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여전히 유효한 비평적 모험’, 김보년, 김병규, 김예솔비 평론가의 하스미 시게히코 대담
2024-04-06
글 : 이우빈

왜 지금 하스미 시게히코를 말해야 하나. <존 포드론>을 둘러싸고 나타난 젊은 한국 평자들의 의견을 조금이나마 그러모으기 위해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와 김병규, 김예솔비 평론가가 모였다. 그들은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이 주는 매혹을 세세히 인정하면서도 그에게서 종종 느껴지는 한계와 이질감을 쉬이 지나치지 않았다. 대담에 앞서 임재철 평론가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이력, 한국에 하스미 시게히코가 소개된 경위 등을 상세히 설명한 뒤 젊은 평자들에게 대담을 맡겼다. 임재철 평론가는 90년대 후반부터 하스미 시게히코의 작업물을 한국에 소개했고 첫 한국어 번역본이었던 2001년 <감독 오즈 야스지로>를 기획·발간한 뒤 <영화의 맨살> <존 포드론> 등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2001년과 2003년 <씨네21>을 통해 그와 하스미 시게히코가 나눈 대화는 한국 매체에서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적 태도를 엿볼 희귀한 기회였다. 항상 영화의 ‘탈역사화’를 주장하며 영화의 표면만을 바라봐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하스미 시게히코였다. 그러나 한국에 전해진 이 1930년대생 일본 평론가의 글들은 1980~90년대 영화평론가들이 1950년대 미국영화에 대한 역사적 논의를 이어가도록 자극하고 있다. 이것마저 하스미 시게히코가 품고 있는 매력적인 모순으로 느껴질 정도다. “하스미에겐 가능했고 우리에겐 불가능한 것” (김병규 평론가)을 파악한다면 비평의 모험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 지금 시점에 하스미 시게히코에 대한 대담을 진행한다고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김병규 한국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는 숭배의 대상이거나 부정의 대상이지 논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존 포드론>과 다른 저작을 통해 영화 화면에서 무엇이 보고 들리는지 다시 봐야 한다고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하스미 시게히코가 내놓은 작업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이 선제적으로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뒤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겠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표층비평’에 대해서 제대로 된 이야기가 필요해 보인다. 누구나 쉽게 감탄하고 누구나 쉽게 기각하는 표층비평이 정말 하려는 것들이 무엇인지 논의해봐야 하지 않을까.

김보년 2000년대 초반부터 영화에 관한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어로 나온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은 <감독 오즈 야스지로>뿐이었다. 모든 평론가가 오즈 야스지로를 이해하려면 이 책을 꼭 읽으라고 하는 느낌이었고, 실제로 읽었을 때도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다만 다른 책이 없었기에 ‘하스미 시게히코의 스타일이 이런 이상한 느낌이구나’라는 정도에서 그쳤다. 이후 <영화의 맨살>이나 <존 포드론> 등이 번역됐지만 여전히 그가 쓴 책이 한 트럭은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는 아직도 하스미 시게히코의 일부만 보고 있는 거다. 막막하다는 느낌이 든다. 여하튼 그 일부라도 뒤늦게 찾다 보니 한 가지 든 생각이 있다. 조심스러운 발언일 순 있는데… 2000년대 초반에 내가 읽었던 소위 선생님급 평론가들의 비평이나 글, 혹은 어떤 비평적 태도에서 하스미 시게히코의 방법론과 영향이 느껴졌다.

- 어떤 부분에서 겹쳐 보였나.

김보년 높게 평가하는 감독들과 영화의 리스트를 만든다든지, 서로 다른 감독과 영화들을 비교하며 무엇이 더 뛰어난지 질문하는 방식 등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단호하게 구분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선배 평론가들이 일어, 영어, 불어 등 어느 방식으로든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을 읽으며 공부했고, 그러면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단 짐작이 들었다.

