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내 이름은 유미란! 나도 탐정이죠!', 젠더 관점으로 바라보는 <명탐정 코난>의 유미란 활용법
2024-07-24
글 : 이자연

남도일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이제는 여자 친구가 된 유미란은 온화한 성정으로 <명탐정 코난>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시키는 인물이다. 검은 조직 문제에 연루돼 APTX4869를 먹고 어린아이가 된 코난을 집에 데려온 것도, 갑작스러운 아이와의 동거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아버지 유명한을 설득한 것도 모두 유미란의 너그러운 이해심에서 출발한다. <명탐정 코난> 연재가 처음 시작된 90년대 중반, 미란이 부여받은 캐릭터성은 고정적인 성역할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느껴진다. 미란은 어머니와 별거 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가사 노동과 살림을 도맡으며 전통적인 여성상을 이어받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는 엄청난 가라테 실력자다. 오랜 친구 도일이 자꾸만 화를 돋우면 미란은 참지 않고 주먹으로 전봇대를 화끈하게 부숴버린다. 무엇보다 도일이 APTX4869를 먹게 된 가장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두 사람이 놀이동산을 찾은 이유도 미란의 가라테 대회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서다(미란은 가라테부 부장이다). 도일과 미란,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진중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에 임하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직업적 인정을 받는 건 오직 도일뿐이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역할의 미란

<명탐정 코난: 진홍의 연가>

강력계 형사로 활약한 아버지 유명한, 세계관 최강자이자 모든 미스터리를 손쉽게 풀어내는 소꿉친구 남도일, 사건의 진위를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어머니 노애리 변호사까지 미란은 환경적으로 탐정의 일과 태도에 친숙하다. 어쩌면 상상에 기반하여 소설을 펼쳐나가는 아버지 남건을 둔 도일보다 실무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더 탐정 업무를 일상적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실제로 코난의 정체가 남도일이라는 의심을 처음 제기한 것도 미란이었다. 평소 도일의 말투와 비슷한 모습이나 어린이라고 믿기 어려운 빠른 속독력, 해맑은 목소리로 어른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는 순간까지 이를 판단한 논리적인 근거도 탄탄했다. 미란은 사려 깊은 만큼 타인을 신중하게 관찰했고 그런 능력을 기틀로 자기만의 주장을 완성한다. 하지만 주인공 남도일의 여자 친구로서, 조력자로서, 반응자로서의 미란의 기능이 너무나 중요한 나머지 미란이 스스로 탐정으로서 활약을 펼칠 기회는 많지 않다.

연재 30주년이 지나는 동안 <명탐정 코난>에 담긴 사회상과 가치관 또한 많이 달라졌다. 범죄를 범죄로 인식하는 감수성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남자의 스토킹을 가볍게 희화화하던 모습은(1기 <스토커 살인사건>) 이제 젠더 폭력으로 진중하게 비추고, 아내를 죽이려 한 남편을 해맑은 미소로 용서하던 결말은 오히려 여성이 반전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변화를 겪었다. 사건을 전개시키기 위해 실수를 자주 저지르던 어린이 탐정단도(1기 <사라진 시체 살인사건> <도서관 살인사건>) 범죄 앞에서 혼란스러워만 하지 않고 일어날지 모르는 범죄 가능성을 주도적으로 찾아내 예방한다(7기 <탐정단과 애벌레 4형제>). <명탐정 코난>은 시간을 거듭하며 범죄 추리물의 엔터테인먼트가 무딘 재미를 좇지 않도록 십분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모색하면서도 미란이의 발전이나 성장은 유독 더디다. 코난이 도일의 몸으로 돌아갈 당위성을 미란에게 위임한 듯, 그의 복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듯(그리고 그게 미란이어야 한다는 듯) 회차가 거듭되며 코난의 정체를 알아가는 사람이 늘어나는 동안 미란은 여전히 ‘진실을 모른 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미란의 주도성과 자율성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코난과 남도일의 성공적인 결말을 위한 도구에 머무른다.

로맨스에 가리지 않도록

<명탐정 코난: 흑철의 어영>

극장판 <명탐정 코난: 진홍의 수학여행>을 기점으로 미란과 도일은 정식으로 교제한다. 연재 24년, TV 방영 23년 만에 정식으로 커플이 됐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온 만큼 이들의 러브라인 성사 소식은 온라인상에서 팬, 일반인 할 것 없이 화제가 되었다. 원작자 아오야마 고쇼는 <명탐정 코난>을 “살인과 추리가 곁들어진 로맨틱코미디”라고 명명했으니 이들의 러브라인은 작품에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다. 하지만 러브라인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이 곧 성애적인 면모만 부각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순직 직전 오지인 형사에게 마음을 고백한 송보윤은 <명탐정 코난 경찰학교 편> <명탐정 코난: 할로윈의 신부> 등에 나와 뛰어난 폭탄 처리 능력과 격투술 등을 보여준다. 단역에 가까운 그가 스핀오프와 극장판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순애보적인 면모 덕이었지만 작품은 끊임없이 그의 업무적 능력을 강조한다.

미란은 강한 의협심만큼 실천적이고 행동력이 뛰어나다(다소 충동적이기도 하지만). 극장판 <명탐정 코난: 천국으로의 카운트다운>에서 건물 폭파로 출구가 사라지자 소방 호스에 몸을 묶어 코난과 뛰어내리고 <명탐정 코난: 베이커가의 망령>에서는 달리는 기차 위에서 몸을 던져 빌런과 동반 투신을 감행한다. <명탐정 코난: 감벽의 관>에서는 바다 속에서 상어와 싸우는 모습까지 보여주니 사실 그는 전투력에 있어 세계관 최강자에 가깝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예리한 눈치로 사건에 빠르게 잠입해 총격 속에서 장미를 구해내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6기 <검은 조직과의 정면 승부 만월의 밤의 더블 미스터리>). 장미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미란은 결과적으로 위험에 처한 어린이를 외면하지 않는, 약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녔다. 다른 천재 탐정들보다 속도는 더딜지라도 미란은 정확한 관찰력,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관용,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행동력에 엄청난 전투력, 다른 탐정들이 지니지 못한 따뜻한 공감 능력까지 지녔지만 남도일의 여자 친구라는 자리만이 그의 작품 내 입지를 승격시켜줄 뿐이다. <명탐정 코난>은 미란을 탐정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궁금하다. 이것이 탐정의 능력이 아니라면 무엇을 탐정의 자질이라 할 수 있나. 온화한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많은 것이 생략되고 지연돼버린 이 무데뽀 여자 고등학생이 새롭게 해석되는 날이 오길. 많은 대중이 그의 새로운 면모를 기꺼이 반길 수 있는 날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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