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성우 인생 동안 축적한 모든 연기 노하우를 전부 쏟아붓는다”,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최재호 성우
2024-07-25
글 : 정재현
사진 : 백종헌

쿠도 신이치(혹은 코난)의 조력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서쪽의 명탐정’ 핫토리 헤이지. 지난 20년간 그를 연기해온 성우 최재호는 “나는 이제 50대인데, 영원히 10대 고등학생일 핫토리 헤이지를 언제까지 연기할 수 있을까”라며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이하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에서 핫토리가 처음 등장해 어느 때보다 나직한 목소리로 본인의 추리를 브리핑하는 긴 대사를 홀린 듯 듣는 순간, 최재호의 목소리가 아닌 핫토리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핫토리로 인해 스스로 더 나은 사람, 발전한 성우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최재호를 만나 그와 <명탐정 코난>이 함께한 역사를 물었다.

- <명탐정 코난>이 1994년부터 연재를 시작했으니 작품 속 핫토리 헤이지가 1996년 데뷔한 최재호 성우보다 형이다. 처음 핫토리와 만난 순간을 기억하나.

=2004년 투니버스를 통해 처음 핫토리를 만났다. 많은 선배 성우가 거쳐간 역할이라 무척 성스럽게 다가왔다. 이후 핫토리를 잘 이해하기 위해 핫토리처럼 검도를 배웠고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다. 핫토리 외에도 <명탐정 코난>의 TV애니메이션에서 연기한 캐릭터들이 대부분 검을 다루기도 해서 얼마간 검도를 통해 검을 사용하는 호흡을 익혔다. 오토바이는 지금껏 나의 좋은 취미다. 사실 오늘도 오토바이 헬멧을 가져와 사진을 찍으려다 오버하는 것 같아 자제했다. (웃음)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핫토리를 만나기 전까지 나를 대표하는 캐릭터도 <날아라 호빵맨>의 식빵맨처럼 착하고 예쁘장한 소년들이었다. 그런데 핫토리는 전에 없이 자유분방하고 허술한 구석이 많은 소년이다. 내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성향을 어떻게 끌어낼까 고민하던 중 새로운 취미를 찾아 핫토리에 다가가는 법을 찾은 것이다.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의 핫토리는 전에 비해 좀더 직진하는, 마초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남자가 됐다. 몇년 전 <명탐정 코난: 진홍의 연가>(이하 <진홍의 연가>) 때도 핫토리가 주연급으로 활약했는데, 이번 작품에서 핫토리의 성격이 보다 두드러져 좋다.

- 핫토리 헤이지의 목소리, 대사 톤을 디자인할 때 염두에 두는 지점은 무엇인가. 한 인터뷰에선 핫토리 특유의 짓궂은 말투를 구현하기 위해 어미를 올려 연기하는 말씨를 연구했다던데.

=무작정 소리를 지르면 깨끗하지 않은 목소리가 나오고, 그렇다고 가성 비슷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발성하면 핫토리 특유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기 어렵다. 평소 핫토리가 추리를 할 땐 깨끗한 목소리가 필요하지만 소리를 지를 때 깨끗한 소리가 터져 나오면 오히려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그 간극을 조정하며 핫토리의 목소리를 만들어간다.

- 핫토리 헤이지는 도쿄가 아닌 관서 지방(오사카) 출신의 탐정이다. 이를 반영해 한국화된 TV애니메이션에서도 핫토리가 부산 출신이라는 설정이 붙는다. 하지만 걸쭉한 오사카 사투리를 사용하는 일본 만화책과 성우와 달리 한국의 핫토리는 표준어로 이야기한다.

=내가 경상 방언의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니기 때문에 어설프게 사투리 억양을 연기하는 순간 관객과 시청자의 몰입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핫토리의 억양에 요철과 기복을 주는 방식을 택했다. 요새는 전국구에 매체 보급률이 높아 서울 외 지역에 사는 이들이 표준어 억양으로 말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물론 부산에서 자란 사람들의 정서는 목소리 연기에 반영한다. 흔히 부산을 전사의 도시라 하지 않나. 쿠도 신이치가 정돈된 언행과 몸짓을 보인다면, 핫토리는 일단 사건이 터지면 뛰쳐나가는 과단성을 보인다. 그렇게 불의를 들이받는 핫토리의 성격으로부터 부산 사람 특유의 전사적 성질을 찾아갔고 이를 억양에 반영했다. 핫토리의 시그니처 동작이 있다. 핫토리가 자주 쓰는 야구 모자를 뒤로 넘길 때 보이는 독특한 모션이 있는데, 그때에도 핫토리만의 요철을 강조한다.

