 면도 있지만 그보다 극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힘이 더 중요하다. 시각적으로 집중도 있게 이야기가 묶이는 느낌을 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강풀 작가가 쓴 시나리오에서 원래는 플래시백이 더 많았는데 일부를 과감히 쳐냈다.

- <무빙>의 키 컬러를 하나 꼽는다면 역시 노랑인가.

= 장모님이 결혼하기 전에 궁합을 보셨는데 역술인이 내게는 무조건 노란색이 좋다고 했다더라. 그 뒤로 사적인 영역에서 색을 고민해야 하는 경우엔 그냥 노랑을 고른다. (바짓단을 살짝 걷어올리며) 양말도 노란색으로 통일. <무빙>의 오프닝 폰트, 봉석(이정하)의 외투를 비롯해서 봉석의 양말도 언제나 노랑이다. 어느 날 의상팀에서 갑자기 이정하 배우의 양말을 필요로 해서 내가 신고 있던 것을 벗어준 게 발단이 됐다. 한번 신으니 컨티뉴이티를 맞추기 위해 계속 이어졌고 4회 엔딩에서 희수(고윤정)를 향해 용기내 날아가는 장면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봉석의 노란 양말이 빛난다. 유니클로에서 의상팀이 같은 양말을 수십 켤레 샀다.

- 원작 웹툰을 본 관객들이 기대하는 이미지, 강풀 작가가 시리즈 대본에 녹여낸 시각적 비전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나.

= 강풀 작가의 대본에는 시각적인 부분도 구체적으로 지시되어 있고 각주 부분엔 작가님이 직접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다. 다만 몇몇 실현 불가능한 동선들, 당일 배우들의 감정과 여러 우연의 조화에 따라 현장성을 반영해야 할 부분들은 충분히 열어놓고자 했다. 정말 좋은 순간들은 촬영장에서 탄생한다. 두식(조인성)과 미현(한효주)이 안기부에서 첫 키스하는 장면, 미현이 두식의 심장박동수를 따라 손가락을 두드리는 장면은 철저한 준비와 즉흥성이 잘 겹쳐진 좋은 사례다. 미현과 키스할 때 두식이 붕 뜨는 장면은 말 그대로 천장에 앵커를 박은 와이어에 배우를 매달아야 하는 일이었다. 뚝딱 설치하면 될 것 같지만 천장이 무너질 수 있는 것까지 가정해서 안전 점검을 포함한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그 토대 위에 조인성 배우와 한효주 배우가 자신들의 직감을 더해 예상치 못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무빙>의 인물들은 적지 않게 공중에 머문다. 초능력물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날 수 있다면 저렇게 될 것만 같은’ 현실적인 느낌에 중점을 둔 점이 흥미롭다.

= 많은 장면들이 아날로그한 공정을 거쳤다. 시청자들이 CG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실제로 촬영한 것이고, 직접 찍은 것은 CG로 오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도 내게는 신기한 점이다. <무빙>은 기본적으로 평범한 사람의 초능력을 다루기에 슈트 입고 비행하는 마블의 그것처럼 현란할 수가 없다. 오히려 약간의 어설픔, 현실감이 필요했다. 그러나 김두식에 한해서는 조인성 배우가 보여줄 어떤 멋 역시 필요했기 때문에 공중 부양과 비행에 대한 컨셉을 디테일하게 잡는 데 약간 애를 먹었다. 거의 매일이 처음 해보는 것들의 연속이어서 촬영장에 퀴즈를 풀러 간다는 생각으로 나갔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퀴즈를 매일 푸는 작업이었다.

- <무빙>의 총 촬영 일수는.

= 총 311회차. 그래도 <외계+인> 1, 2부보다는 적다고 한다. (웃음) 중간에 배우와 스탭들이 차례로 코로나19에 걸리면서 디즈니+에 최종 완성본을 모두 넘기는 시점이 올 4월에서 6월로 밀렸다. 하지만 코로나 이슈를 제외하면 밀림 없이 찍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노하우들이 쌓여 현장이 착착착 돌아갔다.

- <무빙>은 각종 세트 촬영의 향연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촬영지가 있을까.

