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영화비평과 ‘필름적 현실’의 특권화, 하스미 시게히코 ②
2024-04-06
글 : 송경원
글·사진 : 이우빈

- 존 포드는 브레히트적인 영화 작가이면서 모럴의 가치를 숏으로부터 격리하는 영화 작가로 이해된다. 모럴을 중시하지 않는 존 포드라는 영화감독의 역사적 위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가 존 포드를 격하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에 있어서 유일한 모럴이란 숏과 그 연쇄- 토키가 되고 나서는 거기에 음성도 더해질 것이지만- 에 걸맞은 작품을 접해야 한다는 체험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1950년대의 <카이에 뒤 시네마>에 의한 존 포드의 극단적인 과소평가는 문자 그대로 모럴이 결여된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심지어 <수색자>도 그 공개 연도의 ‘베스트10’에서 배제되어 있으니까. 물론 그런 풍조를 조성한 장본인인 앙드레 바쟁을 비롯해 많은 비평가와 영화 작가들도 이윽고 그 잘못을 깨닫기는 했다. 그러나 트뤼포가 포드의 위대함을 깨달은 것은 그 감독의 죽음 이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고다르는 잘못을 빨리 깨닫고 1961년 <카이에 뒤 시네마>의 베스트10에서 갑자기 포드의 최선의 작품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말 위의 두 사람>(1961)을 1위로 꼽았는데, 1956년에 <수색자>를 베스트10에 넣지 못한 자신의 죄를 탕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또 장마리 스트로브가 “어느 때, <아파치요새>(1948)의 훌륭함에 천계처럼 눈을 떴다”라고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포드 특집호’에서 말해 보인 것은, 포드의 죽음으로부터 20년이나 지난 1990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편집장 교체로 다시 한번 포드를 평가하기는 했지만 월간 영화잡지로서 1950년대 포드를 과소평가한 것에 대한 죗값을 제대로 치렀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최근의 영화들은 너무도 선명하다. 4K 디지털로 촬영하는 영화들의 대개는 너무 선명해서 안 보이는 것이 드물다.

=선명함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대부분의 영화에선 그 목적을 잘 느끼지 못하겠다. 영화란 분명히 스크린 위에 선명하지 않은 화면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한 선명함의 부재가 있어야만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최근 선명한 것에만 집중하는 영화들은 어떻게 그 선명함의 부재를 표현할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 많은 평론가는 비평 작업의 끝없는 불안정과 실패를 이야기한다. 이런 불안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말과 글로 옮기는 게 가능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나는 한편의 영화를 대상으로 분석함에 있어 영화의 ‘필름적인 현실’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둔다. 이것은 문학에서 소설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 있어서 작품의 ‘텍스트적인 현실’이라고 부른 것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소설의 경우 그 세부 사항을 다시 책에 인쇄된 기술로서 정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시각적인 세부를 되새길 수 없는 영화의 경우 다 보고 난 후 시각적 ‘현실’은 시야에서 깨끗하게 소멸하고 만다. 물론 북미를 중심으로 전편의 숏을 시작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기술하는 작업이 하나의 ‘연구’로 간주된다. 하지만 언어기호와 달리 셀 수 없을 정도의 시각적, 음성적인 세부로 구성되어 있는 숏의 ‘필름적인 현실’을 앞에 둘 경우 이러한 시도는 한계가 있다. 그걸 말과 글로 풀어내는 것은 비유하자면 일종의 번역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비평’은 ‘필름적인 현실’의 세부를 특권화해도 상관없다고 우리에게 속삭이는 작업이다.

- 그 연장에서 <존 포드론>에서 ‘던지는 행위’에 대한 특별함을 언급했다.

=예를 들면 <아파치요새〉의 장교 존 웨인과 중사 페드로 아르멘다리스가 높은 바위산 위에서 말에서 내려 골짜기를 향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이 있다. 두 군인을 정면으로 포착한 숏으로 존 웨인이 페드로 아르멘다리스에게 술병을 내민다. 그러자 어쩌면 전 남군의 장교였을지도 모르는 아르멘다리스는, “당신은 북군 병사 중에서 가장 훌륭한 남자”라고 말하면서 지금 막 삼킨 술병을 웨인에게 돌려준다. 그것을 받은 웨인은 큰 모션과 함께 술병을 골짜기를 향해 내던져버린다. 그 행동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옆에 놓인 카메라가 허공을 날아 계곡 바닥에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쫓을 뿐이다. 그러나 깊은 계곡 바닥으로 빨려들어가는 술병의 고독한 운동감만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즉 이 여러 개의 숏의 연쇄는 던져진 물체가 저 멀리 사라져가는 운동을 우리 관객에게 틀림없는 ‘던진다’. 그리하여 그 몸짓과 운동감이 화면을 구성하는 모든 세부 사항을 넘어 이야기의 추이를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 지금 말한 것은 시퀀스를 마무리하는 몸짓으로서의 ‘던지는’ 것이지만 <존 포드론>에는 시퀀스를 창시하게 하는 ‘던지는’ 것에 대해서도 말한다.