- 흥미롭고 공감이 가는 의견이다. 어느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 혹은 영화를 얼마나 봤는지를 시네필의 조건으로 결정하는, 이른바 ‘영화력 시험’이란 풍습도 하스미 시게히코의 여러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김보년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90년대 전후로 하스미 시게히코의 이름이 일반 관객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미 그때부터 한국의 비평 담론과 시네필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지 싶다. 그리고 그 영향력이 시차를 두고 지금 <영화의 맨살> <존 포드론> 등을 통해 더 분명한 형태로 드러난 게 아닐까. 그래서 나를 포함해 2000년대 후반부터 비평을 공부하기 시작한 나이대의 평론가들이 오늘 무슨 얘기를 나눌지 궁금하다. 선배 세대들은 이 기사를 읽고 무슨 생각을 할지도. 그래서 이 대담 기획이 굉장히 짓궂다고도 여겼다. (웃음)

김예솔비 하스미 시게히코를 숭배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단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한국 평단에 유령적으로 떠도는 하스미식 비평의 유효성을 따지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나 싶으면서도… 어쨌든 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의 비평이 자극하는 여러 영화적 충동은 아직 유효하다는 인상이 있다. 이것을 동시대적인 영화적 실천으로 읽어내면서 우리가 그의 파문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얘기해볼 법도 하다.

‘숏의 성립’을 판단하던 비평가의 특권

-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이 여전히 어떤 충동을 일으킨다면, 근래 자신의 활동에 영향을 준 측면이 있을까.

김보년 요즘 관객과의 대화 같은 자리에서 관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왜?”다. “감독님, 그 장면은 왜 그렇게 찍은 거예요?”라는 질문이 많다. 그런데 하스미 시게히코는 ‘왜’라는 질문을 의식적으로 지양한다는 인상이 있다. 어떤 장면이 어떤 상징이라거나 하는 도식적인 해석을 싫어하고 다 쳐내는 것 같다. 대신 “이 장면에서 누가 무엇을 하고 있다”라는 동사로 시작해서 “그래서 이 장면은 관능적이고, 고독하고, 무섭다”라는 형용사로 단언하듯 결론을 내린다. 장면의 의미를 영화 바깥에서 억지로 찾으려 하다 보면 결국 작품과 점차 멀어지기 마련인데 하스미 시게히코의 방법론에 그런 위험은 없겠다는 것을 느꼈다.

- 맞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왜?”라는 질문으로 영화를 유추하는 대신 우선 판단한 후에 설명한다. 그리고 그 판단의 기준 중 하나는 ‘이 감독이 숏을 찍을 줄 아는가’라는 모호한 명제다.

김보년 오늘 그걸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말했듯이 하스미 시게히코는 결국 숏이 성립하는지 안 하는지로 좋은 감독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이 판단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나는 막힌 상태다.

- 사실 숏의 기준에 대해선 하스미 시게히코 본인 역시 저작마다 다른 논거를 펼치는 감이 있기에 쉽게 규정지을 순 없겠다.

김병규 하스미는 ‘숏의 성립’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어떤 감독을 발견하거나 재정의한다. 그런데 이런 권리가 한 사람의 평자에게 특권적으로 주어지긴 어려운 상태가 된 것 같다. 최근엔 한 영화가 개봉하거나 영화제에 공개되자마자 여론이 생기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순식간에 결정돼버린다. 비평가의 역할이 영화제나 산업적 마케팅의 한 기능으로 흡수된 것 같다.

- 그런 임무를 실행해야 하는 게 영화잡지나 영화 저널리즘의 역할이기도 하다. 어떤 감독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소위 ‘베팅을 거는’ 일이 필요하지만, 잘 이뤄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김예솔비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그러한 저널리즘 비평에 대해서든 영화산업과 영화제의 난점 같은 것들이 잘 체감되지 않는다. 한명의 평론가로서 굉장히 멀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러한 느낌 자체가 동시대 저널리즘 비평의 부재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김병규 달리 말하면 존 포드처럼 ‘숏의 규범’을 논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비평을 개진할 수 있는 영화감독이 이제는 없어 보인다. 개별 감독들의 능력 문제라기보단 영화 문화에 차이가 있다. 50년대까지 미국 감독들은 철저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영화를 찍었다. 촬영 단계의 ‘부자유’를 내재했던 사람들이고 그 속에서 역설적으로 놀라운 장악력과 인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 긴장감을 포착했고 자신의 글에도 ‘숏의 규범’이라는 부자유를 하나의 규범으로 삼는다.