= 북한 주석궁 장면을 송탄(평택) 공군 기지 부근의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스튜디오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때 조인성 배우가 잘 아는 햄버거 맛집에서- 미스리 햄버거였던가?- 햄버거를 잔뜩 사서 돌렸다. 공군 출신이라 여전히 단골 맛집을 기억하고 있는 거였다. <무빙>을 찍는 동안 제주도를 제외하고 전국의 세트장을 돌아다닌 것 같다. <킹덤> 시즌2 때도 비슷했고.

- 엔진비주얼웨이브를 필두로 국내외 수많은 VFX 업체들이 붙어 컴퓨터그래픽 작업을 했다. 작업의 난이도나 획기성 면에서 주력한 부분을 들려준다면.

= 현 상태에서 버추얼 기술과 관련된 영화의 미래 중 내가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분야는 디지털 캐릭터다. 할리우드 미국배우조합이 파업을 내건 이유 중에 AI 배우 문제도 있기 때문에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무빙>을 통해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사용이지만- 디지털 캐릭터를 사용하면서 감독으로서 창의성 영역이 확장되는 경험을 한 것도 사실이다. 액션 신 촬영은 배우의 안전 문제에 대한 염려가 크다. 숙련된 무술팀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완전히 안심할 순 없는데 이때 디지털 캐릭터의 도움을 받으면 안전과 예산 면에서 효용이 커진다. 봉석이 7회 엔딩에서 날아가는 장면, 주원(류승룡)이 삼곡동 골목에서 쫓겨다니다 차에 치이는 장면, 재만(김성균)이 청계천 수로에서 기둥 타고 오르는 액션 신 등이 실제로 찍은 부분과 디지털 캐릭터를 잘 겹쳐둔 장면들이다. 촬영을 끝내고 나면 배우들이 3D 스캔에 참여한다. 그걸 받아서 디지털 캐릭터 작업을 하는데, 앞선 예들처럼 아직까진 어느 정도 가이드가 필요하고 특히 중력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가 어렵다. 인간이 가장 많이 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위인 눈 표현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무빙>에서는 눈을 다친 민용준 차장(문성근)의 눈이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 작은 화면에서의 집중력이나 편안함을 위해 OTT 작품에서 롱숏이 배제되는 일이 흔하다. 클로즈업 과잉의 시대인데 <무빙>엔 대범한 익스트림 롱숏들이 곧잘 눈에 띈다. 초능력자 영화이니 당연한 걸까.

= 확실히 클로즈업이 과하게 쓰이는 경향이 있다. 아까 디지털 캐릭터 이야기했는데, 화면에 사람이 점처럼 작게 보이는 장면은 대부분 디지털 캐릭터라 보면 된다. (웃음) 물론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고 단지 영화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감각으로 널널하고 큰 숏들을 걱정 없이 찍었다. 같은 맥락에서 숏도 지나치게 쪼개지 않는다. 설명적인 드라마터그에 맞는 텔레비전 문법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한때 스타일리시하다고 여겨졌던 현란한 화면이 좀 촌스러운 게 아닌가 싶어서다. 데이비드 핀처가 <세븐>에서 구사하던 스타일을 모두 버리고 <소셜 네트워크>에서부터 담백하게 만드는 것, <마인드헌터>에서 보여주는 고전적인 숏 연출이야말로 세련되었다고 느낀다. 배우의 연기도 같이 가야 하므로 어려운 얘기다.

- 음악이 좋다. 여기서 좋다는 건 음악이 존재감 있게 그 멜로디를 각인하지만 그렇다고 장면을 너무 침범하지는 않는다는 느낌이다.

= 세 작품을 함께하며 지켜본 입장에서는 이번에 달파란 감독이 작두 탔다고 느낀다. <킹덤> 시즌2는 음악이 장면과 조응하는 스코어로 기능하면서 그 자체로는 도드라지지 않기를 원했는데 <무빙>은 반대로 멜로디가 좀 들렸으면 했다. <무빙>에서 봉석이 날 때마다 나오는 테마 음악, 신시사이저 코드로 진행되는 그 음악이 특히 놀랍다. 심플하면서도 레트로한 느낌이 현실에 발 붙인 초능력자들과 잘 어우러진다. 루드비히 고란손의 <만달로리안> O.S.T를 들으면서 같은 테마를 여러 형태로 변주해나가는 방식을 참고했다. 달파란 감독과는 참 각별한 사이다. 한때 연남동 패밀리가 있었는데, 장영규 음악감독, 달파란 형, 백현진 배우이자 어어부 프로젝트의 리드보컬이 연남동 굴다리 너머 한 건물에서 위층, 아래층 오가며 작업실을 썼다. 근처 술집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방준석 음악감독님을 만나 친해지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모비딕>부터 함께하게 되고 <무빙>의 진천으로 백현진 배우가 출연하기도 하고, 뭐 그렇게 된 셈이다.