=맞다. 예를 들면 <리오 그란데>에서 여성이나 아이들을 안전한 지대로 이송하는 포장마차대가 인디언에게 습격당하고, 대장의 아들인 신입 병사 클로드 자먼 주니어가 원군을 찾아 전령으로서 기마로 요새에 향하는 장면을 떠올려주기 바란다. 멀어지는 아들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엄마 모린 오하라의 클로즈업에 이어 바위산 높이로 탈영병인 벤 존슨이 말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이고, 동료들에게 몰래 받은 빈즈(콩)의 깡통을 저편으로 내팽개친다. 이후 친구인 전령을 쓰러뜨리려고 질주하는 인디언을 빠른 속도로 추적해 이들을 처리한다. 본래라면 거기에 살 권리가 있는 원주민을 침공자인 백인이 추격해 낙마시키므로 불쾌한 기분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그러한 관계의 추악함을 상기시키는 여유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는 신속함이, 보는 사람을 무장해제해버린다. 원래대로라면 완벽한 기술이 불가능해야 할 영화의 ‘필름적 현실’은 몸짓과 운동에 의해 특권화될 수 있는 것이다.

- 존 포드 영화의 던지는 몸짓만 모은 영상을 아오야마 신지 감독에 이어 미야케 쇼 감독과 함께 제작했다. 이미지 편집을 통해 만들어진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의 가능성을 어떻게 생각하나.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이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이라고 하는 어휘에 포함되는 ‘크리틱=비평’의 의미는, 이 작품에는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존 포드에서의 던지는 것”이라는 한편의 필름을 내가 경애하는 젊은 미야케 쇼 감독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것은 비평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먼저 오마주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애도가 아니다. 오히려 포드라는 영화 작가에게 보내는 해맑은 팬레터 같은 것일 뿐이다. 존 포드라는 감독 그 사람에 대한 오마주. 솔직히 이 필름 단편의 집적을, 누구보다도 먼저 포드 자신이 봐주었으면 했다. 나이와 국적의 차이를 넘어 그가 나에게 피식 웃어주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덧붙이면 존 포드에 있어서의 ‘던지는 것’의 끝없는 매력에 유달리 민감했던 장뤼크 고다르에게도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존 포드에서의 던지는 것>의 완성 이전에 그가 타계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 작품- 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의 구성이나 편집법을 이것저것 생각해주고 있던 고 아오야마 신지에의 오마주이기도 하다.

- 직접 영화를 찍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단 생각을 했던 적도 있나.

=전혀.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다. 찍는 것보단 말하고 쓰는 게 성미에 맞단 것을 알고 있다.

- 존 포드 혹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등을 말하며 영화감독의 타고난 ‘재능’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일엔 어떤 재능이 필요한가.

=글쎄. 확언할 순 없다. 다만 내가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이미 영화에 대한 글이었다. 딱히 영화에 관해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쓰고 보니 영화를 말하는 글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영화의 낙천성을 배울 때

- 과거 이장호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 정재은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 등을 한국영화의 미덕으로 꼽은 바 있다. 21세기 이후 한국영화에서 추가하고 싶은 목록이 있는가.

=앞서 말했듯 최근 영화관에 가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기에 한국영화뿐만 아니라 일본영화, 또 세계의 신작 영화를 볼 기회도 거의 없어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꼽자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 작가가 홍상수 감독이라는 세계적인 평가에 나도 기꺼이 동조한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도 <괴물>(2006)쯤부터 정기적으로 보고 있으며, 힘 있는 작가라고는 생각한다. 다만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기생충>(2019)을 포함한 그의 작품은 내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쪽을 훨씬 선호한다. 반면 홍상수는 훨씬 독창적인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 독특한 인물 조형을 노골적으로 과시하지도 않는다. 또 카메라를 어디에 두고 피사체에 접근하는가라고 하는 세부를, 특별히 과시하려고 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굳이 고백하자면 홍상수 감독을 터무니없이 뛰어난 영화 작가라고 이해하면서 불행하게도 그의 작품을 솔직하게 좋아할 순 없다. 그의 첫 작품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서 느꼈던 모종의 위화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로 그는 몇번인가 작풍을 변화시키고 있지만 그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남아 있다. 어쨌든 그는 첫 작품 이후 찍는 방법도 연기시키는 방법도 크게 바뀌었고 지금은 그 밖의 찍을 수 없는 작품을 계속 찍고 있다. 지금은 그의 작풍을 솔직하게 긍정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은근히 한탄하는 중이다.