김보년 20세기 중반 미국 감독들은 계약 감독이니까 어쨌든 다음 작품을 찍을 수 있단 확신이 있었다고도 생각한다. 당장 이번 작품에 자신의 자유로움을 발휘해서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잘리진 않을 것’이란 마음이 있었을 텐데, 현대 감독들은 현실적으로 그러기 어렵다. 이런 문제에서 오는 차이도 있는 것 같다.

김병규 그러니 <존 포드론>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점에 딱 맞물린 사건이라고 여겨진다. 특정 조건을 벗어나 범용하게 적용할 순 없다. 존 포드나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하스미 시게히코의 접근을 보고 ‘나도 같은 방식으로 홍상수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표층비평의 매혹과 한계

- 그럼에도 <존 포드론>을 포함한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 방식이 여전히 매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김병규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장면의 세부들로 하나의 비평적 체계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 매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는 숏의 표면을 탈역사화된 장소, 그러니까 역사라는 영화 바깥의 개입이 없는 진공상태로 보는 태도로 읽히기도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오즈 야스지로의 <바람 속의 암탉>(1948)과 <만춘>(1949)을 두고 제작연도가 1년밖에 차이가 안 나는 두 영화에서 도쿄가 그려지는 방식의 차이를 본다. 전자에선 더럽고 지저분한 패전 직후의 도쿄가 있는데 <만춘>에선 굉장히 청결해졌다는 것이다. 전쟁과 오즈의 관계를 묻는다. 반면에 하스미 시게히코에게 <바람 속의 암탉>은 오즈의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던 계단이 나오는 영화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역사성이 개입된 무대가 아니라 몸짓과 사물과 기후가 교차하는 네트워크로 바라본다. <존 포드론> 제1장에서도 존 포드 영화 속의 아프리카 코끼리를 ‘존재의 기척’으로 옹호하지만, 미국영화가 어떻게 아프리카의 동물들을 담아내게 됐는지는 묻지 않는다. 그건 제국주의를 경험했고 미국영화의 제국주의적인 맥락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아닐까.

- 하스미 시게히코의 작업이 완전히 탈역사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특히 최근 50년대 미국 작가를 말하면서는 당대 할리우드의 제작 시스템이나 감독, 배우들의 실제 삶을 자주 언급하기도 한다.

김병규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은 대상에 따라 매번 맥락을 달리한다. 특히 미국영화에 대해선 다른 국가의 영화를 건드릴 때와 사뭇 느낌이 다르다. 표층비평은 숏 바깥의 맥락을 모두 걷어내겠단 고집일 수도 있다. 다만 제아무리 고집한다고 한들 영화를 순전히 미적 형식으로만 볼 순 없다. 숏이라는 표층은 어떤 식으로든 바깥의 맥락을 끌고 들어온다. 즉 그는 표층비평이라는 틀을 사용하되 표층만으로는 절대 성립되지 않는 영화를 다룬다. 이 점이 하스미 시게히코식의 비평이 끌어안고 있는 긴장인 것 같다.

김예솔비 일부러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표층비평의 태도를 정언적으로 고수하는 게 아니라 그걸 무너뜨리려는 충동을 얘기하면서 긴장감을 생성한다. 굉장히 미묘하다. 말로는 숏의 표층적인 현실만을 파악할 것이라고 말해놓고 본인이 그것을 무시하고야 만다. 자신의 말장난이나 거짓말이 통하는 지대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놓는다. 탈역사적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역사 유물론적인 태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숏의 성립’이란 개념을 계속 고전영화로 사유하고, 그것을 현재의 문제로까지 끌고 오면서 스스로 비평의 게임 같은 과정을 마련한다. 이게 하스미 시게히코 비평의 힘이고 그래서 쉽사리 그를 모작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김보년 <존 포드론> 233페이지에 보면 미국 사람들이 존 포드와 존 웨인을 보수적인 영웅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전면으로 반박하는 대목이 있다. 실제 존 웨인이란 배우가 지닌 역사와 극우적인 면모를 부정하진 않지만 영화 속 존 웨인이 얼마나 많이 상처받고 다쳤는지를 보라고 말하면서 변호한다. 사실 비판적으로 보면 존 포드의 서부극은 미국이 지닌 폭력의 역사를 낭만화하는 영화일 수 있는데, 적어도 하스미 시게히코의 변호를 읽고 있으면 존 웨인이 연약한 형상이라는 그의 말에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역사의 맥락을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가 말하는 ‘필름적 현실’을 통해 영화와 인간을 방어할 수 있단 사실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김예솔비 모험담과 활극으로 알려진 포드적인 서부극을 어머니와 아내와 연인의 존재감을 수렴하는 가정극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도 재밌었다. 전통적인 성역할이나 성의 경계선을 붕괴한다는 시선이 흥미로웠고, 그 대표적인 사례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장면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경계 흐리기가 전통적인 성역할을 재생산 중인 영화의 구조 속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도 느꼈다. 성별 분업의 붕괴는 결국 드라마적인 활력을 위한 화면의 자극에 불과하다는 의구심도 들었다. 대신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런 주제를 또 다른 주제들과 서로 겹치고 충돌시키면서 새로운 주제의식으로 나아가고, 일부러 포드 영화의 존재감을 더 키우는 데 집중한다고 느껴졌다.

