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미드소마>의 아리 애스터, <에덴: 로스트 인 뮤직> <다가오는 것들> 등의 미아 한센 러브…. 수입배급사 찬란은 동시대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에서 주목해야 할 다수의 시네아스트들을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했다. <그린 나이트> <당나귀 EO> <환상의 마로나> 등 (<씨네21> ‘올해의 해외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영화기자, 평론가들의 지지를 받은 작품도 크레딧을 살피면 찬란의 수입작인 경우가 많다. 찬란은 지난해 연말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소폭 흥행을 시작으로 2024년 상반기 <악마와의 토크쇼> 그리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연타 흥행까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의 중흥에 유의미한 방점을 연속해 찍고 있다. 영화 월간지 <스크린>의 편집장, 스폰지이엔티의 영화 수입기획 및 마케팅 총괄을 거치며, 20년 넘게 영화와 함께해온 찬란의 이지혜 대표를 만나 한국 아트하우스 시장을 이야기했다.
- 5월8일 개봉한 <악마와의 토크쇼>와 6월5일 개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에서 쌍끌이 흥행 중이다.
= 처음 <악마와의 토크쇼> 개봉을 준비할 땐 예술영화보다는 장르영화에 초점을 맞춰 홍보 전략을 세웠다. 회사 내부에선 작품의 확장을 기대하려면 장르영화 팬들을 공략하는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봉 후 의외로 예술영화 팬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제 와 말하지만 내부 흥행 기대치는 <악마와의 토크쇼>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보다 높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보자마자 수입이 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세일즈사가 절대 낮은 가격에 작품을 판매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어 한동안은 일절 수입 생각을 접어두고 있었다. 게다가 지난해 <괴물>이 개봉하기 전까지 아트하우스 시장이 내내 위축돼 있었다. 이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일정 수치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작품을 향한 호평이 1년 내내 이어지는 중에도 그게 흥행과 직결되진 않을 걸 알아 선뜻 개봉을 밀어붙일 수 없었다. <악마와의 토크쇼>만 해도 흥행 목표치가 있었다. 한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목표치조차 예단할 수 없었다.
- 그렇지만 <악마와의 토크쇼>는 장르영화 애호가들의 지지도 받았는데.
= 예술영화 수입만으로는 회사 운영에 한계가 있어 처음 눈을 돌린 게 호러 장르였다. <잇 컴스 앳 나잇>이나 아리 애스터의 <유전>과 <미드소마>, 혹은 <반교: 디텐션>을 가져와 아트하우스 시장에서 호러영화를 상업적으로 풀고 싶었지만 기대한 결과는 내지 못했다. 지금 아트하우스 시장은 오히려 극장에서 승부를 보지 않으면 확장성을 기하기 쉽지 않다.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일정 관객의 유입이 보장된 영화를 찾다 정착한 장르가 호러와 수입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던 중 <악마와의 토크쇼>를 만났다.
- 앞서 언급한 <잇 컴스 앳 나잇> <유전> <미드소마>를 포함해 <그린 나이트><컴온, 컴온> <클로즈> <존 오브 인터레스트>까지. 찬란의 수입작을 통해 A24 영화를 다수 만날 수 있었다.
= 소피아 코폴라의 <블링 링>을 수입하며 A24를 알게 됐다. 규모가 크지 않은 영화를 감각적인 개성으로 홍보할 줄 아는 회사란 생각이 들어 신선했다. 그러다 A24가 본격적으로 제작과 세일즈에 뛰어든 2016년 칸영화제에서 <스위스 아미 맨>을 보고 반했다. <잇 컴스 앳 나잇>을 시작으로 A24 배급 영화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이들의 영화를 수입하는 과정이 늘 쉽진 않다. 하지만 분명 영화시장의 트렌드를 선점 중인 회사이고, 일정 정도의 프로덕션 퀄리티가 보장이 되는 회사여서 계속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
- 칸영화제 프리미어를 시작으로 오스카 레이스까지.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향한 다양한 상찬이 1년 넘게 쏟아졌지만 한국의 관객들은 개봉 전까지 영화제나 아카데미 프리미어 상영회 등에서 작품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의도한 전략인가.
