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번역된 책 (김경수)
<감독 오즈 야스지로> 윤용순 옮김 / 한나래 펴냄
국내에 처음 소개된 하스미 시게히코의 단행본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전반을 다루는 작가론이다. 서장과 종장을 포함해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제목은 “먹는다는 것” 등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요소에서 딴 것이다. 구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관객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영화의 사소한 디테일에 집중한다. 그 디테일이 포개지고 변주되는 순간 생기는 독창적인 생동감을 포착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정적인 영화이며 그의 영화가 선(禪)과 모노노아와레와 같은 동양적인 정신을 반영한다는 통념을 뒤집기 위해서다. 하스미 시게히코를 통과한 오즈의 영화는 더는 정적인 영화가 아니고, 폭발적인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동경 이야기>의 엔딩을 흐린 날씨와 연결하는 대목이 특히 탁월하다.
<영화의 맨살> 박창학 옮김 / 이모션북스 펴냄
하스미 시게히코가 1969년부터 2011년까지 쓴 영화비평 중 그의 색채가 잘 드러난 비평을 간추린 비평 선집이다. 1부에서는 그의 영화론이, 2부는 존 포드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 거장 감독을 대상으로 한 감독론이 펼쳐진다. 3부에는 강연 등 그의 육성이 담겨 있으며, 4부에는 그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최근의 비평이 수록되어 있다. 그에게 영화비평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는 일 없는 영화를 향한 놀라움을 타자와 공유하는”(586쪽) 작업이다. 그는 자신이 영화에서 포착한 디테일과 거기에서 비롯한 놀라움을 만연체로 고백하며 독자에게 그 영화를 다시 보게끔 초대한다.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 이승준 옮김 / 비고 펴냄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친구로만 알려진 막심 뒤 캉을 처음으로 다룬 저서다. <보바리 부인론>과 함께 플로베르 연구자 하스미 시게히코의 걸작이라 평가된다. 막심 뒤 캉은 청년기에 쓴 시집 <현대의 노래> 서문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한심한 조직이라며 비난하더니 말년에는 그곳에 입회한 아이러니한 삶을 살았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에게서 범용의 자질을 포착한다. “그 누가 의뢰한 것도 아닌데 솔선수범해서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는 특권을 의무로 착각”하는 자질이다. 범용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플로베르뿐만 아니라 미셸 푸코, 발터 베냐민 등 훗날의 사상가에게 독창적 사유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범용을 개인적 자질이 아니라 근대의 발명품으로 보고 막심 뒤 캉이 살던 시대를 조망한다.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책 (김현승)
<숏이란 무엇인가> (ショットとは何か)
숏을 바라보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관점은 구로사와 기요시를 비롯한 수많은 감독에게 영향을 주었다. <숏이란 무엇인가>는 저자가 몸소 체득한 영화적 경험을 토대로 완성된 그의 사유를 구술 문답 형식으로 풀어낸 작업물이다. D. W. 그리피스와 존 포드를 거쳐 누벨바그와 현대 할리우드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흐름이 그의 확고한 영화적 신념을 구성한다. 디지털카메라와 스트리밍서비스라는 새로운 영화의 형태마저 아우르는 저자의 논리 전개는 영화가 마주한 새 시대에도 여전히 건재한 생명력을 뽐낸다. 무엇보다 이론이 따라잡을 수 없는 영화 고유의 세계를 강조하면서도 앙드레 바쟁과 질 들뢰즈의 주장을 섬세하게 훑는 박식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숏이란 무엇인가> 3부작의 2부인 <숏이란 무엇인가-실천편>까지 일본에서 출간됐다.
<보바리 부인론> (「ボヴァリ-夫人」 論)
1960년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하스미 시게히코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중심으로 서술한 불문학 연구의 기념비적 저작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존 포드론>과 달리 <보바리 부인론>은 노년이 되고 난 이후에야 구상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800페이지가 넘는 책에는 분명 저자의 삶을 꿰뚫는 일관된 비평 방식이 녹아 있다. 문학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 대한 고찰이나 인물들의 심리분석보다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작품의 테마를 읽어내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최근 한국에서 정식 발간된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는 <보바리 부인>의 원작자 플로베르와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막심 뒤 캉의 초상을 그려냈다. <보바리 부인론>과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은 각 저서가 다루는 예술가만큼이나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표층비평선언> (表層批評宣言)
1979년에 발표된 <표층비평선언>은 문학평론가로서 하스미 시게히코의 입지를 확고히 해준 작품이다. 이 글에서 하스미는 문학작품을 읽고 쓰고 사고하는 행위가 반드시 수반하는 언어화의 ‘부자유’에 대해 서술한다. 경이로운 작품을 접한 독자(관객)는 세계를 잊어버리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곧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의 틀 안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다. 익숙한 문법으로 변환되지 않은 체험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달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불가피한 이 번역 과정은 끝내 순간의 체험을 분절화하며 사건의 고유성을 훼손한다. 따라서 하스미에게 비평이란 “철저하게 표층적인 체험”에 불과하다. 악명 높은 그의 문체는 경이로운 순간을 일상적인 사건으로 전락시키는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독특한 전략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