- 핫토리 헤이지가 쿠도 신이치의 절친이라는 점 또한 핫토리를 이루는 주요 속성이다.

=핫토리는 쿠도를 만나러 매번 오사카에서 도쿄로 향한다. 왜 핫토리는 장거리 여행을 자진하며 쿠도를 만나러 다닐까? 둘은 성격이 맞는 친구라 우정과 추리 공조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핫토리가 과격하게 사건을 풀어가면 쿠도는 핫토리의 산만함을 슬며시 정리해준다. 또 핫토리는 쿠도의 습성에 대해 화내기보단 동료와 맞춰가길 택한다. 그래서 핫토리가 쿠도를 사모한다는 팬들의 해석도 십분 이해한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쿠도를 이만큼 존경할 수가 없다.

- 20년간 핫토리 헤이지를 연기하며 들은 <명탐정 코난>에 관한 여러 반응 중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면.

=유튜브에 핫토리를 연기한 다양한 성우의 연기를 비교, 분석한 영상이 많다. 그 영상에 달린 댓글 “핫토리 하면 최재호, 최재호 하면 하인성이 생각난다”는 극찬을 잊지 못한다. 또 핫토리를 연기하는 동안 나의 연기력도 거듭 진화 중이다. 코믹한 역할을 맡을 때면 내가 핫토리를 연기하는 동안 경험했던 요소를 자연히 배합한다. 지금은 핫토리를 1, 2년에 한번 연기하는데, 그럴 때마다 성우 인생 동안 축적한 모든 연기 노하우를 전부 쏟아붓는다.

- <명탐정 코난>의 TV애니메이션의 경우 작품 내적 요소가 전부 로컬라이징돼 있다. 핫토리 헤이지가 아닌 하인성으로 연기한 세월도 긴데, 한국인 하인성을 연기할 때와 일본인 핫토리 헤이지를 연기할 때 연기가 어떻게 달라지나.

=“쿠도”와 “도일아”의 발음을 비교해보면 일본어 이름이 발음하기가 편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본어 이름은 입에 덜 익는다. 이번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만 해도 하코다테, 오노에 가문 등 일본의 지명을 입에 익게끔 만들기 위해 계속 연습했다. 지난번 <진홍의 연가>를 녹음할 때 “카즈하!”를 녹음한 걸 들어봤는데 자꾸 “가즈아!”로 들려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다들 “어딜 간다는 거냐?”라고 했다. (웃음) 그래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을 녹음할 때 PD님에게 ‘카’와 ‘가’의 발음 구분이 잘되는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 어느 때보다 핫토리 헤이지의 약진이 이번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에서 돋보인다. 처음 대본을 받아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나.

=이번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은 PD님도 나도 열의가 가득했다. 목숨을 걸어야겠더라. 녹음을 마치고 보니 5시간 반을 녹음했다. 또 이번 작품이 <명탐정 코난: 천공의 난파선> 이후로 괴도 키드와 핫토리가 14년 만에 동반 출연하는 이야기라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녹음을 마친 후에도 PD님에게 계속 연락해 “괜찮으니 언제든 재녹음이 가능하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은 ‘핫토리 헤이지의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요약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션 임파서블> 속 에단 헌트(톰 크루즈)가 수행할 법한 오토바이 액션, 헬리콥터 위 난투를 핫토리가 빠짐없이 해냈다. 멋진 액션 세트피스를 소화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쾌감도 있었을 것 같지만 캐릭터의 민첩한 움직임에 목소리 연기를 맞춰야 하는 까다로움도 있었을 것 같다.

=핫토리는 과거 카즈하와의 키스가 불발된 건으로 인해 괴도 키드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다. 이 상황을 세팅해둔 채 괴도 키드와 벌이는 오토바이 액션과 검술 액션에서 감정과 호흡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PD님이나 음향감독님이 놓친 부분까지도 내가 찾아내 재녹음을 요청했을 정도다. 검으로 맞붙는 장면에서 10원어치의 시간 간격까지도 일일이 계산해 호흡을 넣었다. 결국 액션 시퀀스의 목소리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액션을 이해하는 호흡이다. 이를 만들기 위해 소리를 조절하는 작업도 요구된다. 예를 들어 액션 시퀀스에서 소리를 지를 때 마이크 스탠드를 잡으면 안된다. 마이크에 손이 닿는 소리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럴 땐 머리를 들이밀어 성대에 힘이 가지 않게 한다. 그렇게 버티는 것이다. 헬리콥터 위에서 후쿠시로 히지리와 펼치는 액션 신에서 특히 유의한 부분은 핫토리의 감정이다. 헬리콥터 위에서 괴도 키드의 도움을 받아 자존심은 상하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싸워야 하는 핫토리의 감정을 어떻게 대사에 담을지 고민했다.