= 놀랍게도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연락이 안 왔다. 그래서 영화를 틀지 못했다. 이후 다른 영화제들이 문의해올 땐 정작 우리가 영화를 공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개봉 시기는 언제나 고민이다. <추락의 해부>와 <가여운 것들> 개봉 사이에 영화를 공개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지만 지난해 하반기에 이미 <빅슬립> <사랑은 낙엽을 타고> 등 공개해야 할 국내외 영화가 있어 많아 그 계획도 무산됐다. 무엇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비용 및 규모가 큰 영화라 배급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론 2024년 2분기, 그러나 7월을 넘기지 않는 시기에 작품을 공개하기로 했고 결국 6월5일 개봉을 결정했다.
-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개봉 전 <씨네21>에 올라온 박평식 평론가의 별점도 화제였다.
= 사실 <씨네21> 별점이 업로드되는 개봉 전 주 금요일까진 사전 예매량 수치가 지금 같지 않았다. 인구에 회자되기 위해선 20대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던 차에 박평식 평론가의 별점이 큰 힘이 됐다.
- 당연한 말이지만 수입사가 영화를 해외 마켓에서 구매하는 일은 복지가 아닌 엄연한 사업이다. 작품을 살 때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 나조차도 영화제의 분위기에 취해 작품을 살 때가 많다. 영화제 프리미어 상영에서 봤을 때의 인상과 한국에 돌아와 재관람할 때의 인상이 항상 다르다. (웃음) 아마 수입사들의 공통 고민일 것이다. 좋은 영화라 판단해 사와도, 구매 당시의 극장 상황과 개봉 준비할 때의 상황, 개봉 후의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시장 예측이 쉽지 않다.
- 팬데믹 이후 유독 다른 영화제들에 비해 칸영화제 출품작들이 대거 수입된다는 인상도 받는다. 흔히 3대 마켓이라 불리던 유러피언 필름 마켓, 아메리칸 필름 마켓과 비교했을 때 칸영화제의 마르셰 뒤 필름의 회복세가 가장 큰가.
= 칸영화제 작품들이 아무래도 한국 관객들에게 가장 폭넓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점점 마이너해지고,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오스카 전초전으로 자리한 상황에 작품의 종류도 다양하며 시장을 선도하는 영화는 칸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 또 예술영화의 경우 칸의 결과나 비평가들의 하이프가 관객 입장에선 점점 영화 선택의 주요 지표가 된다는 걸 느낀다.
- 한동안 완성된 영화를 보지 않고 선구매하는 프리바잉이 과열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 아트하우스 시장의 마켓 동향은 어떤가.
= 이제는 완성작을 보고 구매를 하려고 한다. 세일즈사들도 프리바잉은 지양하는 분위기다. 지난해 아메리칸필름마켓(AFM)의 경우 작가조합과 배우조합의 파업으로 인해 편수가 급감했다. 대신 괜찮은 작품에 수요가 몰려 입찰 경쟁이 치열해졌다. 세일즈사들도 점점 보수적인 판촉을 한다. 2010년대 중반부터 팬데믹 직전까지 한국의 수입사들이 정말 활발하게 예술영화를 구매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팬데믹 중 한국이 구매량을 줄이니 해외 세일즈사 입장에선 상품을 팔 수 있는 큰 시장 하나가 사라져버렸다.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가 배급 경쟁에 뛰어든 것도 시장 위축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대형 스튜디오나 직배사가 가져가는 영화에 중소 수입사가 손을 어떻게 대겠나. 여기에 글로벌 OTT까지 들어오니 기회 자체가 줄었다.
- OTT의 범람으로 예술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이 과거에 비해 늘었다.
= 상대적으로 예술영화를 상영할 플랫폼의 개수는 늘었다. 하지만 관객들이 예술영화를 접할 기회는 줄었다. OTT만 해도 이제는 소규모 예술영화를 거의 구매하지 않는다. TVOD로 예술영화를 개별 구매하는 2차 시장의 규모가 줄어든 상황에서, 국내 OTT들이 영화 단건 구매 대신 플랫폼 구독을 통해 작품을 관람하려는 관객의 수요에 공급을 대지 못하고 있다. 결국 빠르고 간편하게 예술영화를 보기 위해선 극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수입 전략도 변화를 맞았다. 과거엔 영화를 여러 편 구매하면, 극장 상영에 끝까지 집중할 영화와 2차 시장에서의 흥행을 염두에 둔 영화를 전략적으로 구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구분이 무의미하다. 또 이전까진 영화의 구매 가격에 따라 P&A 비용을 추산한 후 배급 규모를 결정해왔는데 이젠 대략의 시뮬레이션이 유명무실하다.
