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위기가 시작됐다. 한국 영상 콘텐츠 산업 종사자, 전문가 67인은 2024년을 상징하는 키워드로 ‘불황’을 꼽았다. 산업 지형도에서 경기침체는 이미 주어진 기본값이다. <서울의 봄>을 위시한 몇몇 작품의 선전을 보며 시장 회복의 희망을 읽어낸 이도 있고, 글로벌 진출과 소비자 행동의 변화 양상을 토대로 심기일전을 꾀하기도 한다. 도파밍(흥분 전달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신경세포를 뜻하는 도파민과 게임에서 아이템이나 재화를 모으는 파밍의 합성어.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쾌락을 충족할 만한 행동에 집중하는 태세를 보이는 사회현상을 일컫는다.-편집자)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은 압도적인 유행을 따르지 않는 파편화된 취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누군가의 선택을 따르는 디토 소비(‘마찬가지’를 뜻하는 영단어 ‘Ditto’에서 파생된 용어. 자신의 취향 또는 가치관과 비슷한 특정 인물이나 콘텐츠의 제안에 따라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 트렌드를 뜻한다.-편집자)의 결과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과 효율)를 넘어선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과 효율)가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영상 업계의 의사 결정권을 쥔 리더 67인이 꼽은 2024년 산업의 향방을 5가지의 키워드로 정리했다.(※설문 참여자들의 멘트를 직접 인용하여 재구성하되 멘트별로 당사자의 이름을 직접 기재하지는 않았다.)
불황과 생존
“비정상적으로 팽창했던 산업의 거품”이 빠지면서 “콘텐츠 산업 전체에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는 진단은 과장이 아니다. 2019년 한해 천만 영화가 네편이 탄생했을 때만 해도 극장영화는 통신사 할인을 받아 그럭저럭 2시간 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가 생활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와 티켓값 인상이 극장영화를 선택할 유인을 빼앗아간 사이 유튜브와 OTT 플랫폼, 최근의 숏폼의 인기는 훨씬 가성비 좋은 오락이 됐다. 문제는 팬데믹 이전에 기획된 영화들은 스타 캐스팅을 내세우는 성수기 블록버스터가 혹평을 받아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던 시절에 투자를 받았고, 실제 관객을 만나기까지 시간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관객의 행동 양상이 달라지면서 극장영화 시장에서는 어느 정도 스코어를 보장받던 전통적인 성수기가 무너졌다. “코로나19 이후 계획된 방학, 명절 연휴 등을 중심으로 해외여행 및 야외 활동으로 수요가 쏠리고,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매스 마케팅 및 와이즈 릴리스의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성수기 개봉 초반 일시적인 관객 동원을 통한 흥행 역시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지난 몇년간 톱스타가 포진한 고예산 오락영화가 처참한 성적표를 받으면서 투자 시장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콘텐츠 제작 및 유통 환경이 악화되면서 자본의 보수성이 강화되고 기존 대형 업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다양성이 악화됐다”는 시장 양극화에 대한 지적은 지금의 위기가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때 극장영화 위기와 대비돼 호황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던 OTT 시리즈도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 편성이 확정되지 않은 채 촬영을 마친 작품들이 아직 플랫폼을 찾지 못해 난항을 겪고 있다. “투자 규모나 플랫폼은 한정적인 반면 투자 혹은 공개(개봉)를 기다리는 작품 수는 점점 늘어나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K콘텐츠의 힘은 뜨거워 보이지만 실제 그 속은 차갑게 얼어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생존’을 강조했다. 스포츠, 공연 등 문화 소비 매출이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한 것처럼 콘텐츠 산업 역시 회복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형 투자사가 제작사들을 인수하고 레이블화”하는 구조 재편을 수반한다. “플랫폼과 채널 수가 한정된 가운데 제작비는 계속 상승하고 있어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다양한 제작 방식이 등장할 것이다. 합종연횡과 변종도 계속될 것이다.” SLL과 CJ ENM 스튜디오스, 카카오가 다양한 제작사를 인수하며 몸집을 키워가는 것이 그 예다. 그 결과 “투자사가 직접 레이블의 제작 라인업 및 예산 관리 등에 개입해서 투자·제작이 보다 밀접하게 관계하고 기획은 자연스럽게 작가 및 원천 IP를 핵심으로 하는 쇼러너 중심의 영역으로 분리되는” 경향을 점치는 의견도 있었다.
숏폼과 도파밍
기존 방송국 예능보다 유튜브 채널의 화제성이 더 뜨겁고 틱톡과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등 숏폼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응답자들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채널에 대한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는 요즘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트렌드” 중 하나로 숏폼을 호명했다. 그리고 “자극적이고 점점 짧아지는” 숏폼의 인기는 최근 소비 트렌드를 요약하는 ‘도파밍’, 즉 “짧고 강렬한 자극을 추구하며 도파민을 충족”시켜주는 콘텐츠를 “즐기는 것을 넘어 좇는” 현상과 연결된다. 도파밍은 “아직 팬데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제적 상황과 일상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무언가”로서 “향후 한국 콘텐츠 산업의 방향성과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서울의 봄>의 흥행 역시 “짧고 강렬한 자극을 추구하는 대중의 취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었다. 이를 두고 “자극적인 영상 미디어의 소비 형태가 학적인 사색을 할 여유를 주지 못하지 않나 우려된다”는 의견도 존재했지만, “콘텐츠 업계의 역할은 도파밍 유행에서 오는 폐해를 채워줄 수 있는 지점에 있다”며 정반대로 “몰입도를 높이고 의미를 찾게 하는” 데서 가치를 찾기도 했다.
