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강수진을 만났다,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강수진 성우
2024-07-25
글 : 이자연
사진 : 백종헌

지난 7월 둘째 주, 인터뷰가 진행된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원래 일정보다 일찍 도착한 강수진 성우가 태블릿PC로 대본을 읽고 있었다. 평소라면 인터뷰이의 시간을 존중하지만 그날은 이상한 충동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 뭐예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보고 싶었단 말을 꺼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88년 KBS 성우극회 21기로 입사한 이래 그는 <타이타닉> <로미오와 줄리엣>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목소리를 전담했고 <란마 1/2> <두치와 뿌꾸> <드래곤 볼 Z> <디지몬 어드벤처> <소년탐정 김전일> <슬램덩크> <원피스> <이누야샤> <카드캡터 체리> <하이큐!!> 등 셀 수 없이 많은, 세대를 관통하는 시리즈 애니메이션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다시 말해 그의 목소리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일상으로 자리했고, 누군가의 생애주기 한 부분을 차지했다.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강수진을 만났다. 특히 열혈 소년 주인공을 주로 맡아온 그는 청량하고 맑은 목소리로 사랑과 우정, 연민과 이해, 도전과 모험, 끈기와 포기를 모르는 열정을 전해왔다. 그의 목소리가 이유 모르게 희망적이고 강렬한 삶의 의지처럼 들리는 이유기도 하다.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이하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으로 탐정들의 새로운 활로를 펼친 강수진 성우를 만났다. 신이치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화면 속 고등학생 탐정을 실제로 만난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은 꿈결 같았다.

- 복합적인 미스터리와 추격 액션까지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은 일반 극영화의 범죄 오락 장르를 연상시킨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어떤 지점이 잘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나.

=이번 극장판은 신이치와 괴도 키드, 핫토리 헤이지까지 세 친구가 함께 나와 활약을 펼친다. 이 셋이 만나는 것부터가 굉장히 오랜만이다. <명탐정 코난> 세계관에서 가장 똑똑한 친구들 아닌가. 각자의 위치에서 선두에 선 인물이 나와 안 그래도 이야깃거리가 풍부한데 거기에 액션까지 더해졌다. 화려한 매직이나 행글라이더 추격은 괴도 키드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아슬아슬한 추리 대결은 신이치와 핫토리의 관계를 보여준다. 또 핫토리와 괴도 키드의 경쟁도 놓칠 수 없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 삼각구도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명탐정 코난> 극장판은 블록버스터에 가깝다. (웃음) 어린이 관객부터 어른 관객까지 두루두루 좋아할 것 같다.

- 일본 현지에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이 시리즈 극장판 최초로 천만 관객을 달성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이 부담스럽진 않았는지.

=천만 소식이 들리기 전에 작품을 먼저 봤다. 팬덤 규모가 전 세대를 아우르는 만큼 <명탐정 코난>이 실질적으로 지닌 영향력을 다시금 체감했다. 사실 원작의 성취에 중압감을 느끼기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든다. 신이치는 이 세계관을 정신적으로 지배하지 물리적으로 지배하지 않는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늘 편하게 먹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웃음)

- 신이치는 주로 코난을 통해 생각이나 속마음을 드러낸다. 의문을 제기하거나 사건에 결정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순간이 그렇다. 길지 않은 대사에 감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게 오히려 어렵진 않나.

=코난은 사건의 진위를 모두 파악했다는 확신이 들면 수면침을 맞은 모리 탐정의 목소리를 빌려 진실을 밝힌다. 이 과정에서 코난이나 모리 탐정의 성우들이 활약을 펼친다. 나는 그전까지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포인트를 살리며 리드하는 느낌을 잘 살리는 게 중요하다.

- 코난이 속으로 생각하다 갑자기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적지 않다. 녹음 과정에서는 김선혜 성우와 티키타카로 빠르게 대사를 이어가야 하는데 어쨌든 이 둘은 하나의 자아로 연결돼 있지 않나. 톤 앤드 매너를 유지해야 하는 미션이 있을 듯하다.

=20여년 전에 김선혜 성우와 호흡을 처음 맞췄다. 그 당시 선혜 후배가 그 부분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썼던 기억이 난다. 최덕희 성우 이후에 후발 주자로 들어와 기존 <명탐정 코난> 분위기를 맞춰야 했고 또 신이치 역인 나와 톤 앤드 매너도 조율해야 했다. 나 또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려 노력했다. 사건 속에서 코난의 관심이 갑자기 증폭되거나 응축될 때, 너무 이질적이지 않은 톤으로 극적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려 했다. 이제는 녹음을 따로 진행하는 경우가 있어서 먼저 녹음한 사람이 그 뒤에 녹음한 사람에 비해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없으니까.

- 이번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은 누가 먼저 녹음에 임했나.

