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속밴드의 공식 티셔츠 디자인을 논하는 자리, 보컬 이쿠요의 캐치프레이즈는 “우승, 결속밴드. 다 함께 승리를 거두자!”다. 이에 드러머 니지카는 “우승은 뭐야? 공연에는 그런 개념이 없잖아”라며 찬물을 끼얹는다. 두 멤버의 이 단출한 대화야말로 ‘음악 애니메이션’이나 ‘밴드 애니메이션’ 혹은 밴드물의 목표와 가치를 가장 적확하게 설명하는 문답이다.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다. 그 결과물의 성취를 완벽하게 정량화할 수 없다. 너무도 주관적인 ‘취향의 차이’라는 말은 음악의 객관적인 완성도나 흥행 성적의 위계를 대번에 격파하기도 한다. “우리 다섯이면 믿을 수 없는 마법을 일으킬 수 있어. 테크닉만이 아니야··· BECK의 정신으로!”라는 밴드 만화계의 명작
국내의 밴드음악 리스너나 서브컬처의 수용자들에게, 나아가 범대중적으로까지 <봇치 더 록!>과 J팝의 감성, 또는 QWER과 같은 성장형 걸스 밴드의 기획이 적중하고 있는 현상은 니지카의 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소년들의 성장 서사로 일군 BTS의 연대기 이래 K팝은 외려 완벽주의를 꿈꾸며 실력이 부족한 아이돌의 인성과 가치까지 격하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마이너한 아이돌의 팬덤들도 서로의 성적을 최우선으로 비교하며 음반 판매량과 음원 순위로 이른바 ‘티어’를 나누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국내 밴드음악 신을 따졌을 때도 대규모 음악 산업화의 광풍 아래 희미해진 1990년대~2000년대의 그 투박한 활력을 그리워한다는 목소리도 꾸준하다. 즉 순위를 매길 수 없는 취향의 활로이자 성장의 밑그림으로서 ‘밴드음악’을 소비하고자 하는 수용자들의 반발 심리와 언더독 서사를 향한 니즈가 <봇치 더 록!>을 자연스레 원하고 있다면 영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봇치 더 록!>이 2000년대~2010년대의 열혈 소년만화, 스포츠만화와 같이 무한히 강해지는 밴드의 풍경을 그리는 것만은 아니다. 나아감과 주저함을 적절히 반복하는 성장과 반성장의 경계, 풀어 말하자면 아주 현실적인 성장의 범주에서 <봇치 더 록!>의 결속밴드는 차차 성장한다. 그 중심엔 원래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싸’ 주인공 고토 히토리가 있다. 늘 혼자였기에 3년 내내 매일 6시간을 기타 연습밖에 할 수 없었고, 개인 유튜브에 연주 영상을 올리기만 했다는 21세기식 해학의 성장 서사가 <봇치 더 록!>의 설득력과 시대성을 키운다. 이것이 바로 <봇치 더 록!>이 그간의 밴드 애니메이션과의 차별점이다.
무도관을 생각하는 온도의 차이
음악과 스포츠의 차이를 명쾌히 절단한 <봇치 더 록!>의 니지카이지만, 그도 ‘무도관’(부도칸)을 목표로 한다는 장대한 뜻을 은밀히 꺼낸 적이 있다. 무도관은 일본의 대형 경기장으로 비틀스, 퀸 등이 공연한 꿈의 무대다. 아다치 미쓰루의 <H2> 등 야구만화의 주인공들이 “갑자원(고시엔)에 가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듯 음악인에겐 무도관이 최종 목표인 셈이다. <케이온!>의 경음악부 부장 리츠마저 “우리 경음악부의 꿈은 무도관 라이브!”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케이온!>은 고등학교 경음악부(밴드부)에 모인 여고생들이 ‘방과 후 티타임’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아기자기한 일일을 이어가는 일상물에 가까웠다. 완전히 느긋해 보이는 밴드물 <케이온!>의 대척에 <걸즈 밴드 크라이>가 있다. 대니 보일이 섹스 피스톨스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재구성한 시리즈 <피스톨> 정도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멤버간의 갈등과 견제, 무서울 정도의 감정적 진폭이 귀여운 그림체에 한껏 담겨 있다. 주인공 니나와 그의 밴드 ‘토게나시 토게아리’의 목표도 역시 ‘무도관 입성’이다. 즉 무도관이란 목적지는 <봇치 더 록!>이든 <케이온!>이든 고전적인 밴드 서사, 피 터지는 반항심을 토대로 한 <걸즈 밴드 크라이>이든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필수 요소로 보인다.
