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특집] 플레이브 팬덤의 애정의 근거, 버추얼 아이돌은 어떻게 진정성을 가지게 됐나
2024-03-29
글 : 강은교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

버추얼 엔터테인먼트 기업 블래스트(VLAST)에서 제작한 5인조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PLAVE)가 MBC <쇼! 음악중심>에서 2주 연속 1위를 거머쥐면서 버추얼 아이돌에 부쩍 관심이 모이고 있다. ‘2D’ 캐릭터의 외형을 한 ‘3D’ 아이돌이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 탓인지 이들의 인기를 설명하고자 하는 여러 분석은 이들의 가상성에 어느 정도의 의미를 부여할지를 두고 양쪽으로 갈리는 듯하다. 버추얼 아이돌이 여러 세속적인 사건, 사고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간’ 아이돌에 비해 향유하기 안전하다는 분석은 버추얼 아이돌의 가상성에 의미를 적극 부여하는 쪽이다. 반면, (특히 플레이브의 경우) 멤버들이 자체 제작하는 음악 및 라이브 방송과 소셜미디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진정성이 팬들에게 어필한다는 분석은 이들 캐릭터의 가상성에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는 쪽이다. 내겐 그 어느 쪽도 충분한 설명 같지 않은데, 전자의 경우 K팝 아이돌에게 부과되는 행동 규범이 갈수록 세분화되면서 그에 비례해 커진 ‘논란’의 리스크를 인간의 물질성 또는 세속성을 소거함으로써 줄일 수 있으리라는 산업의 막연한 희망사항에 가깝기 때문이고, 후자의 경우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닌 인간적인 진정성’이라는 막연히 낭만적인 수사에 기댈 뿐 막상 K팝 아이돌과 그 팬덤에 진정성이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논문 ‘케이팝 아이돌의 자필 사과문: 손글씨의 진정성과 팬덤의 소비자 정체성’에서 ‘3세대 아이돌 산업의 친밀성 구조’를 분석한 장지현의 논의를 빌려 K팝에서 진정성의 의미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K팝 아이돌의 진정성은 아이돌의 전면(뮤직비디오나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세계관’ 속 캐릭터로서의 페르소나)과 후면(리얼리티쇼나 라이브 방송 등에서 드러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자아)을 이어 일관된 ‘캐해석’ 또는 ‘서사’를 정립하는 팬들의 해석 노동을 통해 구성된다. 팬들이 만들어낸 아이돌의 캐릭터와 서사는 기획사와 제작사, 그리고 아이돌 본인에게 되먹임(feedback)되어 K팝 콘텐츠 전반 및 아이돌의 팬 서비스에 반영되고, 이로써 다시금 증명되는 전면과 후면의 일관성 또는 기대와 실제의 일치는 아이돌의 진정성을 강화한다. 이렇게 아이돌과 팬덤이 하나의 되먹임 고리로 끊임없이 순환하며 만들어낸 캐릭터와 서사, 그로부터 발생하는 진정성과 친밀성의 감각은 아이돌과 팬덤이 배타적으로 공유하는 하나의 가상적 현실(virtual reality)로서 기능한다. 그것이 가상적인 까닭은 물리적 실체나 공간이 아닌 담론적 규범과 수행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며, 현실인 까닭은 만약 아이돌의 불성실한 행동으로 인해 기대와 실제가 어긋날 시 아이돌의 진정성이 훼손되었다고 판단, 이를 회복하기 위해 자필 사과문 작성에서 그룹 탈퇴에 이르는 실제적인 대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버추얼 아이돌이 ‘K팝’ 아이돌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상적 현실의 존재감과 구속력은 아이돌과 팬덤 사이의 쉼 없는 소통을 가능케 한 팬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증대됐다. 팬들이 아이돌 스타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이 공개방송 참여, 숙소 앞에서 죽치기(?) 정도밖에 없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 팬들은 라이브 방송, 프라이빗 메시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팬 플랫폼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아이돌 스타에게 닿을 수 있다. 팬 플랫폼을 통한 실시간 소통은 아이돌과 팬덤 사이의 되먹임 회로를 빠르게 작동시키면서 진정성과 친밀성의 감각을 극대화한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궁여지책으로 도입된 영상통화 팬 사인회는 오히려 더 높은 앨범 판매량을 견인하면서 엔데믹이 선언된 이후에도 K팝의 뉴노멀로 자리 잡았다. 말인즉슨, 이제 아이돌과 팬덤이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모든 주요 장면이 기술에 의해 직접적으로 매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사이에 가상현실(VR) 기술이 끼어들지 못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플레이브가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개념적·시각적 생소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팬덤을 확보하고 공중파 음악방송 1위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근 몇년간 급격하게 변화한 K팝의 미디어 환경과 팬덤 문화가 자리한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스마트폰 화면 저편에 있는 것이 ‘진짜’ 사람인지의 여부보다 아이돌과 팬덤이 배타적으로 공유하는 가상적 현실을 구성할 수 있는 지속적이고도 역동적인 소통이 가능한지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아이돌과 팬덤의 친밀성 구축

