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기준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영화계에 처음 입문한 ‘1980년대 이후’ 출생자 혹은 ‘장편영화 3편 이하를 연출’한 감독이다. 이창동, 홍상수처럼 전통적인 작가주의 감독은 물론 봉준호와 박찬욱이 장르영화로 칸영화제에서 성과를 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충족하는 행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세대다. 이들은 CJ ENM,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NEW 등 투자배급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 영화산업 지형도가 굳어지고 한국영화아카데미 등 영화학교가 독립영화 제작의 주된 허브 역할을 하던 시기에 활동했다. 그럼에도 주류 밖에서 지속적인 영화 만들기를 고민하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김보라
여성의 성장기는 미시사가 아니라 영웅담이 될 수 있을까? 사회적 비극과 공명하는 동시에 자기 서사의 내밀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 김보라 감독이 대답처럼 내놓은 <벌새>의 출현은 여성 서사의 필요와 중요성에 대한 인지가 본격적으로 재공유된 2018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등장한 영화 중 가장 고른 대중적 지지와 평단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김보라 감독은 인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사려 깊은 시선과 통찰을 장면의 서정과 결부해내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다. 클라이맥스 스튜디오와 손잡고 김초엽 작가의 단편소설 <스펙트럼>을 영화화 중인 그가 한층 방대해진 프로덕션 규모와 SF적 상상력을 얼마나 아름답게 장악할지 기대된다. /김소미
김세인
미디어가 고착시킨 모녀의 이미지에 매몰되지 않은 채 둘의 갈등을 그리면서도, 엄마와 딸 각각을 독립적인 존재로 바라본다. 특히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는 중년 여성을 묘사하는 솜씨가 도드라진다. <같은 속옷을 입은 여자>로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상을 비롯해 10관왕에 이르는 등 김세인 감독은 장편 데뷔작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단편 <불놀이> <컨테이너> <햄스터> 등에서부터 이어진, 인물들의 “이면의 감정과 이야기를 다루는 뛰어난 조율사”(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의 면모가 그의 다음 행보를 눈여겨보게 한다. /조현나
김용훈
CJ엔터테인먼트 기획, 제작, 투자팀을 두루 거친 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로 데뷔한 김용훈 감독은 올해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을 통해 “상업영화를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는 능력”(송종희 분장감독)이 확실한 연출자임을 증명했다. 데뷔작에 이어 첫 시리즈에서도 인기 원작의 핵심을 훼손하지 않되 창의적으로 각색하고 자기만의 시각적 스타일을 구사한 그는 영상화가 활발히 이뤄지는 요즘 시대에 특히 주목할 만한 창작자다. 앞으로 그가 어떤 장르적이고 상업적인 감각을 십분 발휘한 작품으로 대중을 매혹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유채
변성현
차세대 스타일리스트 감독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름. 이야기의 밀도보다는 진득한 감정을 형상하는 데, 감각적인 편집과 과감한 카메라워크로 관객의 눈을 홀리는 데 변성현의 장기가 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은 브로맨스라는 위장을 걷어낸 명백한 멜로영화였고 한국영화 팬덤의 역사를 새로 쓴 기념비적인 작품이 됐다. 1970년대 정치판 이야기(<킹메이커>)도 그를 거치면 세련된 멋과 치정이 남는다. 무엇보다 변성현은 성패에 휘둘리기보다는 묵묵히 결과물을 쌓아가는, 꾸준함의 미덕을 보여준다. <청춘 그루브>부터 <길복순>까지 13년 동안 5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또래 감독 중 가장 부지런한 행보를 걷고 있다. /임수연
엄태화
장면에 회화적인 인상을 불어넣는 능력, 흔적으로나마 간직한 B급 유머의 돌출 등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여러모로 천편일률적인 텐트폴 영화의 경향에 숨통을 틔운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의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한 엄태화 감독은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스릴러 <숲>으로 처음 주목받은 뒤 <잉투기>와 <가려진 시간>에서 특유의 스타일과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팬데믹 이후 암울한 극장가에 구원투수로 나선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뜻밖에 엄태화 영화의 대중성, 확장성까지 입증하면서 “자기 색깔을 고수하면서도 대중적 요구에 세밀하게 맞출 수 있는”(임순례) 그의 미래는 더욱 밝아질 전망이다. /김소미
이상근
<엑시트>는 기존 재난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듯하지만 영리하게 비튼다. 소재를 대상화하거나 고통을 착취하지 않는 미덕은 물론 청년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건강한 메시지를 군더더기 없이 담아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영화에 남겨진 윤리적 숙제(이를테면 학생들의 희생이 상상되는 신을 다루는 방식) 또한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엑시트>가 대중 오락영화로서 거둔 성취는 더더욱 조명될 필요가 있다. 올해 여름 개봉할 미스터리 장르 <악마가 이사왔다>에서 그가 몸담고 있는 외유내강의 안정적인 프로덕션과 이상근 감독의 성실함이 또 한번 빛나기를 바란다. /임수연
윤단비
일상의 풍경을 기반으로 상실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준 <남매의 여름밤>. 2020년 공개된 첫 장편과 함께 윤단비 감독은 특정 세대에 한정되지 않는 노스탤지어를 담담히 이끌어냈고, 다큐멘터리 <어나더 레코드: 이제훈>을 통해선 인물을 디테일하게 탐색하는 탐험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스토리가 가장 중요해 보이는 한국영화계에 나타난 샛별”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감성,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시대의 정서를 시각화하는 능력이 훌륭”(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한 또 한명의 귀한 창작자다. /조현나