- 2001년 인터뷰에서 1990년대 초부터 붕괴한 일본 사회의 시스템을 젊은이들이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일본, 한국, 세계의 젊은이들이 지금의 사회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조언해준다면.

=나는 이른바 ‘현실 사회’라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젊은이에게 그런 조언을 해야 할 입장에 있지 않다. 다만 주변 세계에 어떤 시선을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 나름대로 민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 사회라는 것의 실태와 주변에 유통되고 있는 그 전자적(電子的)인 표상작용과의 관계를 식별하는 것이 매우 곤란해지고 있다. 때문에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자각했을 경우, 그것을 수정하는 능력만큼은 몸에 익혔으면 한다. 지금은 AI를 비롯한 주변의 환경으로 인해 올바름에 대한 판단이 어려운 시대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전자적인 환경 그 자체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보다는 극장에 가서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화의 필름적 현실’과 무심하게 마주하길 바란다.

-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

=예를 들면 나는 어젯밤, 시부야의 관객석이 150석이 채 안되는 작은 극장에서 돈 시겔 감독의 <플레이밍 스타> 상영 후에 토크를 할 기회를 얻었다. 신간 <숏이란 무엇인가-실천편> 발매를 기념하는 상영회였다. 이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높이 평가된 적이 없는 작품이었지만 나는 이것이 알려지지 않은 걸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아마 동조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이 선사하는, ‘이상’(異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메리카의 밤(Day for Night)의 수법으로 찍힌, 적확한 밤의 숏의 연쇄를 관객들이 받아주길 바랐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온몸이 떨릴 정도로 깊이 마음이 움직였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세평과는 전혀 무관한 곳에서, 이 작품에는 영화의 현재라고 할 만한 것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것을 누려주셨으면 했다. 물론 누구나 그것을 공유해 달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란 고독한 동시에 또 집단적인 체험이기도 하다. 때문에 PC나 휴대전화의 미소한 화면과는 다른, 영화관의 큰 스크린을 앞에 두고 많은 관객과 동시에 영화의 ‘필름적인 현실’의 추이를 공유해주었으면 했다. 그것은 휴대 가능한 전자적인 기기의 작은 화면으로 영화를 보는 것과는 전혀 이질적인 체험이다. 때로는 스마트폰으로부터 해방되어 영화관을 발견해주길 바란다.

- 영화는 그 탄생부터 ‘붕괴전야’를 살고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일본에선 <드라이브 마이 카>(2021)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처럼 팬데믹의 풍경을 영화에 담은 동시대적인 영화가 꾸준히 나오는 중이다. 팬데믹의 시대가 종결되고 나라마다 영화적 시선이 재편된 지금, 영화 매체에는 어떤 미학과 실천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나.

=영화를 보는 것은 순수하게 ‘현재’라고 하는 시간적인 체험인 것과 동시에, 체험 그 자체는 스크린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부터 이미 미래를 향해 투영되는 것이다. 현재적이라고 하는 면에서 영화 체험은 아마도 문학, 특히 소설을 읽는 것과는 구별된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진실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다. 사건 그 자체에 지나치게 구애받다 보면 영화라고 하는 체험의 진정한 현재성을 못 볼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예컨대 확실히 20세기를 어둡게 물들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영화 역사에 큰 영향을 주긴 했다. 한때 독일영화를 거의 붕괴시켰을 정도였다. 붕괴는 뛰어난 독일영화 작가들의 미국 망명으로 인해 가속화됐다. 한편으론 그 와중에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프리츠 랑, 더글러스 서크 모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할리우드에서 아주 평범하게 영화를 계속 찍었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이 영화의 낙천성을 배워야 한다.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든 그 낙천성이 미래를 향해 그것이 투영되는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한국의 젊은 평자들, 혹은 영화를 보고 쓰려는 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특별히 덧붙일 ‘메시지’는 없다. 영화를 봐라. 존 포드도 좋고, 리처드 플라이셔와 돈 시겔을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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