물론 도전이 없지는 않다. 플레이브의 경우 다른 어떤 K팝 아이돌보다 전면과 후면의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플레이브 멤버들의 외형은 서브컬처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한눈에 각자의 성격이나 포지션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정형화된 ‘모에’ 공식을 따르지만, 이는 K팝의 기존 진정성 문법과 동떨어져 있기에 양자를 일치시키기란 쉽지 않다. 이때 개입하는 것이 각각의 캐릭터 ‘뒤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사적인 배경이다. 플레이브의 멤버들이 과거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한 이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이 이전의 데뷔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은 플레이브라는 아이돌의 전면과 후면을 잇는 팬덤 서사에서 가장 강력한 축이 되는데, K팝 아이돌과 팬덤이 공유하는 가상적 현실은 무엇보다 이들이 아이돌의 성공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공동체적 관계라는 합의하에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때 플레이브 멤버들의 2D 외형은 역설적으로 각각의 멤버들이 ‘사람’으로서 살아온 지난 삶을 유추하게끔 하는 매개가 되면서 멤버들에 대한 팬들의 애정과 애착을 깊게 한다.

플레이브가 K팝 아이돌 팬덤의 진정성 규범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라이브 방송 중 시청자들이 보내는 도네이션을 대하는 멤버들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K팝 아이돌과 팬덤이 공유하는 가상적 현실이 상당 부분 팬덤의 열정적인 소비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팬들은 온오프라인 팬 사인회에 참여하기 위해 수십장에서 수백장에 이르는 앨범을 번들로 구매하며, 팬 플랫폼에서 ‘최애’와 소통하기 위해 (SM 엔터테인먼트에서 개발한 프라이빗 메시지 서비스 ‘버블’의 경우) 멤버당 4500원의 월정액을 결제한다. 그런데 아이돌과 팬덤 사이의 친밀성이 이처럼 소비를 매개로 조건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이돌과 팬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만 통용되며 결코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아이돌과 팬덤은 친밀성이 거래되고 있음을 서로 인지하지만, 이들만이 공유하는 가상적 현실을 진정한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즉 팬덤이 아이돌에게 느끼는 애정과 애착이 그저 금전을 매개로 한 ‘가짜’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느끼는 ‘진짜’임을 보장하기 위해서 이를 티내지 않는 것이다. 플레이브의 멤버 하민이 생일 기념 라이브 방송에서 팬들이 함께 마련한 큰 금액의 도네이션을 받자 당황해 허둥지둥대는 모습, 이를 팬들이 ‘순수하다’며 환영하는 모습은 이들이 (도네이션 금액에 상응하는 ‘리액션’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여타 버추얼 스트리머들과는 달리 철저히 K팝 아이돌의 문법을 따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플레이브가 데뷔 1주년을 맞이한 지난 3월12일, 제작사 블래스트는 앞으로 모든 선물, 서포트, 도네이션을 받지 않겠다고 공지했다. 이는 플레이브가 앞으로 더더욱 K팝 아이돌의 진정성 문법을 따를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앞으로 플레이브를 위시한 버추얼 아이돌이 기존 K팝 아이돌의 진정성 문법을 어떻게 활용하면서 변주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