- <킹덤> 시즌2에 이어 류승룡 배우와 작업했다. 가히 류승룡 수난사일 만큼 호되게 고통받는데, 그 모습이 주는 파토스가 있다.

= 그가 찰리 채플린적 배우라서다. 기본적으로 코미디의 감각이 있는데 <무빙>에서 엉망진창이 되니까 그 진가가 극대화된 게 아닐까 싶다. 승룡이 형이 가장 고민한 이유였고 또 이 작품을 결정하게 된 이유가 된 것이 13화 엔딩(지희를 잃고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주원)이었다. 아무래도 노골적인 장면이니까. 사실은 시나리오에는 13화 엔딩이 아니라 14화의 오프닝이었다. 만약 같은 장면이라도 그 위치가 바뀌어 인트로 시퀀스가 되면 신파적 뉘앙스가 줄어들고 오히려 쿨한 시작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최종 편집 단계에서 더 정직하게 가자 해서 13화 엔딩에 놓았다.

- 처음으로 누군가의 엄마가 된 한효주 배우의 변신도 많은 이들에게 호평받았다.

= 감독이나 배우나 순서대로 찍는 것이 무조건 좋다. 한효주 배우에게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은 한효주 배우의 첫 촬영이 돈가스 가게에서 등교해야 하는 아들 봉석을 깨우는 장면이 됐다. 한효주 배우가 한 일주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퀭한 상태로 나타나서 촬영에 임했는데 그게 화면에도 그대로 보이는 것 같다. <무빙>을 만들면서 봉석의 가족은 중요했다. <허공에의 질주> 속 부부, 리버 피닉스와 그의 첫사랑을 떠올렸다. 한효주 배우가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 내가 보고 싶었던 인물의 모습을 보여줬다.

- 멜로드라마와 취향이 멀다고 했지만 두식-미현의 안기부 파트의 반향이 컸는데.

= 언제나 확실히 끌리는 코드가 있긴 하다. 바보 같은 남자와 공주 같은 여자의 사랑 이야기. 대표적으로는 <노팅힐>, 한국영화로는 <101번째 프로포즈>. 조인성 배우가 너무 잘생기긴 했어도 두식과 그의 아들 봉석 모두 너드 같은 매력의 남자들이다. 원래 대본에는 두식이 그 시절에 맞게 만화 <덩달이 시리즈>의 유머를 구사했는데, 도무지 요즘 세대엔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인천 앞바다의 반대말은? 인천 엄마다!’ 같은 소위 아재개그로 바꿨다. 핵심은 미현과 함께 있을 때 두식이란 남자에게서 뭔가 나사 하나가 빠진 느낌을 보여주는 거였다. 두식에게 미현은 이미 오래전부터 짝사랑의 상대였으므로.

- <킹덤> 시즌2 이후 영화를 준비하다가 <무빙>으로 넘어갔다. 차기 작품은 원래 만지고 있던 영화로 돌아가나.

= 그 시기에 준비하던 영화도 최소 200억~300억원은 필요한 규모였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하고 싶은 작품인데 지금 영화판에서 꿈꾸기가 힘들다. 추석 영화들 스코어를 지켜보면서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언젠간 회복될 거야’ 그저 믿음을 다지는 게 맞는 건지, 극장 밖에서의 작업들을 더 열어놓고 상상해야 하는 건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모르겠다. 일단 다음 작품도 극장 영화는 아닐 것 같다. 이번에 배운 CG 작업의 노하우를 실험해보자는 심산으로 그동안 우리나라에 없었던 어드벤처 장르의 작품을 준비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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