- 빵원티켓 등 티켓 프로모션 사업이 아트하우스 시장에선 어떤 실효성을 가지나. 장기적인 관점에선 필요악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 정말 어려운 문제다. 관객 입장에선 비용을 하나도 지불하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스템 아닌가. 수입·배급업자 입장에선 우리의 콘텐츠가 지닌 가치를 격하시키는 건 아닌지 늘 근심한다. 만약 관객이 프로모션으로 관람하는 영화를 ‘비용을 전부 지불하지 않고 봐도 되는 영화’라 생각한다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문화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비용을 가장 잘 태운 채 관객을 극장으로 모객할 수 있는 방법은 또 티켓 프로모션밖에 없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경우 티켓 프로모션을 하지 않아 무척 불안했다.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았을 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불안함이다. 그래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티켓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섰다. 다행히 프로모션 없이 순항 중이지만 이 케이스는 극히 예외다. 요샌 극장 현매 관객이 줄고 이미 티켓 프로모션으로 빠진 좌석 수가 있다보니 아침 관객수에 비해 저녁 관객수가 적게 집계되는 초유의 사태도 꽤 많이 보인다.
- 수입사별 영화 취향을 특정 감독을 통해 예측하기도 한다. 찬란의 경우 <르 아브르>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에덴: 로스트 인 뮤직> <다가오는 것들> <베르히만 아일랜드> <어느 멋진 아침>의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대표님이 스폰지하우스에서 <황혼의 빛>을 수입하던 시절부터 인연이 깊은데.
= 2006년에 처음 칸영화제를 갔다. 당시 대표님과 서로 바빠 영화제 마지막 일정이 되어서야 밥 한끼를 마지막 만찬처럼 함께 먹을 수 있었다. 당시 대표님이 칸에서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을 물어보셔서 <황혼의 빛>이라 답했다. 그랬더니 대표님이 너를 위해 사겠노라며 <황혼의 빛>을 구매해가셨다. 한 감독의 영화를 계속 사는 게 브랜딩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우리도 한동안 프랑수아 오종의 작품을 계속 샀듯 말이다. 미아 한센 러브 감독도 마찬가지다.
- 소속사 51k와 함께 꾸준히 찬란에 투자 중인 소지섭 배우의 에피소드가 근래 다시 화제를 모은다. 찬란의 대표가 소지섭이라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 심지어 칸영화제에서 우리가 <더 서브스턴스>를 수입했다는 기사가 났을 때 ‘소지섭 수입’으로 보도되더라. 그가 찬란 대표로 소개되는 것은 괜찮다. (웃음) 소지섭 배우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길 원하는 타입이라 제공으로 크레딧에 오르는 정도로만 나서고 있다. <악마와의 토크쇼>가 개봉한 이후 소지섭 배우의 투자 사실이 예상외의 주목을 받았다. 지섭씨로 인해 많은 관객이 좋은 영화를 극장에서 꾸준히 찾아준다면, 감사한 일이다. <폭풍의 언덕>을 수입할 당시 배우 본인의 1인 기업에서 투자를 도운 일이 시작이었다. 이어 <필로미나의 기적>부터 한결같은 지지를 보내주고 있다. 항상 고맙다.
이 감독, 놓치지 않을 거예요
놓치고 싶지 않은 감독엔 영화도 좋아야 하지만 좋은 흥행 결과도 포함돼야 하지 않나. 그래서 한명만 꼽기 정말 어렵다. 우리와 연을 이어오는 감독님들이 대부분 즐거움과 아픔을 동시에 선사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고르자니 모든 전작을 가져온 건 아니고, 2015년부터 전작을 함께한 미아 한센 러브를 좋아하지만 이분이 입힌 타격도 만만치 않다. (웃음) 비간은 아직 좀 더 지켜봐야 하고, 조너선 글레이저는 또 10년 뒤에 차기작이 나올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