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뜸
경상북도 성주군은 참외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특히 소성리는 언론의 관심을 받아본 적 없던 고요한 산골 마을이었다. 어르신들은 밭일을 마치면 볕이 잘 드는 회관 앞 양지뜸에 모여 소박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2016년 9월 정부가 종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를 소성리에 배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마을은 혼란을 맞이한다. 소성리로 귀촌해 할머니들과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걱정 어린 어르신들의 얼굴을 찍기 시작한다.
<양지뜸>은 주한미군 사드의 부지로 선정된 소성리 주민들을 관찰한 다큐멘터리다. 주민들은 정부의 발표가 있던 때부터 지금까지 두 차례 정권 교체를 거쳐오며 긴 시간 투쟁을 이어갔다. 상공을 지나는 미군 수송 헬기, 굉음을 내며 줄지어 오는 군용 트럭, 육로를 가로막는 경찰 벽과 바리케이드. 평범했던 소성리를 낯설게 만드는 침입자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하지만 <양지뜸>의 카메라는 침입자들에 맞서 농성을 이어온 시위 현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마을의 일원인 김상패 감독은 어르신들이 모여든 마을회관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곳은 도토리묵을 쑤고, 국수를 삶으며, 참외장아찌와 메주를 담가 모두가 나눠 먹는 회합의 장소다. 손과 발 그리고 입을 통해 공유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소성리에 뿌리내린 시간과 역사도 그들의 입을 통해 오가고 있다. 주민들에게 사드는 “뽑아야 할” 대상이다. 매체들이 보도한 투쟁의 이미지에 가려졌던 소성리의 일상을 <양지뜸>은 회합의 공간에서 보존하고자 한다. /최현수 객원기자
지속 가능하지 않은 여행 The Last Tourist
비밀스럽게 숨겨진 낙원 같던 그 장소는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 원석처럼 아름다웠던 여행지는 자취를 감추고 수많은 인파의 발길 아래 몸살을 앓기 시작한 지 오래다. 사람들이 휴양지를 방문하며 지역사회의 발전과 건강한 경제순환을 돕는다고 착각하는 동안, 관광산업의 추한 면면은 환경오염과 면치 못하는 가난과 동물 학대로 이어진다. 여행자가 아닌 투어리스트들은 여행지가 누군가의 고향이자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은 지 오래다. 팬데믹 이전까지 비대하게 성장한 글로벌 관광산업은 우리 모두 자연에서 왔으며 그러므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원시적 믿음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여행>은 관광지를 찾은 이들이 향락과 편의를 추구하면서 우리가 진정 무엇을 훼손하며 희생시키고 있는지를 알린다. 이를 위해 카메라는 자연 그대로의 광막한 숲과 강을 세계 곳곳의 실상이 담긴 장면들과 끊임없이 대비시킨다. 촬영하는 카메라를 향해 즐겁게 손을 흔드는 투어리스트들과 그것을 무감하게 바라보는 현지인의 얼굴은 짧은 여행의 즐거운 순간과 그로 인해 빛을 잃은 삶의 터전을 향한 희비처럼 교차한다. 중요한 것은 여행을 멈춰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여행을 어떻게 올바르게 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동물행동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을 비롯해 이 다큐멘터리에 목소리를 더한 이들은 입을 모아 강조한다. 감독은 환경 보호, 동물권, 공정무역 등을 통한 여행의 새로운 접근법과 연대, 책임 의식과 현명한 소비만이 우리의 터전을 올바르게 보전하는 희망의 길을 넌지시 내비친다. /유선아 영화평론가
오류시장
1968년 조성된 구로동 오류시장, 같은 자리를 40년 넘게 지켜온 상인들이 있다. 찾는 손님이 많지 않아도 성원떡집의 두 부부는 부지런히 떡을 쪄내고 길을 닦으며 터진 수도관을 보수한다. 다큐멘터리 <오류시장>은 서울시 오류시장 정비사업이 발표된 2016년부터 시장 모습과 그곳 상인들의 재개발 반대 활동을 묵묵하게 기록한다. 서명운동에서 시위로 이어지는 주민과 투자자간 다툼, 그리고 무기력한 호소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장면에 이르면 무거운 마음이 더욱 묵직해진다. 전통시장의 흥망성쇠에서 쇠의 끝자락이 오래도록 담긴 카메라를 따라가게 된다. 그럼에도 상인들은 주민 공동체 라디오에서 노래를 틀고, 화분을 모아 키우며, 가끔 멈춰 서서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올려다본다. <오류시장>이 지닌 잔잔한 위력은 비관만이 정답일 것만 같은 현실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명랑함을 발견해내는 시선에 있다. /유선아 영화평론가
조류를 거슬러 Against the Tide
사르브닉 카우르 / 인도, 프랑스 / 2023년 / 97분 / 국제경쟁, 기후행동
뭄바이의 어부 라케쉬와 가네쉬는 조수의 흐름을 따라 물고기를 잡는 인도 콜리족의 훌륭한 전통을 이어받았다. 시대 변화에 발맞춰 LED 집어등을 사용하려는 가네쉬와 달리 라케쉬는 끝까지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동이 트기 전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은 라케쉬의 손실은 점점 커져만 간다. 심지어 새로 태어난 아들의 병원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나온 상황.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그의 신념은 파괴를 강요하는 시대에 한없이 흔들린다. 직업 가치관의 차이는 종교적 믿음과 가장의 책임감 그리고 기후 위기 사이를 가로지른다. 그 끝에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서글픈 노동요 가락만이 기로에 놓인 어부를 위로한다. 짜임새 있는 카메라 구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2023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김현승 객원기자