이옥섭
이옥섭 감독은 ‘이옥섭 월드’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흥미로운 연출자다. 단편 <4학년 보경이>(2014), <연애다큐>(2015), <걸스 온 탑>(2017)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시선은 장편 데뷔작 <메기>(2018)에 이르러 만개한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커머셜 필름과 예능을 통한 영상 작업에 참여하면서 대중적 친화력을 높이고 확장성을 탐구해왔다. 장편 차기작 소식이 뜸한 그에게 김영우 프로그래머가 지지의 말을 전해왔다. “단편에서 보여준 놀라운 재능과 감각이 곧 빛을 발할 거다. 그러니 어서 칼을 뽑으시길!” /이유채
이정홍
이정홍 감독을 향한 궁금증은 그가 누구보다도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줄 것이라는 기대와 직결된다.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해 무주산골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를 거치는 동안 평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괴인>은 지난해 개봉 이후 <씨네21>이 꼽은 올해의 영화 1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광고 업계와 이창동 감독의 연출부를 병행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그는 사건과 서사로 수렴되지 않는 내러티브, 기이한 리듬감, 불쑥 출현하는 관계의 균열과 감정적 흔들림을 보여주는 작가다. 그는 현재 <괴인> 이전부터 조금씩 준비해온 차기작 시나리오를 막 탈고했다. 이정홍이 안겨줄 두 번째 충격이 너무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에 우리 앞에 당도하기를 바란다. /김소미
이종필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서보는 게 소원인 시민들(<전국노래자랑>),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컸던 조선시대에 판소리에 도전한 여성(<도리화가>), 1990년대 대기업의 비리를 고발하는 말단 직원들(<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종필 감독은 현실의 벽에 굴하지 않는 이들의 서사를 꾸준히 다뤄왔으며 끝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인물의 행보를 바탕으로 스크린 너머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뛰어난 연출가다. 올해 초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별로인 내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인간의 공통된 마음”을 건드리고자 했다는 차기작 <탈주>에서도 그의 장기가 발휘됐을지 주목해볼 만하다. /조현나
임대형
한국 중년 여성의 퀴어 멜로드라마 <윤희에게>(2019)에 이어 올해 작심한 불륜 블랙코미디 <LTNS>(공동 연출 전고운)를 쓰고 연출한 임대형 감독은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사랑 이야기를 만드는 독특한 로맨티스트다. <윤희에게>로 제41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받은 뒤 “LGBTQ 콘텐츠가 자연스러운 2021년이라 기쁘다”라고 소감을 전했던 그는 <LTNS>에서 각양각색의 커플을 세심하게 매만진 뒤 전면에 등장시켰다. 다양성의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현 미디어 산업에 꼭 필요하고 적합한 창작자임이 틀림없다. /이유채
장우진
춘천에서 자란 장우진 감독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재료로 다양한 미학적 시도를 해왔다. 첫 장편영화 <새출발>이 청년세대의 현실을 자연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을 추구했다면, <겨울밤에>의 비선형적인 시간은 여러 개의 서사를 겹쳐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공간을 끊임없이 캐릭터화하는 꿋꿋한 기질과 소박한 캐릭터들을 아름다운 미장센 속에서 애틋하게 만드는”(문성경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점이 특히 탁월하다. “제작과 내용에서 주류사회로부터 거리감을 두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문성경 프로그래머)해온 그는 단연 “젊은 세대 중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가진 몇 안되는 인물”(문성경 프로그래머)이다. /임수연
정주리
정주리 감독은 약자가 마주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각색해 영화화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온 창작자다. 의붓아버지와 친구들로부터 학대받는 아이의 이야기를 다룬 <도희야>에 이어 10년 만에 내놓은 <다음 소희>에서는 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학생이 결국 죽음을 택한 실화를 스크린에 옮겼다. 두 작품의 공통된 미덕은 사건을 적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개선의 여지를 찾아보려는 작품 내적인 시도에 있다. 사태를 냉정히 고발하면서도 변화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 올곧게 영화의 힘을 믿는 창작자다. /조현나
장재현
천만 영화의 상징성을 무려 오컬트 장르로 획득해낸 감독. 장재현의 존재감은 그것만으로도 설명된다. 그러나 장재현을 향한 믿음은 <파묘> 이전으로 시계를 돌린대도 유효하며 오히려 더 굳건하다고 볼 수도 있다. 상업영화로 준수한 성적을 거둔 감독 중에서는 드물게, 그는 마이너 장르의 전통과 한국적 개성을 집요히 연구해왔다. 단편 <12번째 보조사제>를 장편화한 <검은 사제들>을 시작으로 <사바하>에서 한층 더 벼려낸 접근법을 보여준 다음, <파묘>에 이르러서는 한국 역사와 신앙을 히어로 영화적 쾌감까지 확대했다. <파묘>에 관한 뜨거운 호불호 논쟁까지도 어쩌면 이 연출자의 뚝심 혹은 대담함의 방증일 것이다. /김소미
홍의정
2020년 <소리도 없이>로 장편 데뷔를 한 홍의정 감독은 차기작 소식이 없음에도 관심을 거둘 수 없는 연출자다. <소리도 없이>는 그만큼 강렬했고 자기 색이 선명했다. 살인과 유괴를 소재로 한 범죄드라마지만 폭력을 전시하지 않았고 이 장르의 문법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기묘한 분위기와 리듬이 압도적이었다. 유괴범 캐릭터에 설득되게 하는 깊은 감정 묘사는 신선한 매력을 주었다. 지금 어딘가에서 그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 않을까. 이번 호명이 유망한 신인감독의 근황을 가져다주길 바란다. /이유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