=나였다. 보통 TV애니메이션 시리즈는 두세 그룹으로 나누어 녹음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극장판은 믹싱이나 돌비사운드 등 후시 작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한명씩 차례로 녹음한다. 상호적 반응을 즉각적으로 볼 수 없어서 성우별로 각자의 작품 이해도나 감정의 높낮이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프로듀서의 균형과 조율, 디렉션이 무척 중요하다. <명탐정 코난> 시리즈와 극장판 모두 프로듀서들의 이런 고민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젠가 <씨네21>이 이들을 인터뷰하면 안되나? (웃음)

- 다음에 피력해보겠다. (웃음) 다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으로 돌아오자. 이야기 초반에 니시무라 경부를 만난 코난은 이전 사건을 회상하면서 ‘어, 내가 그 사건을 모리 아저씨가 해결한 걸로 정리했나?’ 하고 생각한다. TV애니메이션 2기 <우에노발 북두성 3호> 사건을 암시한 것이다. 무려 20여년 전에 방영한 내용인데 이를 기억하나.

=어우, 못한다. 극장판 또한 원작 시리즈를 기반해서 제작하기 때문에 각각의 이야기와 역사가 혼재해 있다. 지금까지 TV애니메이션만 1천편 넘게 작업했기 때문에 기억이 흐려진 에피소드들도 많다. 또 녹음을 마치고 나면 머릿속에서 빨리 지워야 하는 게 성우의 직업적 특성이다. 이따금 작업한 나보다 훨씬 더 세세하게 기억하는 팬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이면 많이 반성하게 된다.

- 이전의 한 인터뷰에서 신이치를 두고 “코난 도일 원작 <셜록 홈스>에서 모티브를 둔 인물인 만큼 셜록 홈스처럼 차갑고 냉철한 구석이 있는 청소년”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명탐정 코난>에서 유머러스함을 끌어올리는 것도 신이치인데, 그가 웃음을 주는 방식을 어떻게 보았나.

=그 유머러스한 부분마저 없었다면 신이치는 정말 주변인들한테 소시오패스 취급을 받았을 것 같다. (웃음) 물론 신이치는 차갑고 냉정한 면모를 뛰어넘어 결과적으로 이타적인 일들을 한다. 선하고 타인을 해하지 않는 일들을 지향하고. 이런 지점은 아마도 부모의 영향을 받은 귀한 자산이 아닐까. 이야기꾼인 아버지와 배우로서 호쾌함을 지닌 엄마. 신이치는 정말 부모에게 감사해야 한다. 뭐랄까, 능구렁이 같은 신이치 특유의 포인트가 있다.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여유로움에서 기인한 것 같기도 하다. 최근 <명탐정 코난> 시리즈를 두고 느끼는 점이 있다. 먼저 TV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어린 코난의 시선을 따라 동심을 건드리거나 모험심을 고양시켜서 어린이까지 즐길 수 있게 한다. 아이다움을 유지하는 것이다. 반면 극장판은 액션, 서스펜스, 블록버스터 등 좀더 규모 있는 키워드를 좇는다. 탄탄한 구성력과 스토리, 기획력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그렇게 기존 마니아와 성인 관객들을 넓게 겨냥한다. 그렇게 새로운 팬을 육성한다. 유입시키고 유지시키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 <100만 달러 펜타그램>의 녹음은 얼마나 걸렸나.

=반나절 동안 작업했다. 이번 극장판에서는 내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슬픈 표정을 지으며) 역대 극장판 중 가장 적었던 것 같기도 하고. 왜 신이치는 하이바라한테 약을 안 빌려 온 거야! 괴도 키드는 내가 전담인데! (웃음)

- 문득 궁금하다. 30년 이상 활동해온 베테랑 성우도 연기 디렉션을 받나. 심지어 한 작품을 20년 이상 맡아왔는데.

=물론이다. 다만 내가 받는 디렉션은 감정선이나 연기에 관한 것은 아니고 기술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추후 원활한 믹싱을 위한 디렉션을 받는다. 혹은 다른 성우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텐션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안내받는다.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에서는 짤막한 포인트 대사들을 어떻게 더 유머러스하게 표현할지, 코미디를 공략한 대사들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체화할지 고민했다.

- 긴 방영 기간 덕분인지 국내에서는 강수진 성우의 목소리를 들으면 자연스레 <명탐정 코난>의 신이치를 떠올린다. 일본의 신이치인 야마구치 캇페이 성우와 서로의 존재를 아나. 한국과 일본의 신이치들이 서로 교류하는지 궁금하다.

=일본은 신이치와 괴도 키드 모두 같은 성우가 연기한다. 나도 야마구치 캇페이 성우를 무척 좋아한다. 둘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뉴스를 통하여 그 역시 나를 알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긴 했다. 그의 연기 스타일과 화술을 무척 좋아한다.

- 이전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한일 성우 무대 인사 당시 “앞으로 한일 성우간 교류가 늘어나면 좋겠다”는 소회를 전한 적 있다.