마다가스카르 소는 불어로 말한다 Where Zebus Speak French
난테나이나 로바 / 마다가스카르, 독일, 부르키나파소 / 2023년 / 103분 / 국제경쟁, 지구 비상
아프리카 남동부에 위치한 섬나라이자 세계 최빈국 중 하나에 속하는 마다가스카르의 농부들은 소에게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다른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역사 때문이다. 수도 안타나나리보에 살고 있는 농부이자 연설가인 리의 2007년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는, 독립 후 국가와 국민간의 의무와 책임의 약속이 여전히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혼란한 이 땅의 현실을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삽입된 인형극 형태의 스토리텔링과 모든 상황을 비유를 곁들여 유쾌하게 설명해내는 내레이터가 활기를 더한다. 카메라가 담아낸 멋진 자연과 아이들의 밝은 표정 역시 희망을 자아낸다. 마다가스카르의 현재가 궁금한 관객에게 유의미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김철홍 영화평론가
화산 아래 사람들 An Inhabited Volcano
다비드 판탈레온, 호세 빅토르 푸엔테스 / 스페인 / 2023년 / 66분 / 국제경쟁, 지구 비상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벌건 용암이 솟구친다. 2021년 9월19일 스페인의 라팔마 섬에 등장한 쿰브레 비에하 화산은 85일간 분화를 이어가며 섬을 초토화 시켰다. 화산에는 생과 사의 이미지가 공존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흘러넘친 마그마는 지구가 생동한다는 증거다. 동시에 검붉은 용암이 지나간 자리는 삶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다. 라팔마 섬의 화산 폭발을 다룬 <화산 아래 사람들>의 화면은 검붉은 화산의 형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영화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에 경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폭발의 경이로운 이미지를 가로지르는 생존자들의 음성 메시지가 소멸한 것들의 자취를 되새긴다. 화산재를 치우며 재건을 다짐한 주민들을 바라보는 <화산 아래 사람들>의 카메라는, 맹렬한 재난의 시간 속에서 굳건히 버텨낸 관계의 힘을 기어이 찾아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최현수 객원기자
녹색 거인 밥 브라운 The Giants
로런스 빌리에트, 레이철 앤서니 / 호주 / 2023년 / 113분 / 지구를 구하는 거인들
0.48%, 0.76%, 0.21%, 2.14%. 이 수치는 우리나라에서 최근 치러진 네번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19~22대)에서 녹색당이 기록한 득표율이다.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녹색당이 원내에 진입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펼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몇몇 국가에선 아직 먼 나라의 이야기다. 연이은 좌절로 지친 사람들에게 <녹색 거인 밥 브라운>을 추천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호주 녹색당과 환경운동계의 거목인 밥 브라운의 유년 시절부터 정계 은퇴 후의 삶까지를 조명한다. 1944년에 태어난 브라운은 녹색당의 리더가 되어 당을 원내에 진입시키며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내는데, 영화는 그 과정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을 다이내믹하게 그려낸다. 영화 속 호주 태즈메이니아 섬의 고목은,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한 인간의 모습과 어느새 닮아 있다. /김철홍 영화평론가
광천동 김환경
1970년에 건설된 광주광역시 최초의 아파트인 광천동 시민 아파트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부동산에서도 매물로 취급하지 않는 이 ’시간이 멈춰버린 마을’에 1995년생 미디어 아티스트인 김환경이 입주한다. 그러곤 카메라를 들고 아직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입주민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여기 사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할머니, 이제 여기 사라지면 어떨 것 같으세요?” <광천동 김환경>은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장소를 기억하려는 영화다. 그 이야기 중엔 너무나 지당하게도 5·18 민주화운동이 있으며, <임을 위한 행진곡> 또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직접 카메라 앞에 선 김환경 감독이 소멸하고 있던 한 공간에 영혼을 불어넣는 동선이 감동적인 영화다. 25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부문 상영작이다. /김철홍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