하지만 무도관을 향한 각 마음의 온도는 다 다르다. 방과 후 활동을 “인생의 허비일까나···”라고 회고하는 <케이온!>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소중한 고등학교의 시간을 음악으로 알록달록하게 채우는 일이다. 반면에 <걸즈 밴드 크라이>는 “밴드는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쌓인 녀석이 모여서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이 세상 열받아’라든가 ‘나 자신 너무 좋아, 너무 싫어’ 같은”이라고 토로한다. 이들에겐 자신을 억압한 사회에 반발하고 가족과 맞서며 자신을 무시한 상대에게 승리하는 일이 최우선이다. 두 애니메이션의 주연 밴드인 방과 후 티타임과 토게나시 토게아리의 멤버들은 개인의 구체적인 목표가 다소 다를지라도 이 감정적 톤을 밴드의 중심적인 지지대이자 공감대로 삼으며 각 밴드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간다.
요컨대 무도관은 모두의 공통 목표이면서 공통 핑계이기도 하다. 이 핑계 속에는 밴드마다의 다른 욕망이 도사릴 수 있는 것이다. 밴드물은 이 핑계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르적 배경지기도 하다. 여고생들의 오목조목한 일상 이야기든, 거대한 성취를 꿈꾸는 걸스 밴드의 이야기든 ‘밴드물’이란 형식은 아주 유동적으로 변모한다. 완벽한 왕도가 없는 음악의 세계에서 각자의 특이한 경로가 인정받을 수 있듯 밴드물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기실 꿈이란 그 크기가 너무 커졌을 때 일상을 잡아먹는다. 반대로 꿈이 아예 없다는 사실은 되레 일상의 존재가치를 위협하기도 한다. 무도관이란 밴드들의 꿈은 영원한 허상이자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안전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결속이면서 결속 아닌, <봇치 더 록!>만의 농도
<케이온!>과 <걸즈 밴드 크라이>의 중간쯤 어딘가에 <봇치 더 록!>이 있다. 결속밴드엔 명백한 공통의 감정적 지대가 없다. 니지카는 언니가 못다 이룬 밴드의 꿈을 대리 실현하기 위해 무도관을 꿈꾸고, 베이시스트 료는 “이번에야말로 우리만의 음악을 하기” 위해, 이쿠요는 “다 같이 뭔가를 한다는 행위를 동경”하기에 그리고 히토리는 “밴드로 얼른 돈을 벌어서 중퇴하기” 위해 밴드 활동에 매진한다. ‘결속’을 명시한 밴드임에도 그들의 지향점은 제각각이며 지향을 향해 나아가는 감정의 농도 역시 다르다. 꿈의 크기도 같지 않다. “세계 최고의 재즈 연주자”란 일념을 향해 간 <블루 자이언트>의 미야모토 다이와 밴드들, 혹은 ‘전국 대회 출전’이란 목적 아래 모인 <울려라! 유포니엄>의 취주악부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결속밴드의 일원들은 서로의 목표를 크게 신경 쓰지도, 억지로 부추기지도 않으며 차근차근 경력을 지속한다. 결속밴드에겐 ‘밴드’라는 형식 그 자체가 무도관과 같은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싸’로 명명되는 히토리가 결속밴드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 밴드엔 “마냥 놀자!”라는 귀여운 일탈만 있지 않고, “사회를 부수자!”라는 무서운 분노만 있지도 않다. 조금은 튀더라도, 다른 멤버들과의 성향이 다르더라도 밴드의 결속은 이어질 수 있다. 히토리가 멤버들과 여름 여행을 꿈꾸고 있을 때 니지카는 집안일과 라이브 하우스 운영에, 료는 취미 생활에, 이쿠요는 교우 관계에 집중한다. 그러던 중 멤버들이 히토리의 마음을 눈치채고 하루 동안의 쾌활한 바다 여행을 떠난다. 딱 이 정도. 두달간의 여름방학 동안 단 하루의 시간으로도 결속할 수 있는 적당한 신의와 균형감이 결속밴드라는 무형의 고향을 단단하게 만든다. “팀워크보다 팀플레이를 지향”한다는 인기 밴드 실리카겔의 모토와도 비슷해 보이는 결속의 정도가 어쩌면 지금의 밴드물 수용자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밴드의 모습일 수 있겠다.
물론 결속밴드에게도 위기는 찾아올 수밖에 없다. 연재 중인 원작 만화에서 결속밴드는 점차 메이저 밴드로의 길에 오르며 밴드의 방향성과 정체성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남을 기준으로 살아간다는 건··· 그런 인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하던 <BECK!>의 주인공마저 5명의 멤버가 아니라면 밴드는 없다고 말하며 다른 멤버들의 처지에 맞춰 희생한 바 있다. 밴드란 이처럼 너무도 모순적인 존재다. 개인을 위하면서도 집단을 유지해야 하는 이 아슬아슬한 형체의 이중성, 하지만 그래서 성장의 척도가 어디로 어떻게 뻗어 나갈지 예견할 수 없는 성장물의 매력, 앞으로의 결속밴드가 어떠한 결속과 음악을 선사할지 기대되는 이유다. 여하간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선 결국 <봇치 더 록!>의 2기가 나와야 한다···.