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 <존 오브 인터레스트> 10만 돌파의 의미는
예술영화 흥행은 어떻게 때아닌 칸영화제 특수를 누리게 된 것일까.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추락의 해부>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10만 관객을 돌파했다. <추락의 해부>를 수입한 유현택 그린나래미디어 대표는 “한국 극장 시장 전체가 65% 정도밖에 회복이 안된 상태에서 예술영화 관객수 10만명은 체감상 코로나19 이전 15만~20만명에 준한다”고 말했다. <추락의 해부>가 작품적으로 갖고 있는 확장성을 제외하고 흥행 수치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이 수입 경쟁이 치열한 라인업이라면 비평가주간이나 감독주간은 숨겨진 보석을 발굴할 수 있는 섹션이다. 2년 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애프터썬>이 관객수 5만명 가까운 스코어를 올린 것은 “과거 예술영화 관객수 10만명의 체감”(유현택)을 안겨줬다.
처음부터 흥행이 담보된 작품들은 아니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이 작품을 너무 무겁고 불편하게 느끼거나 어렵게 느끼지 않겠냐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수입한 이지혜 찬란 대표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영화를 봤을 때 작품적으로나 세일즈사가 제시할 가격 면에서나 수입에 대한 결정이 쉽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는 비화를 전해줬다. “수입 후에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칸영화제를 지나 하반기 비평가 시상식과 연초 오스카까지 괜찮은 반응을 얻었지만 그게 흥행과 직결되진 않을 걸 알아 확신을 갖고 선뜻 개봉을 밀어붙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난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 <엘리멘탈>로 이어지는 애니메이션 열풍과 중간 규모의 로맨스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성과를 거두고 <괴물> 이후 예술영화 시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현상이 고무적으로 평가됐다. 특히 관객수 53만명을 돌파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예술영화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고 새로운 관객층 혹은 이전의 관객층을 다시 유입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괴물>의 홍보·마케팅을 맡은 이채현 호호호비치 대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만의 독창적인 연출 화법과 인간의 마음을 엿보는 특유의 심리적 요소가 부각된 작품”이었던 점에서 시작, 무엇보다 “아이들의 매력을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신비롭게 보여주는 것이 관건”이었음을 언급했다. <괴물>은 관객수 30만명 돌파 기념으로 두 주연배우가 다시 한국을 찾아 무대인사를 돌 만큼 영화 외적으로도 다양한 화제를 모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예술영화는 20, 30대 여성 관객에 의해 움직였다. 팬데믹 이후 10, 20대 관객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한동안 30, 40대 관객은 전만큼 적극적으로 극장을 찾지 않았다. 그러다 <괴물>을 기점으로 다시 30대 관객이 예술영화 시장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지금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30대 관객의 파이가 40%까지 올라왔다.”(이지혜)
한국 독립영화는 왜 여전히 힘든가
2023년 독립·예술영화의 매출액은 전년 대비 277.3%가 증가하며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관객수는 전년 대비 253%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 숫자를 단순히 독립·예술영화의 부흥이라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스즈메의 문단속>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두편의 애니메이션영화가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 인정 심사를 통과해 독립·예술영화 카테고리에 포함되면서 부풀려진 숫자이기 때문이다. <스즈메의 문단속>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매출액은 무려 전체 독립·예술영화 매출액의 57.2%를 차지한다. 두 작품을 제외한 매출액은 568억원 선이며 이는 팬데믹 직전 2019년에 기록한 635억원에 미치지 못한다. <괴물> <추락의 해부> <악마와의 토크쇼> <존 오브 인터레스트> 등의 선전을 섣불리 독립·예술영화의 부활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특히 한국 독립·예술영화는 코로나19 이후 두드러진 박스오피스 양극화 현상에 가장 많은 타격을 입었다. 2023년 한국 독립·예술영화 매출액은 전년 대비 6.4%, 관객수는 8.6%가 감소했고 전체 영화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8%, 즉 1%도 채 넘기지 못한다. 전체 독립·예술영화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30.7%에서 무려 23.1%가 감소한 7.6%를 기록했다.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를 이끄는 진명현 대표 역시 “메가 히트작을 제외하고 6주 이상 극장에 걸리며 장기 흥행을 할 수 있는 것은 해외 예술영화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전체 독립·예술영화 시장이 역대 최고 매출액을 기록한 데 반해 한국 독립·예술영화가 위축되고 있는 현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작동했을 것이다. 양인모 에무시네마 프로그래머는 “한국 독립영화 배급 지원이 축소되면서 개봉 편수가 줄었고 개봉을 하더라도 예전만큼 프로모션을 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어느덧 독립·예술영화 홍보의 중심이 된 굿즈 마케팅이나 이동진 영화평론가 등 영향력 있는 스피커들이 참여하는 영화 해설 토크 등 최근 예술영화 소비층이 매력을 느낄 만한 이벤트는 해외 아트하우스영화에 집중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또한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입소문이 시작되는 전주·부천·부산 국제영화제 및 서울독립영화제가 코로나19로 침체기를 겪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익명의 한 업계 관계자는 독립영화계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결국 경쟁력을 잃은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관객이 만날 수 있는 독립영화는 대체로 주류 영화학교의 ‘졸업영화’이거나 상업 작품 연출 이전의 관문처럼 여겨지고 있다. 자생적인 제작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하고 꾸준히 자기 작품을 만드는 작가 감독이 나오지 않게 되면서 관객은 한국 독립영화를 더이상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게 됐다.”