- 드디어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에 이르러 핫토리 헤이지가 경치 좋은 곳에서 토야마 카즈하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명탐정 코난> 팬들의 숙원이 풀리는 순간인데.

=PD님으로부터 한번에 오케이를 받았다. 오케이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번 더 연기하면 이만큼 감정이 나오지 않을 거란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사실 핫토리를 오랫동안 연기하다 보니 이번 고백도 또 실패하겠지 싶더라. (서운한 말투로) 그나저나 카즈하가 오오카 모미지만큼 빠른 눈치로 핫토리의 말을 들으려 했다면 어땠을까. 솔직히 나는 카즈하도 답답하다.

- 배역 바깥에서 성우 최재호는 매년 착실히 나이가 들어가지만, 핫토리 헤이지는 30년째 청소년에 머물러 있다. 한 역할과 20년 넘게 함께하며 경력과 나이를 쌓아가는 일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어렵다. 이제 핫토리는 1년에 한번도 만나기 어려운 배역이다. 핫토리와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보여준 연기를 1년에 한번 만나는 핫토리에게 집대성해 보이려 언제나 애쓴다. 내게 핫토리는 대본을 끊임없이 분석해 캐릭터의 디테일을 끝없이 채우도록 만드는 존재다. 또 전과 다른 모습을 선보이기 위해 매 대사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도록 자극하는 존재다. 핫토리는 최재호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다. 인터뷰할 때의 말투나 사진을 찍을 때의 표정에서도 “저 사람이 핫토리를 연기하는 사람이다”라는 게 드러나길 희망한다. 내가 이제 50대 성우 아닌가. 나름 성우협회의 사무총장이고 공식 석상에선 점잖은 무게감을 보여야 할 일도 많은데 핫토리와 20년 넘게 하다보니 어디서든 핫토리의 하이톤 목소리가 자동으로 나온다.

- <명탐정 코난>은 30년 연재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여전히 새로 유입되는 팬들이 있다. 주로 한 세대를 30년이라 설정하지 않나. 이제 <명탐정 코난>은 세대를 넘어 1년차 팬과 30년차 팬이 공존하고, 40대 팬과 10대 팬이 공존하는 문화현상의 일종이다.

=가끔 “중학생 때 <명탐정 코난>을 봤는데 이제 20대 후반이 됐어요”라고 고백하는 팬들을 만나면 감개무량하다. 다른 작품은 자녀들이 부모를 입덕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명탐정 코난>은 오히려 부모가 자녀를 입덕시키는 경우도 많고 말이다. 우리 아이가 8살인데 이번에 친구들을 단체로 데려와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을 본다고 하더라. 내가 연기를 연습하거나 녹음본을 시사하면 아이가 “아빠 잘 연기해서 날 재미있게 해줘”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명탐정 코난>의 어린 신규 팬인 아이의 말을 들을 때면 더 열심히 핫토리를 연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1. 나의 <명탐정 코난> 최애 에피소드

“아직까지는 <명탐정 코난: 진홍의 연가>. 작화가 너무나 아름답지 않나. 토야마 카즈하와 오오카 모미지가 카루타 카드 대결을 벌이는 시퀀스가 특히 예술이다. 그리고 핫토리 헤이지가 이 작품에서 두 여자의 사랑을 한번에 받는 것도 좋다. (웃음) 덕분에 연기할 때도 재밌었다. (인터뷰일 기준) 아직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을 못 봤는데, 보고 나면 최애 작품이 바뀔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다음에 한번 더 물어봐달라.”

2. 성우로서의 직업병

“목에 이상한 조짐이 느껴지면 바로 이비인후과를 찾는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콧물이 조금이라도 차면 바로 석션에 들어간다. 또 카페에서 직접 주문을 해야 할 때 성우 특유의 억양이 있다 보니 감미로운 목소리가 절로 나온다. 핫토리 헤이지로선 핫토리가 워낙 웃는 상이라 평소에도 광대를 올리고 있다. 그러면 의도치 않은 하이톤으로 대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