글로벌 시장과 다양성
모두가 수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벌 시장은 많은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K팝과 K드라마의 세계적 인기가 지속되면서 올해 그 추이가 정점에 이르기 않을까” 예상되기 때문에 오히려 “폭넓은 시각으로 다양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응답자들의 주된 의견이다. 내수시장만을 대상으로 할 때는 소비층에 한계가 있을 마니악한 기획도 전세계로 무대를 넓히면 훨씬 많은 이들에게 선택받을 수 있다. 그렇게 “전세계가 동시에 같은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시대에는 “콘텐츠의 길이, 플랫폼, 형식은 더이상 관람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소비는 보편적인 것을 따라가기보다는 개인의 취향으로 움직”인다.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 요소를 다양하게 접목시키는 드라마 및 영화. 사회적 다양성이 보일 수 있는 소재 또는 스포츠, 게임, 기술적 요소가 통합된 콘텐츠로 유저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콘텐츠가 시장에서 차별화될 수 있다. 공장 대량생산이 아닌 소수의 취향에 맞춘 소량생산이 브랜드 가치를 창출하는 환경에서는 “대다수의 불특정 다수를 만족시키는 작품보다는, 분화된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장르의 다양성과 높은 퀄리티가 중요”해진다. 다양성은 생존을 위한 필연 조건이 됐다.
인공지능
지난해 할리우드 작가 및 배우 파업은 AI가 이들의 영역까지 침범할 수 있고 업계 또한 이를 막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위기의식에서 시작됐다. AI로 전면 제작된 영화는 저작권을 인정받았다. 실제로 AI는 “콘텐츠 제작 방식의 변화, AI의 인력 대체, 제작비 효율화 등 기존 산업구조를 탈피하려는 여러 시도”와 함께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AI는 보조 작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저작권료부터 자유로워지는 간단한 음원 취득도 가능해지고 있는 추세다. 아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창작 기능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과정에서 요구되는 에너지와 시간은 확실히 단축시키고 있다.” 인공지능은 콘텐츠 기획에도 참여할 수 있다. 2024년 오픈 AI의 일반인공지능(AGI) 공개가 이루어지면서 “AGI를 이용한 콘텐츠 개발, 작품 제작에 대한 아이디어가 본격적으로 쏟아질 것”이라고 전망한 의견도 있었다. “설마 미래 사회에서 벌어질까 싶었던 일들이 이제 일상 곳곳에 녹아져 있다. 1인 가구가 증가하고 편리함을 추구함에 따라 다양한 AI가 접목된 기기, 애플리케이션 등이 일상을 주도하는 시대로 넘어갈 것이다.”
가성비(시성비)와 디토 소비
가성비를 넘어선 시성비의 시대다. 먼저 대중들은 팬데믹을 거치면서 극장 티켓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OTT나 유튜브를 통해 비슷한 효용을 누릴 수 있다고 체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화산업이 아직 회복되지 않고 각종 플랫폼의 수익성이 악화”됐다. “2023년 한해를 기점으로 투자의 ‘가성비’가 떨어지는 성적표가 나오면서 빅 타이틀 위주로 편성되던 주요 투자배급사 라인업이 빠르게 재편되기 시작했다. 앞으로 절대적인 작품 수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 기존의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 베이스의 대작들보다는 합리적인 예산 규모의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기획·개발될 것이다.” 이는 최근 한국영화계의 화두가 된 ‘세대교체’와도 연결된다. “당장 제작비 규모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어려운 베테랑 감독들의 빅 프로젝트보다는 젊은 창작자들에게 타이트한 프리프로덕션과 제작 시스템 안에서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밤이 되었습니다> <하이쿠키> 등 신인배우들이 포진한 장르물이 넷플릭스에서 높은 순위에 오르고, 리얼리티 예능이 전성기를 누리는 것 또한 “비용 대비 효과를 노리는 콘텐츠 기획이 증가”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수년간 대중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친 Y2K와 아날로그 역시 이같은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좀비, 크리처, 재난영화 등 화려한 VFX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는 잠시 주춤할 듯하다. 비주얼에만 집중하고 스토리는 허술한 이전의 블록버스터에 대한 회의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 가족에 대한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시간 대비 성능과 효율을 의미하는 신조어 ‘시성비’의 등장은 바쁜 현대인에게 시간 활용의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콘텐츠의 길이는 점차 짧아지고, 긴 콘텐츠를 소비할 때는 즐거움이 보장된 콘텐츠를 선택”하기 때문에 “콘텐츠 제작자는 수용자들에게 시성비 높은 콘텐츠와 그 수용환경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과 취향이나 생각이 비슷한 대상, 이를테면 스타나 인플루언서를 추종해서 시간낭비 없이 콘텐츠를 선택하는 형태”를 보여주는 이른바 ‘디토 소비’ 역시 시성비를 추구한 결과다. “소비해야 할 콘텐츠의 양과 비용이 높아지면서” 타인의 평가가 어떠한지가 중요해졌고, “선행자들의 평가를 보고 소비를 결정하는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