지금 아트하우스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층은 어떤 사람들인가
1995년 봄, 전세계에서 유례없는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희생>이 서울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이를 두고 해외 매체에서는 “한국에 지식인 관객이 매우 많아서 타르콥스키의 어려운 영화도 10만명이나 보게 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정말?) 그렇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개봉 12일 만에 관객수 10만명을 돌파한 사건 역시 90년대 예술영화 붐의 재래로 읽을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맞고 어떤 면에서는 틀렸다. 1995년 동숭씨네마텍을 기획, 운영한 백두대간은 <희생>은 물론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 등을 한국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비디오 대여점이나 MBC <주말의 명화> 외에 아트하우스 영화를 접하기 어려웠던 이들은 적극적으로 ‘시네마테크’를 찾았고 PC통신 ‘영퀴방’ 등의 커뮤니티에서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를 공유했다. 지금 세대 관객의 성격은 조금 다르다. 진명현 무브먼트 대표는 “지류 티켓이 사라지면서 대신 굿즈를 소장하는 시대다. 기본적인 문화 소양 욕구가 있는 이들이 미술관에 가듯 극장을 찾고 큐레이터의 해설을 듣듯 해석을 함께 소비”한다고 현 관객의 모습을 읽었다. “과거 극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영화만 파는 시네필에 가까웠지만 주말에 씨네큐브를 찾아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는 사람들은 영화를 비롯한 트렌드에 민감한 얼리 어댑터로 보인다. 영화가 ‘넓고 얕은’ 관심사 중 하나인 것이다.”
관객의 취향과 수요를 예측해 영화를 수입해야 하는 수입사 입장에서는 어떨까. 유현택 그린나래미디어 대표는 지금 시대의 관객은 “굳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시네마틱한 경험”을 중요시한다고 봤다. 이를테면 <추락의 해부>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 모두 사운드가 중요한 만큼 이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음향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극장 관람이 필수적이다. 한편 아트하우스 영화 관객수가 5만명, 10만명의 흥행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존 헤비 유저 외의 관객 확장에 성공해야만 한다. 유현택 대표는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어 하는 분들이 예전에는 영화쪽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록페스티벌, 도서전, 미술관 전시, 음악 공연 등 다른 선택지가 많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예컨대 한정된 시간 안에서 야구장이나 SNS 유명 맛집 대신 극장을 선택해야만 하는 유인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극장 상영 시기는 한정된 반면 OTT 등 2차 시장 플랫폼이 다변화되면서 굳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난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때문에 “예술 전체에서 영화가 창작자들의 주무대였던 시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한 발짝 밀려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양인모)며 위기의식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구교환 이후 화제 몰이를 할 독립영화 스타가 배출되지 않는 등 기존 소비층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는 상황에서 아트하우스 영화는 충성도 높은 과거 시네필과는 다른 유형의 관객을 상대해야 한다.
지금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에서는 어떤 영화가 팔리는가
코로나19 이후 보복 소비가 폭발함에 따라 다양한 오프라인 행사가 기획되고 선택지는 다양해졌다. 예술영화관을 나와 유튜브에서 ‘해석본’을 먼저 검색하는 관객 역시 백두대간 설립 시절의 시네필과 같을 수 없다. 배달음식 리뷰와 별점까지 고려하는 시대의 소비자는 확실한 만족을 주는 콘텐츠를 선호한다. 이에 따라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에서도 잘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의 간극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이지혜 찬란 대표는 개봉 전 기대를 모은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가 관객수 7천명에 그친 점을 언급하며 “팬데믹 이전과 비교하면 흥행이 안되는 아트하우스 영화들은 관객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체감했다.
그렇다면 시장의 변화를 뚫고 까다로운 관객의 선택을 받는 데 성공한 작품들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양인모 프로그래머는 “요즘 관객은 완전히 낯선 것보다는 익숙하고 안전한 작품을, 어느 정도 만족감과 인사이트가 보장되는 쪽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이는 재개봉 영화가 늘어 나고 예술영화관이 고전영화 프로그램 혹은 감독전을 자주 여는 최근의 경향과도 연결된다. “알고리즘 시대라고 하지만 관객은 랜덤화된 선택권에는 부담을 느낀다.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거나 영향력 있는 스피커의 인정을 받은 작품을 먼저 고려하는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다.”(양인모) 그렇다고 3대 영화제 수상작, 이동진·정성일·박평식 평론가의 ‘샤라웃’이 반드시 흥행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흥행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이를테면 <슬픔의 삼각형> <추락의 해부> 같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은 한국 흥행에 성공했지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고 오스카 장편 다큐멘터리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수상 실적이 곧 관객수를 담보하지 못한 사례다. 유현택 대표는 “이젠 영화 사이즈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진단했다. 작품의 규모, 수입 경쟁가가 곧 예상 흥행치를 결정하는 원칙이 무너지고 심지어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처럼 같은 주제의 미술 전시는 성행해도 영화의 관객수는 5천명에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예술영화관이 국립현대미술관, 국립극장, 서울재즈페스티벌과 펜타포트 록페스티벌과 경쟁하며 다각화된 변수와 싸워야 하는 시대, 확실한 강점이 있는 작품을 놓고 수입사간 경쟁은 과열되고 가격이 치솟은 반면 “해외 세일즈사에서는 한국쪽 구매가 과거 대비 덜 이루어지고 있다며 의아해하는”(임동영 엠엔엠인터내셔널 공동대표) 일도 벌어진다. <추락의 해부>와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흥행 이면에 시장에서 벌어지는 지각변동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