=이전까지는 일본 성우와 우리나라 성우의 위상이 조금 달라서 매칭이 잘 안됐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의 성우들은 여러 루트를 통해 일본 성우들과 교류를 이어가는 일이 많다고 건너들었다. 언젠가 야마구치 캇페이 성우와 함께 작업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너무 재미있지 않을까? (웃음)

- 한일간 성우들의 작업 환경은 어떻게 다른가.

=지금은 한국 내 환경도 무척 좋아졌다. 사실 제작 환경보다 오리지널 콘텐츠를 맨 처음 연기할 수 있는 성우들의 자부심이 다르게 작용한다. 자국의 자체 창작물에 목소리를 불어넣는 경험이 성우로서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지점이 무척 부럽다.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 목소리를 입혀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아니마투스 아닐까. 한국 성우들도 물론 캐릭터에 힘을 불어넣고 있지만 미국, 일본 등 외국 작품이 대부분이라 이미 입혀진 목소리 위에 재더빙을 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도 자체 IP를 키워 자부심을 고양시킬 수 있는 작업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원피스> <이누야샤> 등 세대적으로 사랑받는 작품에 참여하다 보니 그 부러움이 더 커졌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이 이야기를 많이 한다. 우리도 한류 성우가 나와야 한다고.

- <명탐정 코난>이 시작된 출발점을 기억하나.

=오디션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이라 섭외를 제안받았다. 아마도 10대 청소년 목소리를 할 수 있는 성우가 많지 않아서 선택받은 것 같다. 90년대 말에는 모든 캐스트가 한번에 다 모여서 그 자리에서 동시녹음을 진행했다. 북적북적하고 후끈후끈했다. 원로 성우 선배부터 제일 막내인 나까지 모두가 모였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많이 그립다. 연기하는 입장에서 모두가 합을 맞춰나가는 환경이 감정적으로 더 편안했다. 그 당시 더빙한 내용은 다시는 못 듣는다. 어우! 못 들어주겠다. 서툰 것도 서툰 거지만 시대마다 말투와 억양이 모두 다르지 않나. 그때 나의 서울 사투리를 들으면 약간 오그라든다.

- 이전에 최덕희 성우가 <명탐정 코난> 시리즈에 등장한 적 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저 사람이 범인이다!” 하더라. 사람들에게 목소리가 익숙해진 게 오히려 어려움으로 작용하는 날도 있지 않나.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드라마 <셜록>을 녹음할 때 모리아티가 변장한 연구원으로 잠시 나왔는데 사람들이 바로 “저 사람이네…” 하더라. (웃음) 목소리가 지문이다. 사실 성우는 직업의 특성상 1인다역을 맡으며 동시에 다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는 다작을 하진 못했다. 조·단역을 많이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강수진 본인의 선택인가.

=전혀 아니다. 나는 비중에 상관없이 재미있는 역할을 다양하게 해보고 싶다. 조연, 단역, 악역 모두 상관없다. 기존의 열혈 주인공 이미지 외에 다른 역할도 자유롭게 맡아보고 싶다. 그런데 제작자들이 나의 의지를 잘 모르는 듯하다. 일종의 고정된 통념이 있는 것 같다. 주인공을 많이 맡아왔기 때문에 그것에 익숙할 거라는. 물론 나도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더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낼 책임이 내게도 있다. <하이큐!!> 극장판 중에서는 상대팀 감독을 잠깐 맡은 적 있다. 거의 숨은그림찾기 수준으로. 평소 발성과 연기 스타일을 배제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 시도들을 해보고 싶다. 블라인드 오디션을 해보면 어떨까?

- 방금 목소리 지문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나.

=아 맞다!(웃음) 하지만 부담 갖지 않고 오디션을 해보면 좋겠다. 떨어뜨려도 정말 괜찮다.

1. <명탐정 코난> 나의 최애 에피소드

“신이치의 분량이 늘어날 때는 아무래도 멜로 라인이 형성될 때다. 그래서 나의 최애는 TV애니메이션 11기 <홈즈의 묵시록>과 극장판 <명탐정 코난: 진홍의 수학여행>. 특히 <홈즈의 묵시록>은 빅 벤에서 고백하는 장면이 좋았다. 로맨스가 최고!”

2. 나는 가끔 내 목소리 이렇게 이용하곤 한다.

“아주 예전 <뽀롱뽀롱 뽀로로> 이선 성우가 성우 공채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배한성 성우 목소리를 성대모사하며 전화를 걸었다. ‘어, 이선씨. 저 배한성입니다~’ 하면서. 선이가 학교 후배라 워낙 친하고 공채를 준비하면서 내가 코칭도 많이 해줘 기쁜 마음에 장난을 쳤다. 이런 데 목소리를 많이 쓴다. (웃음) 대선배의 축하 전화로 기뻐서 울고 그랬는데 ‘선아~ 나야’ 하는 순간 뚝 그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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