김병규 그렇다. ‘필름적 현실’에 노출된 단서를 통해서 한 영화와 장면을 두고도 다른 평가를 하고, 다른 맥락으로 쓰기도 한다. 그렇게 존 포드를 서부극, 전쟁영화,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연출자로 다르게 관측한다.

기억의 오류가 주는 비평적 긴장

- <존 포드론>엔 탈역사화의 한계와 더불어 여러 가지 비평적 한계가 등장한다. <역마차>의 특정 장면을 잘못 기억하고 썼다는 저자의 고백이 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김병규 영화의 어떤 장면을 자의적으로 날조하는 나쁜 습관이 있단 것을 인정하는데, 이런 부분이 자신의 비평이 지닌 깊은 불안을 환기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스미는 자연스러운 것과 부자연스러운 것, 표층에 있는 것과 표층 바깥에 잠재하는 것들 사이의 협상과 조정을 통해서 픽션과 ‘필름적 현실’이란 양자의 모순을 통과한다. 이런 긴장감이 비평적 태도의 관점에서 큰 자극이 된다.

김예솔비 하스미 시게히코가 기억의 오류를 비평적 모험으로 삼는 방식은 나 역시 무척 흥미로웠다. 저자는 영화의 세부를 어떻게든 기억하려는 자신의 기억 노동을 ‘아마추어적인 행위’라고도 표현한다. 그렇게 잘못 보는 활동을 통해서 어떤 우연한 비평적 지대로 나아갈 수 있단 뜻이다. 이 비평적 실천이 마음에 무척 와닿았다.

- 다만 그렇게 기억의 오류에 기인하는 비평 방식이 현재의 영화 감상 환경에선 불가능해 보인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정말 극장에서 단 한번 영화를 보고 비평을 써야 하는 시대의 사람이다. 더욱더 집중하여 영화를 직시해야만 했을 것이다. 반면에 지금 우리는 몇번이나 영화를 돌려볼 수 있다. 이런 감상의 정확함이 <존 포드론>을 보고 나니 덜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김병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한계가 있다. 비평을 쓰는 사람에게 장면을 돌려보는 모니터가 있는 것처럼 촬영 현장엔 늘 현장 편집이 가능한 모니터가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시각적 오류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버리고, 그만큼 영화 문화도 강박적으로 변한다. <존 포드론>은 이러한 현상에 탄력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글이기도 한 것 같다.

김보년 하지만 그렇게 불가능하다고 단정해버리면 우리 세대가 영화 문화의 커다란 무언가를 상실했단 사실만 남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80년대생 이후가 그 전의 영화 문화에 접속하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비평적 태도가 무척 제한적으로 변할 것 같다.

김병규 불가능이 상실만은 아닌 것 같다. 불가능이란 맥락에서 가능한 저항을 찾을 수도 있다. 앞서 50년대 미국 작가들의 제작 환경에 부자유가 있던 것처럼 영화 역사에 불가능이란 언제나 주어진 조건이었다. 그 불가능이 영화를 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만든 동인이었다고 본다. 그러니 하스미 시게히코에겐 가능했고 우리에겐 불가능한 것을 더 선명하게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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